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2:1~14
청년의 태도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전 12:1)
청년의 시절은 고귀합니다. 청년의 때는 넘치는 젊음과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함과 열려 있는 미래의 기회 등이 가슴에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청년을 일컬어서 새벽이슬과 같다고 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새벽이슬은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이 밤에 온도가 내려가서 작은 물방울이 뭉쳐져 내리는 깨끗한 물방울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팔레스타인에는 식물들이 자라는데 이슬은 절대 필요합니다. 조금 전까지도 식물이 시들어가다가도 새벽이슬을 맞으면 금시 파릇파릇 소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새벽이슬 같다고 하신 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청년은 새벽이슬처럼 영롱하고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맑아야 하나님의 비전을 보며 미래의 꿈을 꿉니다. 둘은 청년의 때는 새벽이슬처럼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벽이슬은 태양이 뜨는 순간 사라집니다. 보통 인간의 발달 단계를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장년기, 넷으로 구분합니다. 청년기는 10대 말에서 20대 말로, 청년기가 가장 짧습니다. 셋은 청년의 때는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시기라는 것입니다. 성년을 맞는 청년들이 다음 다섯 가지를 꼭 지키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친구를 잘 선택하라.
좋은 친구는 나의 스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탈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속됨을 고칠 수 있고,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편벽(偏僻)됨을 깨뜨릴 수 있고,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고루함을 바로 잡을 수 있고, 인품이 높은 친구를 만나면 나의 타락한 속기를 떨쳐버릴 수 있고, 차분한 친구를 만나면 사치스러워져 가는 나의 허영심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 친구는 모든 면에서 나의 스승이다. 좋은 친구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 보자.”
그리고 명심보감에 급난지붕(急難之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급(急)하고 어려울(難) 때 힘이 되는 친구(朋)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A friend in need입니다. 반면에 술 마시고 밥 먹을 때에는 형, 동생이라고 하는 카톡 친구는 수백 명이 있지만, 급하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친구에게 힘이 되는 급난지붕(急難之朋)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경에 요나단과 다윗의 아름다운 우정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기이한(wonderful) 사랑입니다. 이 우정은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우정입니다. 이 우정은 시련 중에 발전하고 꽃을 피운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낙엽이 다 진 가로수처럼 삭막하고 메마른 코로나시대, 은혜를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시대, 어려울 때 돕는 친구,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가졌으면 합니다.
친구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에 make friends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물질로 친구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친구를 얻기 위해 투자합니다. 우리가 친구를 얻기 위해 어느 정도 투자합니까? 그리고 이런 진실한 친구를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필요하면 가까이하다가도 유익이 되지 않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납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생활할 때, 두 차례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변함없는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보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松柏)를 이상직의 지조에 비유한 그림입니다.
‘세한도’란 《논어》 자한편에서 나오는 ‘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라는 구절로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사람이 고난을 겪을 때 비로소 지조의 일관성과 인격의 고귀함 등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시절이 좋을 때나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나 한결같이 인격과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한도는 고난을 겪는 추사에 대한 변함 없는 이상적의 급난지붕(急難之朋)에서 태어난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좋은 친구입니다(요 15:13~14). 예수님은 좋을 때도 함께 하시지만 어렵고 힘들 때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위로와 사랑의 손길로 보듬어주십니다. 따라서 좋은 친구가 없다고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좋은 친구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좋은 친구입니다.
둘째, 결혼 가치관을 가져라.
청년의 때 결혼을 해야 하는데, 결혼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찾기 전에 좋은 배우자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은 비교하거나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들이 여러 여자를 놓고 비교하고 저울질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들 또한 많은 남자를 놓고 제비뽑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찾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좋으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냐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감이 누구인가? 성격을 파악하고 외모를 관찰하지 않았습니다. 성격은 일생을 함께 살아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성격은 영어로 personality인데 이 단어는 라틴어 persona, 가면에서 왔습니다.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지만 한 길 속의 사람 마음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사람의 성격을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품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가치 판단, 사고 구조는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비굴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의 오빠 앞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주인의 외동아들을 위해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예비하셨는지를 분명하게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설사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속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창설하신 후에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축복하십니다. 가정은 하나님 축복의 그릇이요, 자녀들은 축복의 물줄기입니다. 가정이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없고 그 자녀들이 축복을 계승할 수 없습니다.
