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8~41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요 9:37)
요한복음 9:1~7절을 보면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이 뜨였습니다. 그가 눈이 뜬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고, 맹인되었던 사람 또한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기에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지키기 위해 39조 234항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규정을 만든 의도는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규정이라는 빈 껍질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하게 ‘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면 되고,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안 하면 됩니다. 성경 말씀에 무언가를 덧붙이면 안 됩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창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성경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창 3:3)라는 혹을 하나 더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고 더하는 데서 항상 문제가 생기고, 여기에서 이단이 나오고 사이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성경 말씀을 대하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셨다는 기본 정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에 교회 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향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바른 자세입니다.
베르너 퀴스텐마허 목사의 베스트 셀러인 《단순하게 살아라(Simplify your life)》, 《단순하게 사랑하라(Simplify your love)》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복잡한 사회일수록 단순한 삶을 살라. 단순한 삶을 살려면 초점을 한 가지에 모아라. 그 초점이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사랑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말씀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단순한 마음, 단순한 믿음, 단순하게 대답하는 단순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이 뜬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하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본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믿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단순한 믿음이 성경 말씀으로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 단순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 메시아로 만나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한 가지 아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의 눈이 떠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한 가지 아는 것(요 9:8~25)
맹인이 눈이 떴다는 것은 감격스럽고 기쁜 일입니다. 크게 잔치를 벌여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좋은 일을 가지고 끝까지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관습과 전통에 매여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용이 없는 형식과 전통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그들은 “너를 눈뜨게 한 사람은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이니 죄인이다. 너는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아느냐?”고 심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하던 데서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요 9:17).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부모까지 소환하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요?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누가 눈을 뜨게 했소?’ 다그쳐 심문했습니다. 부모는 눈치가 빨랐습니다. 부모는 잘못하면 출교당할 것 같아 ‘그가 내 아들이고 맹인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가 성인이니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대답했습니다. 그 부모의 대답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어려울 때 아들 편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부모와 자녀라 해도 믿음은 한결같을 수 없습니다. 부모의 믿음이 좋다고 자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믿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잘 믿는다고 아내도 함께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의 믿음으로 남편을 구원할 수 없고, 남편의 믿음으로 아내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각기 개인적입니다. 그리고 체험이 없는 신앙은 작은 사건 앞에서도 흔들립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다시 불러 두 번째 심문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로 아노라.’ 이에 그는 단순하게 대답했습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그는 ‘당신들이 말하는 예수라는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내가 알 바 아닙니다.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전에 소경이었지만, 선지자 예수가 눈을 뜨게 해서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눈을 떴다는 분명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본인이 경험했으므로 분명하게 ‘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예수님을 부인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구원의 은혜가 분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시인할 수 없었고, 박해와 두려움 중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한가지 아는 구원의 은혜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한 가지 아는 구원의 은혜가 없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는 구원의 은혜가 없으면 타성에 젖은 신앙 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믿음이 있을 때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입니다. 그가 나이 많아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정신이 오락가락했습니다. 자기 나이도 모르고 자기 이름도 모르고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제자가 이 대학자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너무 기가 막혀서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지금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두 가지가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또 하나는 예수님이 내 구주라는 것, 두 가지는 확실히 기억하네.”
이처럼 우리는 어떤 환경과 어떤 역경 중에도 확실히 아는 한 가지 체험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B.C.와 A.D.,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자기 자신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 뉴턴 또한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새찬송가 305장)라고 간증하였습니다.
2. 믿고자 하나이다(요 9:26~38)
한 가지 아는 경험 신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말씀으로 체계화되지 않으면 예수님을 병을 고치는 의사 정도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날 운이 좋아서 눈이 뜨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시간이 가면 그 체험이 희미해지게 됩니다.
체험은 한 사건으로 충분합니다. 그 사건을 잊지 말고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음에도 고쳐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신비로운 경험을 체험하려고 하다가 무당 신앙이 됩니다.
