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14:7~31
보혜사의 약속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6~17)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날 밤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시자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안심시키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가는 유일무이한 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약속과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과 기도, 사랑으로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혜사를 보내셔서 영원히 함께하시고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세계는 플랫폼 사회라는 완전히 새로운 판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플랫폼입니다. 교육도 플랫폼, 경제도 플랫폼, 심지어 교회도 플랫폼을 이야기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가보지 않은 자본주의로 들어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지난 100년간 인류가 경험한 변화는 지난 1만 년간 경험했던 변화의 폭을 능가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것과 비슷한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불안하고 근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외로운 고아로 살지 말고 보혜사 성령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1. 믿음과 기도, 사랑(요 14:7~15).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여러 가지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빌립에게 두 가지 점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 말씀으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요 14:10). 둘째는 예수님이 여러 능력으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요 14:11). 이사야 말씀에 메시아가 오셔서 눈먼 자, 걷지 못하는 자, 듣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시고 걷게 하시고 듣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 35:5~6, 61:1).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약속대로 능력을 행하셔서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자를 듣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눅 7:21~22).
첫째, 믿음의 역사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할 것이고, 예수님보다 큰일을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수 있고, 또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전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은 모두가 인간의 능력과 학벌과 재능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이란 질적 역사가 아니라 양적 역사입니다. 그 양적인 역사도 예수님을 믿는 데서 오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아무리 큰일을 한 사람도 씨앗의 종자 자체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종자가 좋지 않으면 열심히 가꾸어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씨가 질적이라면 가꾸는 사람은 양적입니다.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가꾸고 일한 사람이 게으른 사람보다 수확을 많이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우리는 보통 오순절에 베드로가 3,000명을 회개시킨 사건을 들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5,000명을 놓고 말씀을 전했지만 12명 이외에 모두 떠났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설교 한 번에 3,000명을 회개시켰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누구의 이름으로 3,000명을 회개시켰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3,000명을 회개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역사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주를 달고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부활 승천한 후에 큰일이 이루어지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온전히 믿는 믿음 위에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깊이 마음에 새겨 간직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의 역사(요 14:13~15)
예수님은 믿음의 능력을 말씀하시고 나서 기도의 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믿음과 기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나의 힘과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구할 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보고를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세를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내 권세로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로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지와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목적으로 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예수님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돈을 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물질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 기도가 응답이 됩니다.
셋째, 사랑의 역사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말씀하시고 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면 사랑의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지만, 사랑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미운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해야지 하면 더 미워집니다. 미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사랑의 채널이 연결되어 미운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사랑은 힘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좌익 활동을 하던 안재선 등에 죽임을 당합니다. 큰아들 동신이는 사범학교 재학생이었고, 동인이는 중학생이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한 명도 아닌 두 명이나 아들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런데 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아들로 입양합니다. 어떻게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는 손 목사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원자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보혜사 성령(요 14:16~31)
첫째,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와 사랑을 말씀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5~16)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란 헬라어로 ‘곁으로’란 파라(παρά)와 부른다는 크네토스(κλητος)의 합성어로 ‘곁으로 부른다’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란 한 인격자가 옆에 계셔서 위로하고 변호하고 해석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정교육에서 보혜사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아버지가 매를 듭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고 방을 나가면, 다음에 어머니가 들어와서 위로합니다. 네가 잘못했으니 맞았지만 때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너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가르치며, 사랑하기 때문에 때렸다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지금은 이 매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크면 다 이해하게 될 것이라며 여러 가지로 자녀를 위로합니다. 바로 보혜사의 역할이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고통스러워할 때,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징계를 하시는 거란다. 징계가 없으면 아버지가 없는 고아나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자를 더욱 징계하시는 거다. 지금 실패하는 것 같지만 실패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는 증거다. 저 십자가를 보아라!” 보혜사 성령은 십자가 안에서 징계를 해석해 주고 변호해 주고 위로해 줍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면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이시고, 승천하신 다음에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의미합니다.
