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12:1~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요한복음 12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본문에는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는 장면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두 사건이 나옵니다.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함께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왕이시고,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요 12:1~11)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날로,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입니다. 이날에는 점 없고 흠 없는 1년 된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유월절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날입니다.
이 유월절을 엿새 앞두고 예수님은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남쪽 3.2㎞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가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나사로의 가정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잔치는 무엇인가를 받기 위한 잔치가 아니라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준비한 잔치였습니다. 잔치는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요즘 입만 웃는 플라스틱 스마일이 유행입니다. 이런 웃음은 다른 사람에게 오히려 혐오감을 줍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 진정한 웃음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방법이 좀 서툴러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더 큰 역사, 더 큰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그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주빈으로 모시고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평소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를 시작하실 즈음에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들고 나타나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을 보면 옥합을 깨어 부었다고 했습니다. 나드 한 근은 당시 근로자 1년 품삯에 해당하는 큰돈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손님이 오면 올리브 기름 몇 방울을 머리에 떨어뜨리고, 귀한 손님일 경우에는 비싼 향유 한 두 방울을 떨어뜨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옥합을 아예 깨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모두 부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여자들에게 옷과 향유는 결혼 준비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향유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딸에게 물려 주었던 것인지, 아니면 마리아가 결혼 준비를 위해 먹고 싶은 음식, 입고 싶은 옷 하나 사 입지 않고 한 푼 두 푼 모아 한 방울 두 방울 모은 향유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마리아는 향유가 담긴 옥합을 자기만이 아는 곳에 놓고 가끔 꺼내어 보며 기뻐하곤 했을 것입니다. 특히 부모를 일찍 여읜 마리아에게 옥합은 다른 여자와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붓고 여자들에게 영광의 상징인 긴 머리카락으로(고전 11:15)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당시에는 손님이 오면 주인이 발을 씻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긴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이것은 손님에 대한 최고의 존경과 사랑,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만일 향유만 붓고 머리로 발을 씻어드리지 않았다면 이는 대단한 사건이 아닐지 모릅니다. 향유는 돈으로 살 수 있고, 또 돈 많은 사람은 얼마든지 향유를 사서 예수님의 발에 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머리로 발을 씻었다는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희생과 마음의 중심을 드린 것입니다.
사랑에는 몇 가지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보다 상대방을 높여야 합니다. 둘째는 희생입니다. 셋째는 자기 소멸입니다. 자기가 살아나면 이는 사랑이 아닙니다.
지난주 다윗 집사가 음악가를 키우려니 삶의 질이 좀 떨어진다고 해서 윤석호 목자와 함께 웃었습니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바로 자기 소멸입니다. 자기 소멸은 온유를 사랑한다는 결과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것, 자기가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며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과 어떤 댓가를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님은 어릴 적엔 디딤돌, 나이 들면 걸림돌, 더 늙으면 고인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조건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진심과 사랑을 예수님께 쏟아부었습니다. 이로써 향유의 향기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이 향기는 예수님에게뿐만 아니라,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의 향기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사랑의 향기를 줍니다. 사랑의 향기, 희생의 향기, 선행의 향기는 모든 이에게 기쁨과 감흥을 줍니다. 참된 사랑은 누가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좋은 직장을 주십시오! 좋은 성적을 주십시오! 좋은 차와 좋은 집을 주십시오!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물론 이런 기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생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바램 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마리아가 예수님을 이토록 사랑하게 했을까요? 마리아는 죄 많은 여자였습니다(눅 7:37). 마리아는 과거에 일곱 귀신 들렸었습니다(눅 8:2; 막 16:9). 마리아는 절망, 허무, 운명, 미움, 교만, 물질, 정욕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마리아가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죄사함의 은혜가 너무 컸기에 옥합을 깨어 드리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사함이 많은 자는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지만 죄사함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7:47). 누구든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죄사함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니 예수님께 가장 값지고 고귀한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이 거금의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향유를 허비했다고 책망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 12:5)
유다는 이 여자를 책망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런 행동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섬김받고 계신 예수님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또 그는 가난한 사람을 크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빙자해 자기 주머니를 챙겼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요한은 ‘저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다’라고 주를 달고 있습니다.
