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9~42
내가 영생을 주노니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제주도의 서귀포(西歸浦)란 지명의 내력을 아십니까?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제가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장생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하도록 서복(徐福)이란 신하를 제주도로 보냈습니다. 서복이 불로초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데서 유래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늙지 않고 불로장생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불로장생 정도가 아니라 영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넣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나를 예수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예수님의 착한 양이 되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목자의 탈을 쓴 사이비 거짓 교사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서 영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1. 사건 속에서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한다(요 10:19~21)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불만이 생긴 사람들은 점점 더 반항심이 생겨 아예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미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푸신 증거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설명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도,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미쳤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박사가 상대성 원리를 깨닫고 난 후, 세계에서 저명한 물리학자 11명을 초청하여 두 시간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그때도 같은 계통의 학자들조차 두 사람만 알아듣고 나머지는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같은 분야의 전공자들도 이해하기가 힘든데, 하물며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믿게 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진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19세기 프랑스 실증주의자 오귀스트 꽁트(Auguste Comte)는 “내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실증할 수 없다.”라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후에 그의 제자들은 “실증되지 않는 것은 실증되지 않는 것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수정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실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보지 못했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요 10:21)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근거로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이 합리적일수록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역사적인 사건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단순히 보지 못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뜻이 있습니다.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을 뜬 후, 바리새인들의 심문에 “그분이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라는 증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눈을 뜬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미국 텍사스에 기온이 평균 영상 10도인데, 2020년 겨울에 영하 18°C 이하로 내려가고, 시애틀의 평균 온도가 3°C~26°C인데, 2021년 6월에 40°C 이상 오르고, 유럽의 최악의 홍수 소식을 보고 듣습니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망자의 소식을 매일 듣습니다.
우리는 첨단 과학 문명과 생명공학과 AI가 인간이 하는 일을 대신하는 21세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코로나19가 발병한 지 1년 반이 지난 오늘 코로나19를 완전히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자연 재앙을 지구 온난화의 결과로 여깁니다. 백신만 맞으면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련의 사건들을 예사롭게 보지 말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대로 종말이 가까울수록 하나님께서 자연재해와 염병으로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2. 듣고 따라야 한다(요 10:22~27).
때는 수전절입니다. 수전절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는 명절입니다. 수전절은 B.C. 164년경에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8만여 명의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제사 지내던 번제단에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로 제사 지냈습니다.
그리고 율법서를 발견되는 대로 다 불살랐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떠나면서 “진리는 모두 땅에 떨어졌다.”라는 글을 남긴 패악 무도한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아들이 태어나서 할례를 준 사실이 발각되면 즉시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유대는 5, 6년 동안 수리아의 학정 아래에 신음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카비우스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총궐기하고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그 전쟁에서 유대가 승리했습니다. 유대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양력 11월에 25일부터 8일간 축제하였습니다(요 10:22). 이 절기가 수전절이고, 일명 ‘빛의 절기’, ‘등화제’(Lights)라고 불립니다. 이는 가정마다 가지가 여덟 개의 등대에 하루에 한 등씩 불을 밝히다가 8일째는 등대 모두에게 불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등에 불을 밝히는 것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와 성전을 깨끗이 했다는 정결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수전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의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하소서”(요 10:24)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요 10:25)
예수님은 그들에게 증거를 보여주고 여러 말씀을 들려주어도 듣지 않고 믿지 아니하면서 무엇을 또 보여달라고 하느냐며 반문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시고 여러 말씀을 들려주어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6~27)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목자로 여긴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를 것입니다. 양의 특징은 천부적으로 목자의 음성,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귀가 있다고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맹(文盲)이 글을 못 보고, 색맹(色盲)이 빛깔을 분간하지 못하듯, 이맹(耳盲)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공자는 나이 60이 되어야 이순(耳順)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경청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청득도(耳聽得道), 들을 귀가 있어야 도(말씀, 로고스)를 깨닫게 되고, 이청득심(耳聽得心), 들을 귀가 있어야 사람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목자는 누구입니까? 그들의 목자는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전해오는 장로들의 유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장로들의 유전은 양들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과 내려오는 유전은 양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목자라고 따르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형체가 있으나 촉각이 없는, 사람이 만든 신상을 목자라고 따릅니다.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말하는 점쟁이들을 목자라고 좇습니다. 한국에 점치고 사주 관상과 무당에 종사하는 사람이 30만 명, 무속인이 15만 명인데, 20, 30대의 10명 중 9명이 점집을 찾는다고 합니다. 또 사람들은 이단과 사이비 눈에 보이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목자라고 따릅니다.
이런 것을 좇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속히 회개하여 신분과 소속을 바꿔 예수님의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배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배우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공식이고 원리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 사랑이 생긴 다음에 사랑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저절로 생깁니까? 사랑이 생긴 다음에 사랑하다가는 일생동안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수고를 해야 사랑이 생깁니다.
또 완전히 믿은 후에 전도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사람에게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전도부터 하면 믿음의 확신이 생깁니다. 구제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면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얻게 됩니다. 요한일서에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안 보인다, 믿어지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고 계속 질문했고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런 자세로는 죽을 때까지 질문하고, 100번 1000번 보여줘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고자 찾고 구하고 두드릴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
3. 내가 영생을 주노니(요 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요 10:30).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날씨처럼 맑았다, 흐렸다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약속은 구름 위의 태양과 같아서 절대로 날씨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 곧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이란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나지도 않으셨고, 병들지도 않으셨고, 늙지도 않으셨고, 죽지도 않으시는 영존하시는(everlasting) 분이십니다.
성경은 육의 생명을 영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을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주시는 생명이 영원한 영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동시에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영원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있는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셋째는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영생은 우리의 마지막을 비극과 환희로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요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경고하셨습니다.
A.D. 8세기경에 유럽을 기독교 국가로 만든 황제가 칼 대제(Karl Magnus, 742~814)입니다. 영문 이름은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입니다. 이 황제의 묘지를 200여 년 전에 발굴했는데,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황제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의 조형물은 황제의 의복을 입고 손에는 황제의 홀을 쥐고 앉아 있었습니다. 무릎 위에 성경을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성경 구절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가복음 8장 36절인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이었습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한 황제요, 영화를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칼 대제의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 모든 영광을 누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잠깐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할지라도 지나간 영화보다 세상을 다 살고 나서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누구든지 영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가 부자인 것을 아시고,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너는 나를 좇으라. 그러면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청년은 고민하다가 영생보다 재물을 택하여 슬픔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마 19:16~30).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가격표를 붙일 수 없습니다. 만약 가격표를 붙이고 우리에게 영생을 사라고 한다면 우리 중에 영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영생은 너무 귀하여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이를 아신 주님께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라고 하셨습니다.
‘오라’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 보면 네 번이 나옵니다. ‘오라, 물로 나아오라.’,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오라, 와서 포도주를 사라.’, ‘오라, 와서 젖을 사라.’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6~37)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주십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맡기는 결단입니다. 열차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열차 한 대가 있습니다. 이 열차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구원의 열차입니다. 이 구원의 열차를 탈 것이냐, 말 것이냐는 본인의 선택입니다. 타고 안 타는 것은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이 열차가 천국으로 가는 구원의 열차라는 것을 믿고 승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보증 수표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생을 얻은 자녀들은 빼앗기지 않도록 강한 손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양들을 보호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소유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