저는 2012년 3월에 전립선 수치가 100% 암의 수준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으로 20일 만에 100%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제 아내와 아들과 며느리, 딸, 민내과 민효영 원장님, 이정형외과 이지동 원장님, 인하대학교 박지현 교수님, 그리고 기도해준 동역자들에게 고마움으로 늘 기억합니다. 요즘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해 주신 것을 인하대학 정문 시대를 열라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부모까지 소환하여 예수가 죄인이라고 몰아갔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게 되자 눈을 뜬 사람을 다시 심문했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눈을 뜨게 하였느냐?” 물었습니다. 이에 그가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합니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화를 내며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지만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다 압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오지 아니하였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요 9:30~33)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한 가지 아는 은혜를 붙들었을 때 바리새인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책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존심이 상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하며 그를 쫓아냈습니다. ‘쫓아냈다’는 말은 출교를 뜻합니다. ‘출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징계로, 회당 명부에서 제명되며 공공연히 죽여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출교가 무서워 소경의 부모까지도 모른다고 했으며,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았을 때가 좋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기라도 했습니다. 눈을 뜨고 나니 박해와 여러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제 그는 외롭고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육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영적인 눈이 뜨이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가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
‘인자’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메시아의 별칭입니다. 이에 그가 “주여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요 9:37)
그러자 그는 외쳤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 9:37) 그는 드디어 영적인 눈이 뜨여져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예수라는 한 인간으로 보았다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경건한 분으로 알았습니다. 이제는 한 가지 아는 믿음으로 마침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많은 박해 중에서도 어떻게 믿음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까?
첫째로,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실로암까지는 약 2㎞나 되는 거리입니다. 그는 실로암까지 가면서 여러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을 듣고 다른 방법은 없는가?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꼭,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둘째로, 그의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을 통한 체험 신앙입니다. 그가 눈을 뜬 날이 안식일이라 많은 사람이 그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다.”(요 9:25)라고 자기 체험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신앙은 경험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신앙은 경험이다(Faith is experience)”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자기가 체험한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건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들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변증하였습니다. 그는 체험 신앙으로 끝나지 않고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넷째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표적은 그리스도의 표적으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사 35:5).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일하신 것을 믿었습니다(요 9:33).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 이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그가 눈을 뜨고 나서 생각하니 하나님이 저분을 통해서 내 눈을 뜨게 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목사님을 통해 지금 내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을 하면 설교가 은혜가 될 수 없고,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살전 2:13). 그들이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때 8일 만에 데살로니가 도시가 복음으로 뒤집어졌습니다.
다섯째로, 그에게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좀 더 믿고 싶고, 좀 더 바로 알고 싶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십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 9:36). 그는 지금도 믿고 병을 고쳐 주신 것도 알고 있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분이 구체적으로 누구이고, 왜 내 병을 고쳐 주셨는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더 알고, 더 믿고, 더 확실히 알고자 찾고 찾는 믿음의 자세가 있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보다 말씀 받는 자세가 더 좋았습니다(행 17:11~12).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그들은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찾고 찾아 말씀을 상고하며 자기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랬을 때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적지 않게 믿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 보지 못하는 자는 보고, 보는 자는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다(요 9:39~41)
예수님은 그에게 영의 눈을 뜨게 하신 후,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영적인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 39)
예수님은 눈 뜬 사람을 눈감게 하시고, 맹인은 눈뜨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하여 다 안다고 하지만 보지 못하는 눈 뜬 맹인이 있습니다. 한편 겸손하여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는 이가 있습니다. 다 안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은 부지 중에 자기 자신의 무식을 폭로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모른다고 하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맹인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인 것을 알기에 길을 가다가 누구하고 부딪힐 것만 같아서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필요 없는 등불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 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서 들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등불을 들고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맹인이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 맹인이 소리치자 상대방이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어두워서 보지 못했습니다.” 맹인이 대답합니다. “내 등불도 안 보인다는 말이오?” 그는 맹인에게 “등불이 꺼져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서야 맹인은 자신이 불 꺼진 등을 들고 다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등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들고 다닐 뿐만 아니라, 자기는 못 보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훈계하고 볼 수 있게 하겠다고 꺼진 등불을 들고 다니는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에 대한 풍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불이 꺼진 등을 들고 다니는 맹인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바리새인들이 맹인이었으면 이 사람처럼 겸손하게 “주여! 볼 수가 없습니다. 보게 해 주소서”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여 조금 보는 것으로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고, 믿고 따라야 세상의 빛 예수님을 보지 못했고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전통에 매여 육의 눈은 떠 있으나 영의 눈이 감긴 영적인 맹인이었습니다.
우리는 혹시 바리새인들처럼 눈 뜬 맹인은 아닌지요? 우리는 한 가지 경험한 믿음으로 믿음이 점차 성장하여 영의 눈이 뜨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밝히 고백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