그는 궤를 맡으면서 돈맛을 알게 되고 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그는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진심과 감사를 돈으로 계산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다가 결국 스승을 배반하는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6:10).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낭비로 보았습니다. 사실 사랑은 낭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면 시간과 물질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사랑을 시간과 돈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까? 어머니가 자녀들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단순히 H₂O라고 폄하할 수 있습니까? 자녀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여 섬기는 것을 낭비라고 계량화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산술이나 수량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가룟 유다를 물리치고 마리아의 진심과 사랑을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예수님은 마리아의 오늘 행하는 선행을 십자가의 죽음심을 예비한 것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종말의 사건 앞에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항상’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은 항상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며칠 후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면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행도 중요하지만, 복음이 우선이고, 하나님 구속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구속 역사는 때가 지나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려고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타고 있는 차는 소형인가, 중형인가, 집을 방문해서도 몇 평, 얼마짜리 집에서 살고, 무슨 가구를 들여놓았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깊은 속내를 보십니다.
마리아 편에서 보면 마리아의 행동이 영웅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진심을 드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이후의 장례와 연결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역사에 길이 빛날 기념비로 승화시켰습니다(막 14:9). 이로써 마리아는 기념비적인 삶의 표상이 되었고, 가룟 유다는 저주받은 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가룟 유다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사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시간과 물질과 청춘과 진심을 모두 다 기억하고 역사화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랑과 모든 진심과 희생을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다 받으셔서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를 결코 헛되이 여기지 않으십니다(고전 15:58). 아멘.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이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고자 함입니다. 나사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시기심이 생겨 예수님과 나사로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탈을 쓰고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 왕 되신 예수님(요 12:12~19)
예수님은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무리의 환영을 받으시며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아로서의 선포요,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하시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며칠 후가 되면 우리의 죄를 위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베다니 잔치를 마친 후, 이튿날이었습니다.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갔습니다.
보통 왕은 백마를 타고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보고 “나귀 새끼를 탄 저 나사렛 예수를 보라!”라고 비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목소리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
‘호산나’란 ‘우리를 구원하소서’(save us now)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약속된 메시아 곧,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여 다스려 줄 참된 왕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억압과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제보다 죄와 죽음이 주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호산나, save us now!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만왕의 왕, 메시아로 입성하셨습니다.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겸손하신 왕입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 12:15)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바빌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때 외적인 성전 재건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스가랴 선지자는 건물로서의 성전 재건보다 성전이신 메시아와 강림하실 메시아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대로 오신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겸손하신 왕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순결하신 왕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타지 않으신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순결과 정결의 표상입니다.
요즈음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은 거짓, 탈법, 탈세, 부정으로 누더기가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의 생명은 정절과 순결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이 없으시고 흠결이 없으신 왕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평화와 공의의 왕입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사 9:6). 세상 왕은 무력으로 통치합니다. 세상 지도자는 자기중심으로 자기 야망으로 다스립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말은 모두 멋있고 그럴듯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에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본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어쨌든 얼마나 멋진 구호입니까? 그런데 요즘 ‘기회는 부모 찬스, 과정은 깜깜, 결과는 은닉’이란 말로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인하대학 대학 기본역량평가 탈락의 소식을 들으며 기회는 눈치, 과정은 독불, 결과는 깜깜이라고 여겨집니다.
옛말에 공무원이 되어 안 해쳐 먹으면 시절, 해쳐 먹다가 들기면 바보, 해쳐 먹고 들키지 않으면 귀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의와 평화로 다스리므로 평화와 공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불안하고 두렵고 염려와 근심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에 죄와 죽음과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셔서 다스리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잘 깨닫지 못했으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영의 눈이 뜨여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요 12:16).
예수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사랑과 경배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하여 평안을 주시는 만왕의 왕입니다. 겸손과 순결과 공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때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