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14:1~6
또 나를 믿으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작품 중에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로 쓴 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미카엘 천사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죄로 지상으로 내쫓깁니다. 그는 거지가 되어 추운 겨울 시골 작은 교회에서 엎드려 기도하다가 가난하게 사는 구두를 깁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구두를 깁는 그는 오갈 데가 없는 미카엘 천사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구두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서 직공이 되게 합니다. 어느 날 신사 한 사람이 찾아와서 구두를 맡깁니다. 그 신사가 하는 말이 “내가 타국에 갈 일이 있는 데 일 년 동안 신을 구두입니다. 튼튼하게 최상으로 좋은 구두를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돈을 주고 갑니다. 천사 미카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바로 앞에 죽음의 천사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사는 곧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미카엘 천사는 신사가 금방 죽을 것도 모르고 일 년 동안 신을 구두를 맡기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은 자기 죽을 날을 모르고 1년 신을 구두를 주문하는구나!” 한탄합니다.
근심 걱정은 모두 내일,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내일, 미래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설령 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식자우환이란 말이 있듯이 아는 사람이 근심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근심과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 말씀하시고,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근심하지 않으려면 ‘믿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근심 걱정이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걱정이 변하여 주님을 앙망하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을 믿으라(요 14:1~4)
첫째,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예고하셨습니다. 그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배웠지만, 십자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해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래 문제로 근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 세상의 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되실 줄로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그들의 꿈은 더욱 부풀어만 갔습니다. 그들의 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이 꿈을 바라며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역경과 환난과 박해를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론가 가신다니!’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근심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갑자기 장래가 불안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 앞으로 가정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근심 걱정은 security, 장래 문제였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고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입시를 앞둔 학부모들은 입시 문제, 자녀를 둔 부모는 양육과 교육문제, 인간관계 문제, 대학생들은 졸업 후의 진로 문제, 2030 세대들은 결혼 문제, 주택 문제, 은퇴를 앞둔 사람들은 노후문제, 코로나와 백신 후유증 문제 등으로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어떤 분은 막연하게 근심하는 분도 있고, 문제를 만들어서 근심하기도 합니다. 부모들은 뭐니해도 자녀 문제로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부모는 장성한 자녀를 두고도 염려 걱정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운전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의 자리도 바뀌어 갔다. 내 나이 5살 아버지는 운전석에 나는 뒷좌석. 내 나이 16살에 아버지는 운전석에 나는 조수석, 내 나이 28살에 나는 운전석에 아버지는 조수석, 내 나이 37살에 나는 운전석에 아버지는 뒷좌석, 내 나이 45살에 나는 운전석에 아버지는.....,나는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운전하고 있었다. 어느 자리에 앉듯 늘 자식 걱정이 먼저였던 아버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자동차 좌석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불안과 근심과 걱정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모든 사람을 괴롭히는 문제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곧 두려워서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가인이 죄를 지었을 때 불안과 두려움으로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근심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또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이 성취되면 근심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근심하게 됩니다. 권력을 쥐게 되면 권력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하게 됩니다. top이란 자리는 언제나 초조하게 합니다. 소원이 성취되기 전에는 성취하지 못해서, 성취되면 성취되어서 근심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근심의 종류를 바꿔가면서 근심하게 됩니다. 근심을 사서 합니다. 그래서 걱정을 사서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근심을 제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믿음’(trust)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맡기는 뜻입니다. 맡기되 100%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되 예수님을 통하여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근심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지금 제자들에게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님 손에 돈도 없고 아무런 세상 권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몇 시간 후면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에서 죄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한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능력을 생각하면 벼락이 떨어지고 불이 떨어지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1950년대 전도관의 박태선씨는 ‘불 받아라!’ 외치면 사람들이 아이 뜨거워하며 데굴데굴굴 굴렀다고 합니다. 그런 능력을 행했던 박태선씨가 어디 갔습니까? 전도관이 다 어디 갔습니까?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진과 불 가운데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왕상 19:11~12). 십자가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능력의 역사입니다. 십자가는 한 생명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합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영광과 승리입니다. 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부활, 부활하면 근심이 아니라 환희의 찬송을 해야 합니다. 