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20:19~31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교회의 뿌리는 성전이 아니라 성막입니다. 성전은 움직일 수 없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성막은 언제든지 옮길 수 있는 이동성과 역동성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150년 동안 건물이 없었습니다. 가정을 중심한 가정교회였습니다. 그 기간에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A.D.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375년에 국교가 된 이후부터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부터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기독교의 역동성과 이동성이 사라져 중세의 암흑기가 시작됐습니다. 전도자 루이스 팔라우(Luis Palau)는 “교회는 거름과 같다”고 했습니다. 거름이 집 안에 있으면 냄새가 나지만, 밖으로 나가면 퇴비가 되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차적인 책무는 전도입니다. 전도하려면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전도는 은사가 아닙니다.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우리가 전도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에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전도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평강과 성령을 주시고, 제자들을 죄사함과 부활의 복음의 증인으로 파송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보고 믿고자 하는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세상으로 나아가 죄사함과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1.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19~23).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밖으로 나다닐 수 없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처럼 자신들도 잡아서 죽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을 닫고 빗장을 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잠긴 문을 두드리기라도 한다면 자기들을 잡으러 온 줄로 알고 초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은 잠긴 문을 노크도 없이 방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사람이 두려우면 제일 먼저 문을 닫습니다. 사람이 두려우면 눈동자가 커집니다. 사람이 두려우면 생각이 부정적이 됩니다. 사람이 두려우면 마음이 좁아집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빠지면 극도로 자기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밥맛이 없고 인상이 써지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도우셔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처럼 세상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하)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통 인사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평강은 평범한 인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지만 마음에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콧노래로 찬송가를 부르며 지나가는 엿장수를 바라보며 “나도 저 사람처럼 살 수 있다면”하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찾아 오셔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건강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가진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직장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취직과 결혼에 대한 두려움 등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생명을 잃는 죽음만큼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 이후에 이전과 다르게 강하고 아름답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한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리아의 부활이요, 제자들의 부활이요, 우리의 부활이요, 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깨뜨리는 승리의 찬가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19는 큰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두려움이 없을까요? 또 다른 바이러스가 찾아올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오직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부활의 믿음 이외에 어떤 위로도 우리에게 평강을 주지 못합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잠시 통증을 멈추게 하는 진통제일 뿐입니다. 돈을 벌면 가난의 고통은 지나가지만, 돈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병을 고치면 건강을 되찾지만, 얼마 지나면 다른 곳이 아프고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누리는 인기와 명예와 권력도 한순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우리를 참된 평강과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평강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의 열매요 예수님의 부활의 열매요 하나님 나라의 소망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강과 기쁨을 회복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예수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창 2:7). 하나님은 흙으로 정성을 다하여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시 139:13~14).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히브리어로 ‘아다마’(adrma)인데, 이는 흙이란 뜻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체는 질그릇과 같아서 약하고 잘 깨지고 쉽게 부서집니다(고후 4:7). 하나님은 흙에 불과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은 생령(a living being, NIV),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의 생명에는 육의 생명과 영의 생명이 있습니다. 육의 생명은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다 똑같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제한적이어서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생령을 소유한 영의 생명의 존재가 됩니다. 이 생명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듀나미스(δυναμις), 권능의 원천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1)
제자들이 감당하여야 할 사명은 사죄의 복음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열이면 열 명 모두 문제가 다른 것 같지만 한 가지 똑같은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사죄의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사죄의 복음을 증언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구원은 들음에서 나고, 전파자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롬 10:9~15).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해 주어야 죄 사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즘 부동산 문제가 적잖게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파트를 많이 지으면 될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주택 보급률이 104%입니다(2021.11.22.). 그런데 주택 소유율은 48.4%에 불과합니다(2021. 11.17). 아파트 문제는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가진 자들은 부동산 투기로 가옥에 가옥을 잇대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게 하고, 그 넓은 집에 홀로 거했습니다(사 5:8).