요즘 가정이 무너진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이혼율의 증가는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문제는 안의 해, 가정의 해(sun)가 되어야 할 아내들이 가사와 자녀 양육과 교육 문제로 각종 병리 현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여성이 병들면 가정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가정의 빛은 어머니입니다. 엄마가, 아내가 우울증에 시달려 보세요. 그 가정은 그늘져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온 것은 어머니들의 위대한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남자 뒤에는 두 여인의 손길, 어머니의 인자한 손길과 아내의 어진 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여인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이 주님이 주신 축복의 그릇이요, 축복의 물줄기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보호하고 지켜야 합니다.
더 나아가 가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실현하고, 가정을 통해 주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이웃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크리스천 가정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대로 분명한 결혼관, 가치관을 갖는 것이 가정의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입니다.
셋째, 직업을 소명의 장소로 여겨라.
직업이란 독일어로 베루프(Beruf), 소명이란 뜻으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이 세상에서 최고를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직업 선택에서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연봉이 얼마냐, 대기업이냐로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소명(召命, Calling)》에서 직업이란 하나님의 부름(Calling)에 대한 응답(Response)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떠나 목적을 찾고자 하는 모든 희망은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평생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연봉이 많으면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하는 태도가 성패를 좌우합니다.
바울은 직업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이 말씀은 우다윗 집사의 직장 요절입니다. 우리에게 소명의식이 없으면 늘 회사와 상사에게 불평하다가 끝납니다.
세상에 하찮은 직업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직업이 모두 귀합니다. 하물며 주님 안에서의 직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중요하고 귀합니다. 성경은 이를 지체로 표현합니다. 아무리 작은 지체라 할지라도 다 긴요합니다. 교회에서 청소하는 것, 성경 공부하는 것, 심방,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
우리 속담에 티끌 모아 태산, 천리 길도 한 걸음,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중국 고사, 이 모든 말들이 작은 일을 쉬지 않고 꾸준히 열심히 하게 되면 마침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작은 시내가 모여 강을 이루고, 강이 모여 바다를 이룹니다. 갑자기 바다가 되고 태산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속에 작은 일을 소홀히 여기고 한탕주의, 벼락출세, 손을 안 대고 코를 풀려는 안일주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탕주의, 안일주의를 깨고 어디를 가더라도 소명의식을 가지고 작은 일에 성심성의껏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직업은 calling, 하나님께서 평생 맡기신 소명입니다. 성경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고전 4:2).
넷째,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라.
백두산의 물이 동으로 떨어지느냐, 서쪽으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나누어집니다. 태백의 검룡소의 물이 남쪽으로 떨어지면 낙동강이 되고 서쪽으로 떨어지면 한강이 됩니다. 이처럼 청년의 때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분수령입니다. 인생의 행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이 청년의 때입니다.
인생의 길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넓은 길과 좁은 길뿐입니다. 넓은 길은 지옥의 길이요 좁은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넓은 길을 좇는 사람은 악인의 길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입니다. 좁은 길을 걷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청년의 때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은 복 있는 삶을 살 것인가 결정짓는 시기입니다.