부활의 춤을 덩실덩실 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을 믿게 되면 우리의 장래를 맡길 수 있고, 결혼도 맡길 수 있고, 자녀도 맡길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삶을 맡길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100%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둘째, 신실한 약속을 믿어라(요 14:2~4)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요 14:2상)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34번, 누가복음에는 30번, 마가복음에는 16번, 요한복음에서는 2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도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40일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요, 예수님의 메시지 핵심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범죄하여 잃어버린 본향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주택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은 좁은 집에서 오밀조밀하게 대여섯 명이 모여 살지 않습니다. 그곳은 공해도 없고 질병도 없고 분쟁도 없습니다. 상함도 없고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습니다(사 11:9). 그곳에는 언제나 얼마든지 생명수를 마시고 생명의 과일을 먹을 수 있습니다(계 22장). 그곳은 생명과 평화와 자유와 희락과 빛과 사랑이 충만한 낙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취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 22:5)
그곳은 우리가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바라야 할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나라의 문을 여시고 제자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여 그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요 14:3)
반면에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은 욕망과 쾌락과 물질이 지배합니다. 이곳은 우리가 누릴 터전이 아닙니다. 이곳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했다 할지라도 육신이 죽는 순간에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영광을 누리며 영원히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을 일컬어 “이는 그가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10)라고 했습니다. 또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5~16상)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고 영원합니다(벧전 1:3~4).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천국 시민입니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1931년, 8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평생 천 가지 이상을 발명한 발명왕입니다. 그런 그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떻게 왕성하게 일하실 수 있습니까?” 에디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듭니다. 나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
현재만 있는 사람은 오늘 먹고 마시며 즐기며 오늘을 위해 삽니다. 그런 사람에게 오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은 현재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삽니다, 그러니 오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나만을 위해 살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겠습니까?
2. 내가 곧 길이요(요 14:5~6)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시자 도마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도마는 하나님께 가는 길을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도마는 하나님 나라가 막연하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질문은 도마의 질문뿐만 아니라 갈 길을 알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든 사람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사람들은 진리는 하나지만 길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요, 그곳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길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통로로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합니다. 길을 모르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갈 수 없습니다. 길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는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길을 알아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I am the way). 예수님은 현재 유일한 길입니다. 공자는 朝聞道夕死可矣(아침에 길을 알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습니다. 석가는 生老病死의 인생길에서 고뇌했습니다. 이분들은 길을 찾고자 애쓴 구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찾던 현재 그 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여로’(人生如路), 나그네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은 한 번 가면 두 번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한때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길인 줄로 알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72년 만에 그 길이 진리의 길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북한은 주체사상이 길인 줄로 알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길인 줄 알고 따라가고 있으나 이것도 길이 아닙니다. 세상에 보이는 모든 사상과 이즘과 종교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참되고 영원한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의 길입니다. 악의 길은 굽은 길이요(잠 1:15~16, 10:9), 허무한 길입니다(욥 6:18). 어둠의 길이요, 죄의 길입니다(욥 24:13, 호 2:6). 황폐하게 되는 길, 사망의 길입니다(사 59:7, 잠 14:12). 그러나 의의 길은 진리의 길, 평탄한 길입니다(시 23:3, 25:10, 27:11). 부요한 길, 정직한 길입니다(시 65:11, 잠 2:13). 생명의 길, 평강의 길입니다(잠 2:19, 3:17). 그 길은 거룩한 길입니다(사 35:8).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의 참된 길♬(새찬송가 516장)
왜 예수님이 구원의 길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입니다(A new way and living way).(히 10:20).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제 생활에서도 생명의 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한된 인생을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분명하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 7:13~14) 좁은 길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길은 승리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길이 되실 뿐 아니라 현재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참되고 영원불변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고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벧전 2:25).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더는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만이 현재 복된 삶을 살 수 있고 영원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