이처럼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욕망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인간을 누구도 변화시키고 고칠 수 없습니다. 어떤 제도도, 어떤 사상도, 어떤 정치인도 바꿀 수 없습니다. 만일 이를 고쳤다면 극약처방으로 잠시 완화했을 뿐입니다. 인간의 근본 뿌리인 죄를 뽑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욕망과 탐심의 죄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의 원리인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성경의 원리인 섬김과 나눔의 원리로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불의한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두 개의 병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사죄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제자들에게 두 개의 병기를 들려 온 세상으로 내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두려움으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두 개의 병기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여 평강과 기쁨으로 주님이 주시는 두 개의 병기를 들고 세상으로 나가서 부활과 사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요 20:24~2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마침 도마가 없었습니다. 아마 도마는 일자리를 구하러 간 것 같습니다. 도마가 돌아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리를 듣자, 그는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직접 보고 만져 보아야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현대인들은 보고 믿으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마는 현대인의 대표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부활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것은 믿지 않으려고 의심하는 회의주의자 홉스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합리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을 해결하고 믿고자 하는 정직한 의심이었습니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비교적 신앙에 쉽게 접근하지만, 이런 사람의 약점은 쉽게 식고 쉽게 뜨거워지는 냄비 신앙이라는 데 있습니다. 반면에 이성적인 사람은 얼른 신앙을 갖기는 쉽지 않지만,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재래식 무쇠솥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도마에게 여드레 후에 나타나셔서 평강의 메시지를 전하시고 도마의 소원대로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 의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니이다.” 예수님은 도마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바울은 보고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라고 했습니다.
서구에는 많은 사상이 있습니다. 이를 크게 두 개의 사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입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사상이고, 헤브라이즘은 히브리를 중심으로 한 사상입니다.
그리스를 중심 한 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그리스와 오리엔트의 문화가 교류함으로써 발생한 사상입니다. 이 사상의 핵심은 인본주의이며 이성과 과학의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세계관은 변증법적 시간관이고 시각적입니다. 그래서 각종 신상과 조각과 예술이 발달하였습니다. 각종 우상이 성행했습니다(행 17:23).
고대 히브리인의 사회, 문화 및 전통에 기반을 둔 헤브라이즘의 세계관은 창조, 타락, 만유 회복입니다. 사상의 핵심은 신본주의이며 종교적입니다. 헬레니즘이 어떻게(how)를 생각했다면 헤브라이즘은 왜(why)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브라이즘의 특징은 계시입니다. 계시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서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세계관은 직선적 시간관이고 청각적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 믿고자 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차원 높은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3.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사도 요한은 이 책에 기록한 것 외에도 표적이 많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복음서에 40가지가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중에 7가지를 뽑아 이적을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믿게 하고, 또 하나는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책이고,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신, 구약성경 어디를 보나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구약성경이 메시아의 예고라면, 신약성경은 구약에 예고한 메시아가 오셨고, 요한계시록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만유를 회복하신다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신, 구약성경과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유년 시절에 선친께서 충남 당진 시골에서 ‘정일서사’(精一書舍)라는 서당을 여시고 인근 동네 청년들을 훈육하셨습니다. 이때 선친께서 《자치통감》을 백독하면 물리(物理)가 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리’가 난다는 것은 사서삼경을 막힘없이 해석하여 사물의 이치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성경에 물리가 나야 합니다. 성경에 물리가 난다는 것은 성경 66권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로 보이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고, 모세 5경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고, 시가서와 역사서와 선지서를 읽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고, 4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과 요한계시록을 읽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어떤 성경을 읽더라도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고 해석하고 적용하면 성경에 물리가 난 것입니다. 제가 신약성경이든, 구약성경이든 ‘~만난 복음’(예수님)이란 책명으로 출간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단의 특징은 예수님 중심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이야기를 하지만 좀 더 들어가면 예수님 대신에 이단의 교주가 들어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예수님이 보여야 하는데 신천지는 교주인 이만희가 보이도록 합니다. 이단(異端)은 끝이 다른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되, 어떤 예수님으로 보아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역사적인 분인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과 왕, 그리고 선지자를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이시요, 왕이시요, 선지자입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요, 왕의 역할은 통치자요,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접하여 고백할 때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생명’(ζωή)이란 적극적인 구원의 표현입니다.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고,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영생’과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합니다. 죄와 사망에서 옮겼다는 것도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주는 두려움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믿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과 성령을 주시고 죄사함과 부활의 복음을 세상에 나가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서 죄사함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