2021년 요한복음 6:1~15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놓고 축하시는 기막힌 예수님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 6:11)
47년 전, 제가 군대 훈련을 받을 때 내 트레이에 담긴 밥보다 남의 트레이에 담긴 밥이 더 많아 보여 그것을 쳐다보다가 정해진 30초 안에 밥을 다 먹지 못하고 구정물 통에 버린 적이 있습니다. 특히 그날 반찬이 군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추장으로 빨갛게 볶은 멸치였는데 하나도 먹지 못하고 버려 지금도 그 볶은 멸치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내 떡은 작게 보이고 남의 떡을 크게 보이면 있는 것도 놓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재능과 개성, 그리고 각자의 건강과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내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귀하고 소중하다 할지라도 내 손에 있으면 한낮 보리 떡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드려지면 5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드린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 남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서 4번째 기적으로 4 복음서에 다 기록될 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큰 무리를 보는 세 가지 시각, 예수님의 시각, 빌립의 시각, 그리고 안드레의 시각이 나옵니다. 그중에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각, 예수님의 목자의 마음, 어머니의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가 드린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받으셔서 축사하시는 기막힌(wonderful)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큰 무리를 목자의 눈으로 보신 예수님(요 6:1~5상)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 잠시 쉬고자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디베랴 바다라기보다 디베랴 호수에 가깝습니다. 그 호수의 모양이 마치 고구마처럼 생겼습니다. 그런데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대 민족의 최대 명절입니다. 이때 성인이면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제사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표적에서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과 목자의 심정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임에도 불구하고 병든 자들의 진정한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신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 9:36).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는 순간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이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자가 없어 유리 방황하는 양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동물에는 나름대로 방어무기와 공격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를 보호합니다. 그런데 양은 방어무기나 공격무기가 전혀 없습니다. 특히 양은 다리가 짧고 눈이 나빠 목자의 도움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금새 실족하여 맹수들의 밥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사람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성세대가 2030 세대를 볼 때 버릇없고 개념 없는 세대로 보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를 꼰대로 봅니다. 일본 식민지 사관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울 밑에 선 처량한 봉선화로 보입니다. 그러나 민족사관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톡톡 튀는 무한한 가능성의 백성으로 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 자기 시각으로 보면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속내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편에서 보면 그들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 마음은 이해하는 마음이요, 이해하는 마음은 목자의 심정에서 출발합니다. 목자의 심정은 어머니 마음입니다.
옛날에 글을 배우지 못한 여자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해가 갈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했고 부모님이 그리웠습니다. 그녀는 시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살림을 꾸리느라 고향에 다녀올 엄두조차 못 냈습니다. 하루는 고향에 있는 친정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할 요량으로 종이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글을 몰라서 한 글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여자는 글 대신에 그림으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커다란 굴뚝과 훨훨 나는 새 한 마리가 다였습니다. 며칠 뒤 고향에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은 글도 모르는데 어떻게 편지를 보냈을까? 모두 의아해하며 편지를 뜯었습니다. 사람들은 굴뚝과 새 그림을 보며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여자의 친정어머니가 밭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시집간 딸에게 온 편지를 내밀며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래요? 편지를 보자마자 친정어머니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고향에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 데 올 새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서로를 깊이 생각하는 마음은 천 리 길도 이어줍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같은 마음, 예수님의 마음, 목자의 심정, 어머니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모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되면 도움의 길을 찾게 되고 도움의 길을 찾다 보면 길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처럼 자신의 문제에 매여 다른 사람에 관심을 두지 못합니다. 특히 코로나19 거리 두기로 마음마저 멀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점점 삭막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일지라도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목자의 심정, 어머니의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을 보면 훈훈한 사랑이 오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과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더하면 만남이 됩니다. 내가 가진 것과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면 배려가 됩니다. 만남과 배려는 가장 따뜻한 인간관계입니다. 따뜻한 인간관계가 고통을 나누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2. 큰 무리를 먹이고자 작정하신 예수님(요 6:5하~6)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감상적인 동정심에 불과합니다. 감상적인 동정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하)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요 6:6). 예수님은 그들이 몰려오는 볼 때 이미 먹이고자 작정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믿음의 순결을 지키고자 뜻을 정했을 때 바빌론의 그 거대한 우상의 소굴 속에서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작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창조적인 지혜가 생깁니다. 그리고 하고자 각오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생각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나름대로 형성된 기존 가치관과 고정관념을 깨어야 합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의 천동설의 틀을 깬 결과였습니다.
지금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31년 전, 1990년에 러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할 때 UBF 내에 한국 목자님들은 모두가 미국 시민권을 가진 미국 선교사들이나 미국 목자들에 의해 러시아가 개척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러시아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선배들은 “미국 목자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되리라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 “어디 성경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성경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법을 깨고 성경의 법을 따라야 한다.”라며 우리의 손으로 러시아를 개척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축복하셔서 우리 교회에서 러시아에 첫 선교사를 파송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시되 빌립으로 먹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빌립의 문제를 아시고 이번 기회에 그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빌립은 머리는 비상하지만 따뜻한 가슴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기회에 냉철한 이성에 따뜻한 마음을 갖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3. 안드레의 5병2어를 쓰신 예수님(요 6:7~9)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물으실 때 빌립은 이렇게 대답해야 옳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도 먹일 수 있습니다. 아멘.” 아니면 “예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에서 떡을 살지 모르지만 어디에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능히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그런데 빌립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
예수님은 무리를 먹이는 것을 기정사실로 정하고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일 것인가를 물으셨는데, 빌립은 돈이 없어 먹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빌립의 대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빈들이요 날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막 6:35).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먹일 수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이상도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빌립은 현실을 볼 때 도저히 먹일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이겠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현실을 보면 그의 생각이 백번 천번 옳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문제는 몰려오는 무리만 보았지 옆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빼놓고 현재 상황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빼고 무리를 보니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 돈이 있어야 떡을 살 수 있다는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돈이 있어야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상식의 틀을 깨야 합니다. 이런 틀을 깨고 옆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때 희망이 보입니다. 세계가 달리 보입니다. 어떤 가능성과 확실성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현실만 보고 안된다고 생각할 때 안드레가 나타났습니다(요 6:8). 안드레는 요한복음에 3번 나오는데, 3번 다 예수님께 사람을 데리고 나왔습니다(요 1:40~41, 12:22). 본문에는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이 빌립과 대화하시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얼마 있다가 한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
그는 오천 명을 먹여 보겠다고 5병2어를 예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현실감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겸연쩍어서 ‘이것이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합니다. 빌립이 없는 200데나리온만 생각하며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안드레는 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없다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리 속으로 들어가 찾았습니다. 이때 한 아이에게서 5병2어를 찾았습니다.
