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1~16

이 사람을 보라(Behold, the Man, Ecce Homo)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19:5)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말을 듣고 같은 상황을 목격하더라도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 듣고, 보고, 느끼고, 자기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입니다. 이런 심리를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머리에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총독 관정 발코니에 세우고 보라 이 사람이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 Ecce Homo!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화가가 Ecce Homo를 주제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중에 이탈리아의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ti)가 그린 Ecce Homo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똑같은 그림을 두 장을 그렸는데 하나는 독일의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훗날 많은 사람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정신병이 들어 바젤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Ecce Homo를 주제로 자서전을 썼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듣는 순간에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처럼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똑같이 보고도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왕관 대신 가시나무로 만든 가시관을 쓰시고, 그 가시에 찔려 얼굴에 피가 흐르는 모습에서 첫째는 우리 죄를 위해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신 예수님, 둘째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모진 고난 앞에서도 잠잠하신 예수님입니다. 나의 죄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묵묵히 고난의 잔을 마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1. 예수님을 조롱하는 빌라도(19:1~5)

첫째,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대제사장 가야바는 새벽에 예수님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총독 관정으로 끌고 가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한 명을 특별 사면해 주는 관례를 따라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보다 강도인 바라바를 석방해달라고 외쳤습니다(18:38~40). 이에 빌라도가 로마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도록 하였습니다(19:1)

로마 시대의 채찍은 여섯 개의 가죽끈으로 되어 있는데 끈 하나하나에 납덩이나 뼈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채찍질할 때는 옷을 벗기고 사람을 틀 위에 묶어 놓고 건장하고 억센 군인이 등에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그 채찍질이 너무 아프고 포악하여 이를 견디지 못하여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채찍질은 사람을 죽이는 시해 행위다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는 십자가형과 채찍질을 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로마인에게는 채찍 40, 유대인에게는 특별히 채찍 120대를 때리도록 했습니다.

로마 군인은 예수님에게 채찍으로 120대를 때렸습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예수님의 등을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등에는 깊은 상처가 패이고 피가 온 등을 적셔 흘러내렸습니다.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무지막스럽게 씌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얼굴에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그리고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며 손으로 때렸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고(27:30), 마가복음에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했다고 했습니다(15:19).

로마는 힘으로 전 세계를 평정했습니다. 그런데 힘없고 나약한 예수님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는가, 조롱하고 침 뱉고 멸시한 것입니다. 시편은 조롱받는 예수님을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6)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부자가 되어야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주님과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무엇이 되어야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 있고 무엇이 되어야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치 힘으로 세계를 제패한 로마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조롱과 침 뱉음과 멸시를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겸손이 교만을 이기고, 순종이 힘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약함과 겸손과 순종으로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총독 관저에서 예수님을 왕의 모습으로 분장시킨 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그러면 왕관을 써야지?”하면서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왕이라면 왕의 옷을 입어야지?”하면서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왕이라면 이것을 들어야지?”하면서 갈대를 손에 쥐어 주며, “, 이렇게 차리니 정말 왕 같은데? 유대인의 왕 만세!”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모욕하고 심문했지만 아무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총독 관저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나는 그를 아무리 심문해도 죄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너희에게 알리고자 밖으로 그를 끌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빌라도에게 끌려 나온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었고, 자색 옷이 입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눈을 감고 조용히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고, 예수님의 얼굴에는 선혈이 낭자하였고, 자색 옷이 입혀 있는 모습으로 모욕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을 한번 바라봅시다.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은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얼굴에 피가 흐르며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영국의 프란시스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독일 유학 중에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그림을 보는 순간에 크게 은혜를 받고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 찬송가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내 너를 위하여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새찬송가 311)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 또한 19세 때 뷔르츠부르크에서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그림 앞에 섰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그림을 보는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감동했습니다.

그는 그림 앞에서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라는 글씨가 보였고,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 글씨와 음성에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을 위해 어떤 것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주님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 고향 독일 드레스덴(Dresden)으로 돌아가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고 성경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백작으로서 일생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회(Moravian Brethren)를 만들어 경건주의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8세기 초 교회는 세계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안 형제회는 1732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0년 동안에 세계 14개국에 3,0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잠자던 선교를 깨웠습니다. 한국의 최초의 선교사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도 모라비안 형제회 출신입니다. 그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선 1832725일에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황해도와 충청남도 서산 보령을 중심으로 선교를 했고 최초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을 시도했고, 감자를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조지 뮐러(Georg Muller)를 회심시켜 영국으로 보낸 것도 모라비안 형제회였고, 요한 웨슬리(John Wesley)의 회심에 영향을 준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1729, 미국 선교를 위해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뜻밖에 평화롭게 찬양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웨슬리는 그들에게서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게 될 텐데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온 후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17385, 런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의 모라비안 교도 집회에서 웨슬리의 영혼이 거듭났고 감리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로 회심한 하버갈과 진젠도로프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이 씌워져 있고,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있고, 자색 옷이 입혀진 예수님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죄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시고 빌라도의 공관 발코니에 서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4~5)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으셨다. 예수님이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예수님이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예수님이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조롱받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은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자색 옷을 입으시고 갈대를 쥐고 계시지만, 이제 장차 우리는 조롱의 자색 옷 대신 빛나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 가시로 만든 관 대신에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계신 예수님, 갈대 지팡이 대신에 우주를 통치하실 홀을 들고 계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 침묵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호사를 앞세워 무죄를 주장하고, 자기 권리를 지키고자 변명합니다. 파렴치한 죄를 범한 사람일수록 살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변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면서도, 로마 군인들의 수치와 모욕을 받으시면서도,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말씀만 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진리는 변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온갖 수치과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침묵하셨습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놓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두 가지인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기도 제목, 하나님께 청구하는 청구서가 잘못되었다는 응답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기다리라는 응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여 당신이 언제까지 침묵하고 계십니까?”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하고 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하십니까? 왜 보고만 계십니까?”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침묵하고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고 있다고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용서입니다.

2.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준 빌라도(19:6~16)

빌라도는 고문으로 죽음 상태에 이르게 된 예수님을 보여줌으로 유대인들의 동정을 사서 석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그의 아랫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19:6)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과 인간애를 믿고 유대인들과 타협하고자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빌라도는 하는 수 없이 너희가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리의 법에 예수는 당연히 죽을 자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합니다. 발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는 다시 관정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에게 너는 어디로부터냐?”고 심문했습니다. 이 말은 정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무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을 해야 만이 대답이 아닙니다. 침묵은 무서운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빌라도를 심판하고 계셨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내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데 왜 자기에게 호소하지 않는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했으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아무 죄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약점을 물고 당신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 왕이 없습니다’(19:12,15)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며칠 전만 해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자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가이사에게 수없이 반역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그들이 가이사의 충신인 양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내면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면 군중심리에 이끌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흔들리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목적과 방향과 목표가 없이 떠돌게 됩니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께 사형을 내려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 빌라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진리를 알지만, 진리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고 유대인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꿈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과 현실의 유익을 잃지 않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는 판결을 마친 후에 손을 씻으며 모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렸습니다(27:24). 그럼에도 역사는 그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준엄하게 심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현실의 유익과 자신을 잃지 않고자 진리를 행치 않고 현실과 타협합니다. 예수님을 믿다가도 조금 핍박을 받거나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미련 없이 세상으로 가버립니다. 좀 고난이 따르고 희생이 따를 것 같으면 예수님과 교회를 등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버리고 현실의 유익을 좇아 사는 빌라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위해 희생하고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진리 편에 서서 진리를 행하는 자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현실의 유익을 좇을 때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용서와 기다림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쓰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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