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28~57
나사로야 나오라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요 11:43)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두려움과 끊임없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코로나19로 매일 시시각각으로 코로나19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각종 매스컴에서 현장 중계 방송하듯이 보여주니 더욱더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어느 때보다 우리 의식 속에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눌려 있습니다. 죽음은 숨을 거두는 사람뿐만 아니라 유족들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감과 분노를 안겨줍니다. 첫 사람 아담 범죄 이후에 죽음은 사람들에게 폭군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젊은 나이에 죽자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픈 눈물로 여러 날을 보냈고, 그들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슬픔과 좌절과 상실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들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죽은 나사로의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을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들이 무덤 입구에 있던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외쳤습니다. 이때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우리가 불신과 두려움과 원망과 의심과 분노와 슬픔의 돌을 옮겨 놓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 죽음의 갇힘에서 걸어 나와 우리의 삶에서 생명과 부활을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28~35)
마르다가 신앙고백을 한 후(요 11:27),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알렸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마을 어귀에 계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발아래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32)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유대인들도 따라 울었습니다. 당시 사람이 죽으면 전문적으로 우는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비통히 여기셨다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요 11:33, 38). ‘비통히 여기셨다’(ἐμβριμάομαι)는 헬라어로 분한 마음과 슬픈 마음이 합쳐진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비통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을까요? 요한복음 11장 33절에서 비통히 여기신 것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집에 와서 형식과 의례적으로 울며 위로하는 위선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8절에서 비통히 여기신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중에 어떤 이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고 빈정댔습니다(요 11:37). 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그가 나사로를 죽게 해놓고 늦게 와서 조문이나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예수님 탓으로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형식과 위선, 불신과 의심, 남을 탓하는 것을 비통히 여기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비통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신 것은 인간을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두렵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죽음의 실체를 보고 비통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요 11:35)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죽음을 슬퍼하며 자기 연민에 젖어 우는 감상적인 눈물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값싼 눈물이 아니라 고귀한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리셨다’(εδακρυσεν)는 것은 헬라어로 ‘눈물을 와락 쏟았다’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사람들에게 슬픔과 절망이 컸던 만큼 주님도 눈물 없이는 그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평생 세 번 우셨습니다. 한 번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보고 우셨습니다(눅 19:41). 두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통곡하며 우셨습니다(히 5:17). 세 번째는 본문에서 죽음의 권세에 굴복당하여 우는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신 데서 나온 사랑과 동정의 눈물, 위로의 눈물이었습니다.
남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다리 하나가 부러진 사람에게 두 개 다 부러지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위로할 수 있을까요? 100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부모님 상을 맞은 유족들에게 그만큼 사셨으니 다행이라고 위로할 수 있을까요?
최상의 위로는 상대방의 아픈 마음과 공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정이 격해 있을 때,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논리와 이론과 교훈과 설득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이 일주일 동안 침묵으로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친구들이 입을 열어 “잘 생각해 봐, 무슨 죄가 있었는가?” 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이론을 가지고 위로하려고 했을 때, 욥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론과 교훈과 충고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공감하시기 위해 사람들의 고통과 질병을 아시고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과 아픔과 두려움과 분노에 공감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들이 울 때 함께 우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롬 12:5). 참된 위로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참된 위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물 속에 “나는 부활이야! 나는 생명이야!” 하고 외치고 계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며, 아직 죽지 않고 있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세력, 영향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오직 부활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잡은 마귀를 정복하고 그 죽음의 사슬에 묶여서 평생을 사망에 종노릇하는 우리를 놓아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더는 죽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요한은 일곱 가지의 이적을 뽑아 기록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장엄하면서도 감동적인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이적은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36가지 이적 중에 유대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예수님을 처형하고자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와 고통이 가져다주는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2. 내 말이 네가 믿으면(요 11:36~44)
예수님은 무덤을 향해 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돌을 쪼아 만든 굴속에 시체를 넣고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는 방법과 돌이 없으면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무덤을 만들어 시체를 넣고 돌문을 잠그는 방법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은 돌을 쪼아 굴속에 시체를 넣고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은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도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요 11:39)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대답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라고 거절했습니다. 마르다의 이 말 속에는 “주님, 여기까지 오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어차피 죽었는데 돌을 옮겨 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말이 숨겨있습니다.
마르다는 오빠가 살아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죽은 오빠가 살아난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는 것은 하나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상식을 초월합니다. 마리아는 기존의 생각과 상식을 깨고 돌을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요 11:40)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상식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인 믿음이 깨끗하고 온전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실 때, 상식을 버리고 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돌을 옮기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돌을 옮기면 됩니다. 어떤 사이비처럼 큰 믿음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저 ‘아멘’하고 순종하는 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맹인이 상식을 깨고 순종하여 지팡이를 짚고 2㎞나 되는 길을 걸어 실로암에서 눈을 씻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자 눈이 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실 때, 내 생각과 상식에 옮길 필요가 없을지라도, 옮겨야 할 이유를 모를지라도 순종하여 일단 옮겨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들은 상식을 깨고 믿음으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을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1~42)
첫째,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적의 뒤에는 감사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실 때도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감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큰 사건을 앞두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은 사람이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정말 5000명을 먹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합니다. 그러다가 불신이 생겨서 되긴 뭐가 돼 포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하셨습니다. 감사 기도에 이적이 나타납니다.
둘째, 기적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의 이적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함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부활 신앙을 갖도록 함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기 이전에 지금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이 선포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기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문 시대를 열어주시도록 기도하다가도 과연 될까? 부정적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도록 감사하여 기도할 때 주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감사 기도를 마치고 큰 소리로 죽은 나사로에게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아오라!’ 하셨는데, 만일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저런 말씀을 하시는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일 살아나지 않으면? 만일 낫지 않으면? 만일 눈이 뜨이지 않으면?
그러나 예수님께는 ‘만일’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실 때마다 되었더라는 창조주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창 1:3). 예수님은 죽은 자를 향하여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무덤 안에는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습니다. 주님은 즉시 수의를 풀어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유까지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이외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요 5:25).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초상난 나사로의 집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절망하고 분노합니다. 의심하고 불신하고 서로 원망합니다. 두려워 떱니다. 세상은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듯이 온갖 악취가 납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오셔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셔서 부활이요 생명임을 보이시고, 며칠 후에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 끝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의 믿음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갖는 데 방해가 되는 무거운 돌을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적에는 하나님이 하실 영역(God’s part)과 내가 해야 할 영역(our part)이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영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고 있는 돌이 무엇이 있을까요? 주님의 이적을 가로막은 무거운 돌이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돌이 무엇이 있을까요? 불신과 두려움과 원망과 의심과 분노의 돌입니까? 세속을 사랑하고 각양 각종 탐심의 돌입니까? 상식의 돌입니까?
요즘 혹시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을까 불안하지는 않습니까? 두려움과 불신의 돌을 옮기십시오. 돌을 옮겨 놓고 부활이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 두려움과 불신과 염려가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사망을 영원히 완전히 파하셨습니다(딤후 1:10).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요, 예수님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는 불신의 돌을 옮겨야 합니다. 믿음으로 돌을 옮길 때, 주님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