5병2어는 오천 명에게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에게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5병2어를 발견했지만 이를 예수님께 가지고 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5병2어는 가난한 사람의 한 끼 식사요, 말의 사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들고 나왔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하든지 무리를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목자 심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능히 배고픈 무리를 먹일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때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는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고, 사막에서 빌딩을 지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때 그에게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시고, 이런 사람을 귀히 여기시고, 이런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빌립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자에게는 역사하지 않고 안드레와 같이 찾아 나서는 자로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안드레의 5병2어는 1/5000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드레에게 있어서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가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소중하고 귀하다 할지라도 자기 손에 있을 때 어린아이의 한 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생명, 시간, 건강, 전공, 능력, 개성, 믿음 등이 있습니다. 소중한 가정이 있습니다. 소중한 젊음이 있습니다. 민태환 시인은 청춘 예찬에서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의 새가 운다(노래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2030대인 청년 세대는 독수리같은 기상과 기백이 있는 세대입니다. 노인들은 진리를 알면서도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주저앉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진리라고 생각될 때 한계를 넘어 도전합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사를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광주 및 신의주 학생의거, 4.19의거, 5.18 광주민주항쟁 등을 일으킨 주역은 젊은 학생들이었습니다. 기독교사를 보더라도 영국 옥스퍼드대학 holy club, 케임브리지7, 미국의 SVM운동, 미국의 대각성운동, 한국의 UBF, CMI, CCC 등의 주체는 젊은 청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소중한 것도 자기 손에 들려지면 보리 떡에 불과합니다. 젊음을 자기를 위해 살면 세계로 향한 마음, 민족을 향한 마음, 이웃에 향한 마음, 예수님께 향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청년의 때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청년의 때를 주님께 드릴 때 무한한 가능성, 무한한 소망, 무한한 능력, 무한한 믿음과 사랑을 갖게 됩니다.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청년이 됩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소중한 청년의 시기를 보리떡같은 삶을 살겠습니까? 이 소중한 시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다가 일생을 마치겠습니까? 아니면 역사창조의 주역으로 살겠습니까?
가정은 참으로 귀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세우실 만큼 귀한 것입니다. 가정이 아기자기와 함께 아기와 자기들만을 위한 공간이 될 때 복의 근원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질 때 house church가 되어 경건한 자손을 낳아 역사적인 인물로 키우고, 생명을 살리는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4. 5병2어를 축사하신 예수님(요 6:10~15)
안드레가 5병2어를 예수님께 드렸을 때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로 무리를 잔디 위에 앉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역사에 동참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소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다 앉은 것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요 6:11)
첫째, 예수님은 5병2어를 축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드린 소중한 것을 멸시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5병2어에서 그의 믿음과 심정을 보시고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을 보시고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진심을 보시고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5병2어 자체를 보시고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크게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시고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오천 명 앞에 오병이어를 놓고 감사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기이하신(wonderful) 예수님입니다. 세계 선교, 교회 건축 역사, 선교관 건축 등은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할 수 없고,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역사입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가 몇 명의 동역자들로 이웃을 돕고 북한을 돕고 선교사들을 돕는 것도 기이한 역사입니다. 이 모두는 우리의 진심과 기도와 믿음과 사랑과 눈물을 축사하신 기묘한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작은 것을 축사하여 풍족하게 하십니다.
5병2어는 어린아이에게 들려졌을 때 한 끼의 점심 식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기이한 역사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티끌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사람이 되었습니다. 목동의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 들려졌을 때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목동의 물매가 다윗의 손에 들려졌을 때 거대한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가 드리는 작은 물질과 시간을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보잘것없다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들어 쓰시면 기이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 이상 만족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도 만족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항상 더 넘치도록 능히 채워 주십니다(엡 3:20). 하나님은 내가 믿고 구하는 그 이상을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죠지 뮬러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라는 말씀을 붙들고 입을 크게 벌렸을 때, 한 푼 없이 고아 3천 명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란 어미가 제비가 먹이를 가지고 왔을 때 새끼 제비들이 짹짹거리며 입을 벌리는 간절한 열망, 간절한 기도를 뜻합니다. 윌리엄 케리는 우리가 큰 것을 기대하면 큰 것을 얻을 수 있고, 큰 것을 시도하면 큰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입을 크게 벌려 구하면 기이한 역사의 거장들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남은 조각을 거두게 하셨습니다(요 6:11~14). 이는 제자들에게 산 역사를 체험토록 함입니다. 빌립이 남은 떡 조각을 거두면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12 광주리나 남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이 없도록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 우리 선교사님들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의 진심과 목자의 심정을 받으셔서 그들의 원대로 채워 주시고 남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안에 놓이면 기막힌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예수님의 손에 들리게 하여 기이한 역사를 이루는 역사창조의 거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