또 청년의 때는 열심히 씨를 뿌리는 기간입니다. 청년의 때 씨를 뿌려야 노년에 거둘 것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청년의 때는 창조자를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전 12:1)
성경은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이유를 첫째는 곤고한 날이 이르고, 둘째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곤고한 날, 아무 낙이 없다는 것은 병들고 늙음과 죽음의 날을 뜻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청년의 때가 지나가고, 병들고 늙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일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새찬송가 330장)
그러므로 청년의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청년의 때 많은 사람이 회심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첫선교사이며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8월 9일, 26세의 나이에 영국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첫 선교지인 중국에서 아내와 자식을 잃고 후에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왔다가 1866년 9월 2일, 26세에 평양 대동강 양각도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처형하는 병사에게 성경을 주면서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병사의 이름이 박춘권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후 한국 첫 장로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에 배 밖으로 성경을 던졌습니다. 그 성경을 한 어린아이가 주워서 주인에게 주었는데, 그 성경을 뜯어서 방을 도배하였습니다. 이 집이 여관이 되어 많은 사람이 천정과 벽에 도배된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후에 이 여관은 평양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26세의 젊은 토마스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청년이란 꼭 나이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 사무엘 울만은 이렇게 청년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다. 마음가짐을 말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도 7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고, 나이를 더해나가는 것만으로 사람을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바로 늙는다.”
전도서는 늙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전 12:2~8). 늙는다는 것은 희미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기억력이 희미해집니다. 비 뒤에는 맑은 하늘로 변하지만, 늙는다는 것은 맑은 하늘이 없습니다. 늘 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비가 오려면 팔다리가 쑤시고, 비가 개면 머리가 아픕니다. 청명한 날이 없습니다. 그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떱니다. 손이 떨린다는 것입니다. 늙으면 손과 발이 떨립니다. 그러다 보면 허리가 구부러지고, 지팡이를 짚어야 합니다.
‘맷돌질 소리가 적어진다’는 것은 음식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던 식욕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치아가 상해서 고기를 씹을 수 없습니다. 과일도 갈아서 먹어야 합니다.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눈이 희미해져 돋보기를 써야 보인다는 것입니다. ‘문들이 닫힌다’는 것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벽잠이 없어 새소리를 듣고 일어난다’는 것은 잠이 안 온다는 것입니다. 잠이 많다는 것은 젊음의 상징입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한다’는 것은 목소리가 고장 나서 소프라노가 저음으로 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늙으면 고공공포증이 생겨 고층아파트에 사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살구나무에 꽃이 핀다’는 것은 곳곳에 버짐이 피고 머리가 허옇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뚜기도 짐이 될 만큼 기력이 쇠하고, 아무리 보약을 먹어도 원욕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다 늙어 죽어 조문객이 몰려오게 됩니다. 이제 은줄이 풀립니다. 금 그릇이 깨집니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집니다.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집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다 깨지고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젊을 때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여정은 잠깐입니다. 우다윗 집사가 초등학교 때 ‘하루는 길고 인생은 짧다’란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듯 40이 되었습니다. 10대, 20대는 시간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60대는 해마다 늙고, 70대는 달마다 늙고, 80대는 날마다 늙고, 90대는 시시각각으로 늙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월 속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섯째, 하나님을 경외하라.
전도서 12장 9~11절을 보면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러기에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고, 인생의 길잡이가 됩니다.
요즈음 하진 선지 하영 자매들이 매일 잠언을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진 자매가 잠언 읽기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청년의 날에 부지런히 성경을 읽을 때 일생 살아가는 동안 말씀이 등불이 되어 이들의 길을 밝히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2~14)
그는 모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경외함’이란 하나님께 사랑과 두려움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경외함은 참된 예배로 나타납니다. 참된 예배란 예배라는 형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땅에 있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늘에 계신 초월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말씀을 듣고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응답하면 감동으로 나타나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해 참된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존 칼뱅은 예배를 ‘하나님 앞에서(In the sight of God)’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인생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참된 찬양과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심령이 뜨거워집니다. 이처럼 참된 예배는 엄숙하고 신비롭습니다.
우리는 성년의 날을 맞아 친구를 잘 선택하고, 가정을 귀히 여기고,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곤고한 때가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자로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