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1~5
영화롭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본문은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화를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도중에 성전에 가셔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제자들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예수님의 기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기도는 한량없는 예수님의 따뜻함과 온전한 마음을 기울인 기도이다. 너무나 순전하고 깊고 부유하고 넓어서 아무라도 그 밑을 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친구 멜랑톤은 “이 기도만큼 높고 거룩하게 들렸던 기도는 없다”고 했습니다. 존 낙스는 “나는 어려움이 생기고 마음에 갈등할 때마다 이 기도를 암송하며 위로와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마음에 깊이 담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요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때’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를 말합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생애에 가장 절박한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할 수 있지만 절망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하나님과 사람과 환경을 탓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과 멸시을 받으며 죽게 되는 십자가 앞에서도 하나님의 영화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결단과 부활을 뜻합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영화’(δὀξα)란 의견, 견해, 찬미, 명예, 무게, 영광(glory)이란 뜻입니다. ‘영화’는 쉽게 말하여 칭찬과 존경입니다. 누가 칭찬과 존경을 받습니까? 우리는 자기 유익과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섬김과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셀만(Robert Selman)의 사회인지 수준이 0수준인 사람을 칭찬하고 좋아할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0수준은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중심성입니다. 영화는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돕고 사랑하는 데서 옵니다. 역사상 이름을 남긴 사람을 보면 모두가 자기를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크리스천 실업가요, 명망 있는 은행가인 앙리 뒤낭(Jean Henri Dunant)은 예수님을 믿어도 항상 돈이 제일이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상에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치던 사람은 프랑스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였습니다. 이 은행가는 나폴레옹을 만나 협상을 통해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을 이끌어 내어 거대한 부의 주인공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파리로 갔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전쟁터로 방금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전쟁터로 갔다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군이 치열하게 전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투는 끝났고 나폴레옹도 전쟁터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온통 시체와 부상당하여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일이 끝나갈 무렵 그는 다시 나폴레옹을 만나러 갈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기도할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기도하던 중에 나폴레옹과의 협상으로 엄청난 부를 얻어 보려는 꿈 대신에 새로운 꿈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꿈은 전쟁 중에 아군, 적군을 막론하고 부상당한 모든 사람을 돌보고, 이 일을 통해 인류가 화해하는 평화의 꿈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모두 헌납하여 국제 적십자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적십자가 국제 사회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이는 그가 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00%의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영광은 반드시 순종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역시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께 100% 순종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고, 이를 위해 사셨고, 이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눅 11: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근본 목적입니다. 기독교 요리 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했습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는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먹든지 마시든지’에서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을 많이 작곡했던 오스트리아 요셉프 하이든이 심혈을 기울여 유명한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불행히도 몸이 아파서 그 곡을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지휘하도록 하고 자신은 2층 발코니(balcony)에 앉아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들은 지휘자에게 환호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는 2층의 하이든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이든은 박수를 중단시키고 이 모든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돌리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당신은 그 아름다운 곡을 어디에서 영감을 받는가’하고 물었을 때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을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감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곡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 앞에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땅의 복도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버리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지적하고, 십자가 얘기를 하면 예배가 싸늘해지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자기를 위한 삶에서 돌아켜 하나님을 영화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은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기심과 탐욕과 안일과 교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문에 들어서서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좁은(narrow) 정도가 아니라 비좁은 문(cramped gate)입니다.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교회를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이고 자기 몸을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앙드레 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는 《좁은 문》에서 알리사가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불신자인 그와 함께 들어갈 수 없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비좁은 문(cramped gate)을 통과하려면 죄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게를 줄여야 합니다. 무게를 줄인다는 것은 죄 짐을 십자가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과 탐욕과 원망과 불평과 교만을 십자가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한 삶의 무게를 줄이고, 주님을 위한 무게를 높여야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2. 영생(요 17:2~3)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셔야만 합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2~3)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삶을 사셨던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eternal life)이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삶, 일체 자유로운 삶, 죽음까지도 자유로운 삶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은 좋은 직장과 높은 연봉과 권세와 명예와 부유한 삶을 살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향해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부자요 관원인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최연소의 나이로 고시에 합격하여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계명을 암송했습니다. 그는 화천대유의 천박한 사람들과 달리 경건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흠이 없이 율법을 지킬 만큼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행복이 없었습니다. 삶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이 없으면 가진 것이 없어 행복하지 못하고, 가진 사람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행복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구했습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일시적으로 행복과 기쁨을 줄지 모르나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경건한 종교 생활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마니교를 따라 방황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후일 하나님께로 돌아와 “오직 당신 안에서만 우리의 영혼은 안식을 얻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 43장 11절은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필로 구원받아 영생에 이릅니다. 영생은 오래 사는 시간적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지구에 속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질적이며 하나님께 속한 시간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 시간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히브리어로 ‘야다’(יָדַע)는 동침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창 4:1).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마 1:25)라는 구절에서 동침은 성경에 안다(know)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둘이 한 몸이 되어 생명을 잉태하는 신비로움을 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안다’는 것은 듣거나 보아서가 아닙니다. 책이나 이성으로 아는 것도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전인격의 체험으로 생명이 잉태되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을 아는 순간에 내 속에서 신비롭게 예수 생명이 탄생합니다. 예수 생명은 아담 생명과 다른 하나님과 연합되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안다’는 현재 가정법으로 점점 더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떠하심을 점점 더 깊어질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랑의 깊이와 너비와 길이와 높이를 알아갈 때,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기쁨이 크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가 감사로 너무 벅찰 때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됩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픔과 질병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 교과서가 됩니다. 그러니 모든 삶이 자유롭습니다.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늘 묵상하고 알아서 영적인 생명이 깊어져야 합니다.
3.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요 17:4~5)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순종하여 온전히 구속역사를 완수하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요 17:4). 구속역사의 완성은 십자가에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를 남기셨습니다. 이를 가상 칠언이라고 하는데 가상 칠언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것처럼 막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을 100%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일터와 학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장소요 사명의 땅, 선교의 현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가 보냄을 받은 성직자요 선교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터와 학교에서 열심히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직자요, 우리의 일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명의 장소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본래 영화로우신 분이십니다(요 17:5). 예수님은 세세토록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감당하시느라고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감당하신 후 영화롭게 되셨습니다. 빛나고 높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고 하나님을 기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더 깊이 헤아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의 짐을 내려놓고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십자가 지는 것을 더 즐거워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존재 가치요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