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22~40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개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우리의 삶의 목표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목표’와 ‘목적’은 비슷한 것 같지만 완연히 다릅니다. 목표는 삶의 방향을 말하고, 목적은 ‘왜’라는 삶의 이유, 곧 의미와 가치를 뜻합니다. 사람에게 삶의 목표, 방향도 중요합니다. 삶의 목적이 잘못되면 가치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몇 년 전, 교육대학원생들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저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 스승의 사표가 되는 게 꿈이고 목표라고 대답할 것을 내심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수강생 중의 한 원생이 건물주가 되는 게 꿈이요 목표라고 해서 내심 놀랐습니다.
교사가 건물주가 되는 게 꿈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왜 건물주가 되고자 하는가? 그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건물주가 되고자 하는 목적이 단순히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라면 설령 건물주가 되었다고 해도 그 삶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다윗의 삶의 목적도 분명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주시리이다(fulfill his purpose for me, NIV).”(시 138:8) 다윗은 나를 위해 보상하여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목적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 기도문에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본문은 이런 그들에게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인생의 목적과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나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기를 기도합니다.
1.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요 6:26~27)
사람들은 오랜만에 포식하여 포만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고 나니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날 빵을 배부르게 먹던 생각이 나서 그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혹시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반가워 코가 땅에 닿기까지 “선생님,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인사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면 영적인 소원과 예수님께 대한 열심히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전날처럼 환영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요한복음에서 표적(Sign)은 그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 뒤에 숨겨진 의미가 중요하며 그것이 본래의 목적입니다. 무리는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인격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반사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반응과 응답은 다릅니다. ‘응답(response)’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라면, ‘반응(reaction)’은 반사 신경으로 나타나는 동물적인 현상을 뜻합니다. 무리들은 반사적으로 예수님을 이용해 빵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요 6:2). 그들은 예수님을 병 고치는 의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떡을 먹고 배부른 후에는 아예 예수님을 빵공장 사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부르자 예수님을 이용해서 계속 빵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한 것이 아니라 육의 양식만을 구하는 동물과 같은 물질 차원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전락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고 가진 것이 없으면 마음이 가난하고 순수해집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3).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유하게 되면 영적인 송원을 잃고 타락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았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부유해졌을 때 우상을 섬기다가 타락하여 북이스라엘을 B.C.722년에 망했고, 남유다는 B.C.586년에 바빌론에게 멸망했습니다.
서구 유럽도 예외는 아닙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언덕 위의 교회를 세워 세상을 복음으로 섬기고자 하는 거룩한 소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50세 이상 살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미국을 제사장 나라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유하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죄의 온상이요, 죄를 수축하고, 전쟁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60년대 우리 부모님과 선배 세대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절규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도시락을 가지고 갈 수 없어 점심 시간이 되면 물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는 5,000년 만에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세계 경제 10위 권에 드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좀 먹고살 만하니 일은 안 하고 놀 생각만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꼰대 목사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축배의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우리교회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개척 초기에 믿음의 선배들의 눈물과 땀과 헌신의 결과입니다. 우리 선배들은 양 한명을 얻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심방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교회 건축을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지 모릅니다. 밤을 지새우며 말씀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근거 없이 배가 불러 양들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얘기하는게 아니고 제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고 현상유지나 하고자 하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서구유럽 교회와 같이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위기의식을 깨닫고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짐승과 같이 전락한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썩을 양식’이란 없어질 육의 양식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명예, 권세, 타이틀 등을 포함합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고상하고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모두 쇠하고 썩어져 없어질 것들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하산길에 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우리의 목적과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거짓된 소망이요. 목적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수단이지 진정한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수단을 진정한 목적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썩을 양식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고귀한 존재인 만큼 삶의 목적도 귀해야 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약속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 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값지고 고결한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살면 그 인생도 영원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8~29)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the works God)’은 복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주체가 되어 많은 일을 해서 많은 업적을 남기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거래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할 테니,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거래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하나님의 일(The works of God)’은 단수로,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일을 하고, 일을 많이 해도 내가 주체가 되면 그것은 자기 의와 행위에 기초하여 자기 일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행위보다도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롬 1: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을 축복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주목하시고 그를 귀히 여기십니다.
아브라함은 인간 편에서 보면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생명을 보존했고, 이스마엘을 낳았고, 피해의식에 빠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나님께 데모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때 그는 믿음의 거목,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신앙이란 처음도 믿음이요, 과정도 믿음이요, 마지막도 믿음입니다.
3.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0~40)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40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 같이 그들에게도 한 번만 아니라 계속해서 양식을 주면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주신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위함이었습니다(신 8:3). 또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올 메시아의 모형입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육의 양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참 양식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그것도 40년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하는 영생의 양식을 주고자 하심입니다(요 6:32~33).
그러자 사람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요 6:34)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양식은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음식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배고픔과 영적인 배고픔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떡이 필요합니다. 떡은 고상한 용어로 경제 문제입니다. 떡 문제는 사람의 기본욕구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떡보다 절실한 현실문제는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 “사흘 굶어 담 안 넘어 가는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도 배가 고파 빵 한조각을 훔쳐 먹지 않았습니까? 맹자도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란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여야 윤리와 도덕이 선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돈이 필요합니다. 이 기본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돈의 필요성을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이 가장 서러운 것은 춥고 배고픈 것입니다. 시리아 난민의 한 어린아이가 며칠을 굶주리다가 얻은 빵을 허겁지겁 먹다가 죽었다는 뉴스와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먹지못해 신장이 작고 빼빼 마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배고픔은 자체가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굶주림보다도 더 비참한 것은 영적인 배고픔입니다. 영적으로 배고프면 영력이 없습니다. 공허하고 허무하고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그러다가 마약에 손을 댑니다. 재벌 3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마약에 손을 댑니까? 예수님은 간식이 아닙니다. 심심풀이 땅콩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인데, 현재 생명의 양식입니다(I am the bread of life).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에게 과거의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 과거의 생명의 떡이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또 미래의 생명의 떡이 아닙니다. 미래의 생명의 떡이라면 생일잔치 한번 먹자고 열흘 굶는 꼴이 됩니다.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 미래에 잘 먹자고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현재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예수님께 나아와서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떡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런데 무리는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예수님을 생명을 떡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떡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와 더불어 인간에게 책임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요 1:12). 부르심의 초청에 응답해야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믿게 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이제 생명이신 예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사람이 누구 품에 안기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일화입니다. 박지성 선수는 포르투갈 전에서 천금같은 골을 넣었습니다. 박지성은 골을 넣고 두 팔을 벌리고 감격하는 히딩크 감독으로 달려가 안깁니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 선수를 격하게 포옹을 합니다. 그 포옹에는 무명의 자기를 선수로 기용한 감독에 대한 고마움과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감독과 선수 사이에 말없는 사랑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 선수를 축구의 고장 유럽으로 초청하여 세계적인 선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한편 황선홍 선수는 박지성 선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였습니다. 그도 폴란드 전에서 천금 같은 골을 넣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16강에서 8강, 4강까지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황선홍 선수가 골을 넣는 순간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와 똑같이 양팔을 벌리고 환호합니다. 이때 황선홍 선수는 히딩크를 선택하지 않고 박항서 코치에게 안깁니다. 황선홍 선수는 후에 자기 생애에 가장 후회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술회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품에 안겨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은 화려하지만 썩은 동아줄과 같고 거미줄과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 양식은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이 양식을 먹는자 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육의 존재이므로 육의 배고픔이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영의 존재이므로 영의 배고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육의 배고픔은 참을 수 있지만, 영의 배고픔은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이 충족될 때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그 품에 안겨 영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