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15:1~17
포도나무와 가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사람이 살면서 중요한 문제는 인간관계입니다.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성공의 85%가 인간관계이고 15%는 실력이라고 했고, 콜롬비아 대학 MBA 과정에서는 인간관계를 95%까지 봅니다. 관계 문제는 삶의 전반에 영향을 줍니다. 그만큼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역사로 볼 때 관계 문제는 창세기 3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어기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갔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자 아담과 하와, 부부간에도 금이 가서 서로 불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포도나무와 가지를 비유로 관계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의 대부분이 목자였고, 포도와 밀 농사를 지었습니다. 밀로 빵을 만들어 그들의 주식이 되었습니다. 고기는 주로 양고기를 먹으며 여기에 곁들이는 음료가 포도주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식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를 비유로 설명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할 관계임을 말씀하셨고, 제자와 제자들과의 관계는 서로 사랑해야 할 관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예수님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 안에 거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고, 제자들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내 안에 거하라(요 15:1~8)- 예수님과의 관계
우리가 아는 대로 나무의 원줄기에 가지가 붙어있고, 가지에 잎이 붙어있습니다. 잎은 가지에 붙어서 광합성 작용으로 생명을 줄기로 전달하고, 줄기는 뿌리에서 진액을 받아 가지로, 가지에서 잎으로 전달하여 서로 의존하며 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지보다 줄기가 먼저입니다. 줄기와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가지는 몇 개 끊어져도 줄기는 삽니다. 반면에 줄기에서 끊어진 가지는 말라버립니다. 가지가 살아 있으려면 원줄기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줄기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1, 5전)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농부요,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제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예레미야 2장 21절의 말씀을 두고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냐”(렘 2:21)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참 포도나무’는 잡종이 아니라 순전한 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좋은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순전하고 충실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처럼 농부와 포도나무와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그리고 농부 없이 포도나무가 있을 수 없고, 포도나무 없이 가지가 존재할 수 없고, 가지가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시자 예수님과의 관계가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근심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예수님과 제자들과는 떠날 수 없는 관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잠시 제자들의 곁을 떠나지만,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그들을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고 이미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2상).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원줄기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포도나무와 전혀 상관이 없는 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제해버린 대표적인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겉으로 보면 예수님과 늘 함께했기에 예수님의 제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랍비(선생)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기 욕망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예수님을 은 30에 파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형벌 중의 형벌인 지옥의 맨 밑에 배신자가 가는 곳으로, 영원히 차가운 얼음 속에 쳐박혀 신음하는 곳으로 묘사했습니다. 거기에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신자 가롯 유다와 유다의 양옆에 카이사르를 암살한 배신자 브루투스(Brutus)와 그를 도운 카시우스(Cassius)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늬만 신자이고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 신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께 제해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첫째, 나쁜 가지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 15:2후~3)
여기에서 ‘깨끗하게 한다’란 가지치기, 전정을 뜻합니다.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꽃도 아름답지 못하고, 벌레도 많이 끼어 관상용으로는 심지 않고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해 심습니다. 포도나무는 심은 후 보통 3년 후에 수확하며 가지는 4m 이상 자랍니다.
