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요한복음 21:1~14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 20:12)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건강한 사람일까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일까요? 의미와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물론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내가 어떠하든지, 어떤 모습이든지,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Jesus, 예수님입니다.
본문은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마치며 예수님의 사랑을 감동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날에 손가락을 걸고 맹세한 사랑도 상황에 따라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것도 다른 제자들까지 선동하여 떠난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 거룩한 사랑, 무조건 사랑, 우리의 마음을 저미게 하는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성탄을 맞기를 기도합니다.
1.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은 제자들(요 21:1~3)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요 21:1)
여기에서 ‘그 후’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내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맨 먼저 슬퍼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슬픈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주시고 성령을 받아 죄사함의 복음을 세상에 나가서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 마음의 의심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디베랴 호수’는 제자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곳입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는 3년 전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라고 순종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서 그물이 찢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물을 걷고 육지로 올라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는 삶에서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도록 방향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이후 베드로는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며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배웠습니다. 그는 마침내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막 8:29).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예수님이 묻혔던 장소가 빈 무덤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했고(요 20:3),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평강의 메시지를 듣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이곳에 와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머리에 더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은 사랑하는 스승이 못 박힌 잔인한 도시, 그의 꿈을 앗아간 도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실패한 도시였습니다. 베드로는 더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베랴 호수로 왔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 계신 장래를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공채를 보려고 해도 나이도 나이지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신변에 위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환영해 주는 곳은 디베랴 호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주관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베드로는 주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지식과 객관적인 데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내재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낙향하여 3년 전에 버려둔 배를 수선하여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노를 젓고 그물을 던지고 당겨도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찬바람이 부는 밤 호수에서 빈 그물을 끌어 올리는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베드로는 절망하여 차가운 밤바다에 몸을 던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귓전에 맴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도 실패하였고, 자신의 전공인 고기잡이에서도 실패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절망을 넘어서 무망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2.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요 21:4~7)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요 21:4상)
동녘으로 해가 떠오르는 무렵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만나겠다고 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마 26:32). 제자들은 열심히 고기를 잡느라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바닷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하여 한풀 꺾인 제자들을 사랑의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어떻게 돕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요 20:5)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에게 “이런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얘들아”(friends)라고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제자들의 형편을 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제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궁핍함과 실패와 실수를 깨닫도록 함에 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실대로, 진솔하게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이 모습은 창세기 3장 9절에 나오는 아담과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아담에게 찾아가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무화과나무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몰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그는 ‘제가 죄를 짓고 무화과나무 밑에 숨어 있습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하나님께 변명하고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여자와 함께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떠나 무엇을 잡았느냐? 너희가 바라는 대로 성공했느냐? 너의 삶에 만족하느냐? 너희 삶에 의미가 있느냐?” 이 질문 앞에 많은 사람이 자신을 변명합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궁핍과 곤고함으로 영혼이 탄식하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없습니다”라고 진실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실패를 만회하여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6)
그들은 밤새도록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153마리나 되는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이 제일 먼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라”라고 외쳤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3년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했을 때, 많은 고기를 잡은 사건을 지금의 사건과 일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자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오해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하는 귀로 듣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기에 금시 알 수 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건을 만납니다. 이때 예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난날 내게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반면에 쓴 뿌리를 품은 사람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벗은 겉옷을 두른 후 예수님을 향해 뛰어내려 다이빙하여 헤엄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행동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사명을 버리고 낙향했지만,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상에서 사명을 떠나 자기의 생각과 뜻대로 자유롭게 살면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우나 하나님의 소명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3. 예수님의 아름다운 비치 파티(요 21:8~14)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오십 칸쯤 되어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이 거리는 약 100m 정도입니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숯불 위에는 생선이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7명의 제자는 숯불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습니다. 이 숯불은 사랑의 숯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건을 가지고 일일이 제자들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숯불에 냉랭한 제자들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떡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프고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친히 어머니가 되셔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방금 잡은 생선을 가지고 오게 하셔서 즉석 생선구이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에 제자들을 동참시키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5000명을 먹이실 때도 제자들을 역사에 동참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현장에 동참시켜 역사화하십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과 관계가 서먹하여 고기만 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하게 153마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153마리는 디베랴 바다에서 사는 어족의 전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와서 조반을 먹으라”(Come and have breakfast). 성경에 ‘오라’는 초청이 신약에 400번, 구약에 200번, 600번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초청이 주는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반한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허물과 실수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목이 메어 감히 떡과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다른 때 같았으면 아마도 ‘왕초’에 나오는 거지 떼들처럼 서로 먼저 먹고자 다투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 앞에 할 말을 잊었고 먼저 먹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못자국 난 손으로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수 먹여 주셨습니다. 그 큰 베드로의 입속에 떡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말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입속에 있던 떡과 생선에 눈물이 고여 들었습니다. 제자들의 내면에 있던 절망감과 실패의식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아침의 beach party는 영원히 잊지 못할 용서와 사랑의 잔치였습니다. 후에 요한은 이 사랑의 잔치를 요한계시록에서 하늘나라의 잔치와 연결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복이 아니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은혜를 배반한 사람은 원수보다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고 하였습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하였습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성당에서 한 신부가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신부 곁에서 시중들던 소년이 그만 실수로 성찬에 사용하는 포도주잔을 엎질렀습니다. 잔은 깨어지고 포도주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신부가 노하여 소년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나지 마라.” 비슷한 일이 다른 성당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 성당의 신부는 화를 내지 않고 말했습니다. “괜찮다. 나도 어렸을 때 실수를 많이 했단다. 힘을 내라”며 소년을 다독였습니다.
성당에서 쫓겨났던 소년은 후일에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어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티토(Josip Broz Tito)입니다. 한편 따뜻한 위로를 받은 소년은 성장해서 미국의 천주교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풀턴 쉰(Fulton Sheen)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허물진 삶을 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고 살기도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꺼져가기도 합니다. 이때 절망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오면 한량없는 용서의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주시고 내면에 소망과 사랑의 숯불이 타오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은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도마는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 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늘 함께 계시지 아니하므로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가사 상태로 보려는 사람이 있고, 환상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부활을 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나타나는 가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육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목마르다 하셨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오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몸을 보이셨습니다. 창에 찔린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셨고, 제자들과 더불어 음식을 같이 나누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부활, 완전한 몸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몸도 부활합니다. 그때 우리 몸은 완전하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고전 15:42~44).
제자들은 예수님이 옛날과 똑같이 말씀하시고, 똑같이 식사하시니 정말 주님이시냐고 감히 묻지 못했습니다(요 21:12). 제자들은 이 사건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여 연약해지고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마 28:20).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unchangeable love)이요,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이요, 거룩한 사랑(holy love)이요, 무조건 사랑(unconditional love)입니다. 그리고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 위로하시는 사랑, 배고픈 것까지 배려하시는 사랑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형편없는 제자들을 믿고 “내 양을 먹이라”고 믿고 맡겨 주시는 완전한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