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심하지 말고 절제의 미덕을 갖자
하나님은 ‘탐심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새로운 문명이 도래해도 잊거나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모든 범죄의 근원은 십계명을 어긴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십계명은 도덕의 근원이며 기독교 윤리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윌리어드(G. W. Williard)는 “십계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법의 어머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계명의 입법자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단순한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모든 법의 근간입니다.
첫째 계명에서 아홉째 계명까지는 행동에 관한 계명이라면,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은 행동 이전의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동의 원인이 되는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마음은 행동과 말의 근원입니다(잠 4:23). 생각이 영감을 주고 행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탐심하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의 근원을 다스리는 계명입니다.
탐심은 인간만이 갖고 있습니다. 사자는 배가 고파도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만 사냥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먹을 것만큼으로 만족하지 않고 쌓아 놓습니다. 냉장고에 저장합니다. 포를 떠서 소금에 절여 말립니다. 진공으로 통조림에 보관합니다. 탐욕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게 하는 에너지의 분출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더 더 갖자, 좀 더 더 앞서가자, 좀 더 더 올라가자.”라는 끝없는 욕구는 자신을 파멸로 이끕니다. 탐심은 모든 죄악의 근원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탐심의 대상은 각양각색입니다. 탐심의 종류에 땅, 돈, 물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식탐이 있습니다. 건강에 좋다면 성경에 먹지 말라는 계명까지 어기며 먹습니다. 지금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의 원인도 정력에 좋다는 박쥐를 잡아먹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탐심이 바이러스를 가져와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성의 탐욕과 미의 탐닉이 있습니다. 탐심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명예에 대한 탐심, 권세에 대한 탐심, 헛된 지식에 대한 탐심, 일류와 최고만을 추구하는 탐심이 있습니다. 탐심이 생기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얻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망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성향을 아시고 “너희는 탐내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탐심은 특정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만연되고 보편화된 죄입니다. 다른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탐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탐심은 가지고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먹을 쥐고 태어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라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탐내지 말아야지 하는 순간 탐심이 마음에 파고 들어옵니다.
탐심은 들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이 획득하는 정보의 95%가 시각으로 얻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눈으로 선악과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그런 그가 탐심의 눈으로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의 열매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마 6:22). 탐심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딤전 6:6~8).
안분지족(安分知足)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탐하지 말며 자신이 처한 처지를 파악하여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2019년에 오스카상을 받은 〈기생충〉의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의 가훈이 공교롭게도 ‘안분지족’이었습니다. 기택이와 자녀들은 가훈대로 살지 않고 한 번에 사다리를 건너뛰어 부자가 되고자 하는 탐욕으로 다시 반지하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탐욕을 버리고 한탕주의와 신기루를 따르지 말고 사다리를 올라가되 한 칸 한 칸 올라가야 합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단편 소설집에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내용이 나옵니다. 머슴살이하는 가난한 이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는 이반에게 “다음 날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뛰어서 내 농장을 돌고 오면 도는 만큼 당신에게 땅을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들은 이반은 큰 땅을 소유할 꿈에 부풀어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는 해가 뜨는 순간 온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중천을 넘어 기울어지기 시작했지만 멈추어 돌아가지 않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뛰는 만큼 넓은 땅을 차지할 욕심으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마침내 해가 지는 시간이 다 되어 첫 출발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지쳐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 죽은 시신을 묻기 위해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 서로 하는 말이 “이 사람에게는 3평이면 넉넉하구먼.”이었습니다.
탐심을 이기려면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갈 5:22). 절제는 기독교 윤리의 덕목입니다(벧후 1:6). 절제는 자기 욕심이나 감정에 끌리지 않고 그것을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미혹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절제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것을 가지고 자연스러운 멋과 그 멋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5)라고 했습니다. 절제는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 승리의 비책입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우니 소유에 집착하고 쌓아두기에 급급합니다. 젊은 세대는 영끌로 아파트를 구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탐욕을 버리고 자기 유익과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조금 양보하여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