보혜사는 예수님의 별칭입니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가 오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고 변호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행하게 하시고 예수님과 함께하도록 하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 고아가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고아로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고아’(orphan)란 원문에 아버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고아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아는 외롭습니다. 고아는 늘 불안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 때는 자기 자신이 고아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됩니다. 그러나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면 달라집니다. 다른 아이들은 서둘러 아빠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고아는 해지는 들녘을 바라보며 서성거립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외롭던 고아가 아버지를 찾은 것입니다. 중국의 임어당은 40년을 방황하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서 첫 마디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40년은 완전히 고아와 같은 생활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했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40년간 고아처럼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이교도에서 기독교도가 되기까지》의 명작을 썼습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자기가 고아인지 아닌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죽음을 앞두고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아버지가 계신 영원한 본향이 있는 사람은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죽음을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잠시 이별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 먼저 갈게, 있다 다시 만나” 인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돌아갈 본향이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 앞에 두렵고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돌아갈 본향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주님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혜사는 상담자(counselor)가 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보혜사는 위로자(conforter)가 되셔서 힘과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성령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진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은 영이시므로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볼 수 있습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보혜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십니다. 보혜사는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 위로와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보혜사는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내면에 거하십니다(요 14:19). 보혜사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합니다(요 14:20).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1). 그러자 가룟이 아닌 유다가 예수님께 세상의 구주로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소수 몇 사람에게만 나타내신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여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혜사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요 14:26). 보혜사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해 줍니다.
둘째, 평안을 주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보혜사가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상황에 따라 변하고 일시적입니다. 이는 마치, 그림자와 같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깊은 바다의 저류와 같아서 어떤 형편에도 요동하지 않고 변함이 없습니다.
이 평안은 마음에 묻힌 보배와 같아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평안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평안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샬롬’(שָׁלוֹם)은 단순한 정신적 평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샬롬은 종교, 물질, 윤리, 사회의 모든 평안을 종합하여 말합니다. 배고픈 것, 슬픈 것, 육체의 어떤 괴로움으로부터의 일체 평안을 뜻합니다.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평안한 것입니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화평, 내 양심과의 관계에서도 완전한 화평, 이웃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화목을 의미합니다. 경제와 나라 등 모든 관계에서 평안함을 뜻합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우성을 치며 각자 자기가 믿는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는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새찬송가 388장)라는 불렀습니다. 그때 선장은 “지금 죽을 지경이니 기도나 하시오. 당신의 하나님은 없소?” 하며 소리쳤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선장에게 “선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갈 것입니다. 천당을 가든 미국을 가든 둘 중 한 곳에는 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풍랑으로 바다에 빠지면 천당을 갈 것이고, 무사하면 미국에 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안, 샬롬입니다.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알지 못해서 불안합니다. 알면 평안합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늘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고 마지막 날에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면 죽음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요 14:28). 예수님께서 미리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고난받으실 때 제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고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요 14:29~31).
우리는 보혜사 성령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느냐? 그리스도로부터 왔느냐?입니다. 이 논쟁은 수백 년 동안 신학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왔습니다. 따라서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입니다.
지금 세계는 플랫폼 사회라는 완전히 새로운 판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누구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회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새로운 세기를 맞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코로나19는 BC와 AC로 나누던 2000년을 마감하고 코로나 전기 후기로 나눌 만큼 새로운 시대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보다 더 불안합니다. 사람들은 불안하여 어느 때보다도 더 눈에 보이는 것을 확실하게 붙잡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믿을 것은 돈이라고 생각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켜쥐려고 합니다. 심지어 가상화폐까지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믿을 것은 눈에 보이는 돈도 아닙니다. 권력도 아닙니다. 아파트도 아닙니다. 우리가 확실히 믿을 것은 보혜사 성령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 하나님의 영, 보혜사는 우리가 가야 할 길과 방향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바른길로 인도합니다. 보혜사를 의지할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고 영원히 돌아갈 본향으로 인도합니다. 보혜사는 우리와 늘 함께하여 위로해 주고 변호해 주고 절대 평안을 줍니다.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행하게 하고,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기도와 사랑, 그리고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도록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