특히 포도나무의 특징은 작년에 열매를 많이 맺은 가지라 할지라도 그 가지에서는 열매가 맺히지 않고, 오직 1년 산 새 가지에서만 열매가 열립니다. 그래서 농부는 11~1월경에 두 개의 눈만 남기고 모두 가지치기합니다. 그리고 썩은 나무를 자르고 껍질을 벗겨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었다 할지라도 더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해 잔가지를 제거합니다. 잔가지를 정정하지 않으면 웃자라 양분만 흡수하여 실한 과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가룟 유다와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육의 몸을 가진 연약한 존재이므로 매일 발 씻음을 받아야 했고, 열매를 많이 맺도록 잔가지들을 가지치기하여 깨끗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세와 다윗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시기 위해 80년간 연단하여 잔가지를 가지치기하여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윗을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잔가지를 가지치기하여 온유와 사랑과 평화와 공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도록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은혜 속에 사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더 주십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감사할 일만 생기고, 원망하는 사람에게는 원망할 일만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 안에 거하여 더 감사하고 더 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깨끗함은 받은 사람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1~10절까지 ‘거한다’는 단어가 11번이나 나옵니다. ‘거한다’는 말은 계속(continue)하여 머문다(remain)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쫓아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가에 따라 냄새가 달라집니다. 사람이 돈과 탐욕을 쫓는 사람들에게서는 돈 냄새, 탐욕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티를 내려고 하지 않아도 그의 언행과 얼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직업은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반면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 향내가 납니다. 행동에서 예수님 향내가 묻어납니다. 말에서 예수님 향내가 풍깁니다. 그 삶에서 예수님의 아름다운 향기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 향내가 나는가, 말에서 행동과 삶에서 예수님 향내가 풍기는가, 얼굴의 표정에서 예수님 향내가 묻어납니까? 성령의 거울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여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다’란 성경 말씀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매사에 성경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떤 생각을 하셨고,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떻게 결정하셨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사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행하고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온전하게 행하도록 합니다(딤후 3:15~17).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하게 합니다. 말씀은 지혜롭게 하고 슬픈 자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시 19:7~8). 말씀은 하늘나라의 산 소망을 심어주고 어떤 역경 중에서도 헤쳐나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 그리고 운명을 극복하고 희망차게 살 수 있게 합니다. 말씀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 2:3). 그래서 다윗은 새벽을 깨워 말씀을 읽었습니다(시 119:123,147~148). 그랬을 때 그의 영혼은 시와 찬미와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셋째,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서 끊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부하냐, 가난하냐, 출세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연합된 삶이 무엇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지식은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배운 지식은 오히려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이 돈을 잘 버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가정과 나라까지 망칠 수 있습니다. 요즘 잘 나가던 정치인 아들이 보약인 줄 알고 50억 원을 퇴직금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독약이 되어 부자가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돈은 보약이 쥐약이 됩니다. 예수님이 없는 금목걸이는 개목걸이가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없이도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없는 삶은 모두가 헛되다는 고백,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므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은총의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된 것은 은혜로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선한 사람이 됩니다. 내가 잘나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이 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넷째, 기도해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예수님 안에 거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모두 응답하여 주십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파이프라인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발전소에서부터 여러 과정을 지나 우리 집으로 옵니다. 그 도중에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가 있으면 전기가 끊깁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부도체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통로를 매일 새롭게 연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심판도 하십니다. 심판의 기준은 열매입니다. 열매를 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무는 속일 수 있지만,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열매는 인간적인 능력과 열심, 그리고 요령이나 술수로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내적으로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외적으로는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2. 서로 사랑하라(요 15:9~17)-제자들 간의 관계
첫째, 제자들은 경쟁이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새사람이 되었고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은 원수가 아니라 옆에 있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은 멀고, 먼 사람하고 가깝다.” 먼 사람과는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친구는 이해관계가 있기에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가까이 있는 친구가 잘 나가고 연봉이 오르면 나는 반대 현상이 됩니다. 시소게임이 됩니다. 거기에다 부인들까지 등장합니다. 옆에 친구가 승진하고 호봉이 올라가면 부인은 당신은 뭐하느냐? 한마디 합니다. 일찍이 토마스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투쟁과 경쟁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 섬김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허물과 약점을 다 아시고도 제자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바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목숨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목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정신에다가 목숨까지 합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옆에 있는 친구를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늘 경쟁 관계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라고 했습니다.
한편 친구는 표정만 봐도 다 압니다. 그렇다면 친구라고 하면서 서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제자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친구라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했다고 할 때 제자들은 언제든지 스스로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부르심이 상황에 따라 변하게 되고 절대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가운데 부르심을 받아들일 때 그 부르심이 흔들릴 수 없고 후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택할 자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셔서 부르셨고, 먼저 나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풍성한 열매를 맺어 복된 삶을 살도록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인생의 근본 목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죄악된 가지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포도나무요 나는 그분의 가지로, 예수님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동역자를 사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