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20:1~18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20:17)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일은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출생이요, 다른 하나는 죽음입니다. 출생이 이미 지나간 일이라면, 죽음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당면한 실존 문제, 현실 문제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죽음은 아담 이후로 절대 군주가 되어 온 인류를 지배해왔습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세계를 제패한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돌로 막고 인봉한 무덤을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지배해 왔던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생한 장면과 무덤을 찾아간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슬퍼하는 마리아가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슬픔은 어디에서 올까요? 심리학자들은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슬픔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슬픔은 죽음에서 오는 실체입니다.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던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더 나아가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요?

1. 무덤을 찾은 마리아(20:1)

사람들은 예수님을 장사지낸 후에 큰 돌을 굴려다가 무덤 문을 막았습니다. 혹시라도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숨겨 놓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릴까 하여 사전에 큰 돌로 무덤을 막고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총독의 인으로 봉해 놓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경비병을 세워서 무덤을 지키도록 했습니다(27:62~66; 15:46). 요즘 식으로 세콤을 설치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지혜를 모아 누구도 무덤에 묻힌 예수님을 찾아가지 못하도록 대비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 지내시고 묻히고 사흘 되던 날 안식일 첫날, 아침, 동녘 해가 뜨기 전, 이 아침은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어두움의 권세, 절망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부활의 아침이요, 진리가 승리한 새 역사가 시작되는 찬란한 영광의 아침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16:1).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 일곱 귀신들렸던 여자였습니다. 그런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성경에 기록된 아름다운 여자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옥합을 깨어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자들이 모두 떠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현장에서 지켜보았고, 장례 지낼 때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첫 새벽에 가장 먼저 무덤을 찾은 사람도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슬픈 일이지만, 다음날이 안식일이 시작되므로 예수님의 장례식을 변변치 않게 치른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슬퍼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향품을 들고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례를 지내고 죽은 분이 사랑하는 분이면 사흘 동안 계속 무덤을 찾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과거 한국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무덤 옆에 움막을 만들고 시묘했습니다. 저의 선친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새벽에 상복을 입고 매일 3를 걸어 3년 동안 조부모님의 산소를 찾아가셨습니다.

요즘은 장례를 치른 후, 3일 후에 묘지를 방문하는데, 이스라엘에서는 3일 동안 계속 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곧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머물러 있다가 시신이 썩어 얼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때 떠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흘 동안 시체 가까이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여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씀을 기억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을 찾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마리아는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죽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방법이나 목적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이에 못지않게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진실한 사랑을 보시고 부활하신 거룩한 몸으로 가장 먼저 만나주셨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벧전 4:8).

2. 빈 무덤을 찾는 제자들(20:2~10)

마리아는 드디어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누군가가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일어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 조깅을 해서 그런지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무덤 앞에 선 요한은 막상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만 보고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려오던 관성을 이용하여 그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들어가 보니 시체는 온데간데없고 세마포만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았고, 다른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무덤 속은 사람이 잠을 자고 일어나 이불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침실과 같았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 요한은 현장에서 목격하지 않고는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할 수 없습니다. 현장에 없었다면 어떻게 각 사람의 행동을 이처럼 자세히 현장감 있게, 생생하게 그림을 그리듯이 기록할 수 있습니까? 누가 먼저 갔는데, 누가 늦게 왔는데, 누가 먼저 들어갔다느니 기록할 수 없습니다. 또 만일 누가 시체를 훔쳐갔다면 시체가 놓였던 무덤 안을 정돈해 놓고 갈 리 없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부활의 사실적인 증거가 됩니다.

둘째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빈 무덤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죽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무덤이 있습니다. 성인들도 모두 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죽은 날에 묘 앞에서 성대하게 기념행사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없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사실은 말씀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16:21, 20:19, 26:32; 8:31~9:1, 10:32~34, 14:27~31: 9:22~27, 18:31~34, 22:31~34: 13:36~38). 구약의 곳곳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부활하셨다는 말씀과 연관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믿지 못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고 경험한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고 경험한 것이 성경 말씀과 연결될 때 믿음에 굳게 서게 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깊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말씀하셨을 때 비로소 마음이 뜨거워 영적인 눈이 떠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24:32).

시대가 어렵고 힘들면 체험과 환상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와 사이비가 등장합니다. 한국의 현대사에 6.25동란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이때 뭔가를 보여주는 사이비와 이단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천부교 등입니다. 통일교의 아류가 신천지입니다.

사람들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는 말보다 내가 본 천국을 더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본 천국보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천국을 더 믿어야 합니다. 천국의 정보를 성경보다 더 자세히 기록한 것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록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의 정보입니다. 뭔가를 봤다, 체험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맙시다. 그런 시간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합시다. 설령 직통 계시를 수백 번 받고 수백 번 뭔가를 보아도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는 것은 무당입니다. 무당도 접신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과 지상에 있는 신천지 집단과 영육일체, 신일합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당이 말하는 접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144,000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을 뜻합니다. 144,000명에는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것은 어떤 신기한 것도 무당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말씀을 기초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때 부활의 믿음으로 굳게 서게 됩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20:11~18)

제자들이 각각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나 깊은 나머지 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가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다른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를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한다며 울며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왜 이렇게 슬피 울고 있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를 변화시키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8:3). 그런데 사랑하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행복과 기쁨의 근원을 상실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슬픈 것은 사랑과 헌신과 경배의 대상을 잃었을 때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헌신하고 경배할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하루아침에 이 대상을 잃었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에 마지막으로 향품을 바르기 위해 왔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슬픔이 컸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 헤어지는 작별도 슬퍼서 웁니다.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한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모든 비극과 슬픔은 바로 죽음에서 옵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행복과 기쁨을 앗아갑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과 절망과 허무와 공허를 가져다줍니다. 죽음은 우리를 무력하게 합니다. 마리아가 계속 슬픈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20:15)

이 질문은 더는 슬퍼하거나 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슬픈 눈물이 앞을 가려 눈앞에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여자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을 알고 흐느껴 울며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모세야! 아담아! 사람들은 인구가 수십억이니, 나 하나쯤이야 뭐 그리 중요할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나 하나만을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우리를 부르신다고 하였습니다.

마리아야!” 이 음성은 어린양을 부르시는 선한 목자의 음성이요, 능력과 영광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승리하신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슬픈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하여 주시는 자비로운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더는 슬픈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다는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마리아의 현재 입장과 심정을 다 아시고, 한 개인을 인격으로 찾아 주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마리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랍오니여!” 소리쳤습니다. ‘랍오니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10:10~15).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변하여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weeping Maria에서 joyful Maria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될 때 운명적인 생각, 무기력, 허무, 절망 등이 물러가고 밝고 힘찬 삶을 살게 됩니다. 슬픔이 변하여 환희로, 한숨이 변하여 찬송으로,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연약한 사람이 변하여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산 소망을 줍니다(벧 전1:3~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삶의 스타일과 희망과 목적과 삶의 의미를 바꾸어 놓습니다. 한계에 도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한계와 장벽을 극복하고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자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직 승천하지 않은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나머지 그것에 도취할 것이 아니라 그가 하여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20:17)

예수님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똑같이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에서 오는 두려움과 슬픔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장차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나의 아버지가 곧 너희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 곧 너희 하나님에게로 올라간다고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곧 달려가서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알고 믿는 만큼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의 행함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첫 증인이요 부활의 첫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른 새벽에 죽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리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코로나19로 죽음의 두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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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마을교회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