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가정의 달, 에베소서 5:22~33- 부부윤리(부부의 날)
부부윤리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경외하라.”(엡 5:33)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가정은 예로부터 사랑의 보금자리요 안식처요 가정의 평화가 모든 것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가정은 계절의 여왕 5월처럼 따사로운 포근함이 있고 푸르른 자녀들의 희망이 넘치며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가득한 동산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제일 먼저 세우신 소중한 제도요 모든 제도의 산실입니다. 가정은 사랑과 하나님의 뜻이 담긴 곳입니다.
가정은 공동체 중에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최후 목적은 가정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깨면 다 깨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허물어지고, 가정이 병들고, 가정이 시들해지고,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의 모든 제도가 병들고 흔들리게 됩니다. 신흥종교집단과 이단이 제일 먼저 부부 관계를 깨고 가정을 공격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정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알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가정은 혼인으로부터 시작되고, 혼인은 반드시 남녀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가정의 최초 단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정의 행복의 원리를 부부의 윤리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유교 윤리와 다릅니다. 유교의 윤리는 부모와 자녀의 윤리인 부자유친(父子有親)부터 시작하지만, 기독교 윤리는 부부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가정을 이루어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혼인하여 가정을 이룰 예비부부들입니다. 본문에서 행복한 가정의 원리를 묵상하며 은혜받았으면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윤리와 도덕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윤리는 무엇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게 되면 기독교윤리가 되며, 공맹사상과 관계를 갖게 되면 유교 윤리가 되고, 부부와의 관계를 말하면 부부윤리가 됩니다. 반면에 도덕은 제도나 관습 규범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부윤리의 첫째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면 저를 꼰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가정의 행복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복종’(ὑποτἀσσεσθε)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아래’라는 전치사와 ‘잘 듣다’는 동사의 합성어로 잘 들어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복종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이란 상하 개념이 아니라 질서를 위한 개념입니다. 둘 이상이 모이면 누군가가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왜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실종됩니까? 왜 점점 고개 숙인 아버지들이 많아집니까? 돈을 못 벌어서입니까? 명예와 권세가 없어서입니까?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아내가 남편이 말하는 것을 경청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남편이 설령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해도 진지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 이유는 아내가 남편을 주(lord)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κυρίῴ)’란 주인, 상전, 통치자란 뜻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주인으로 대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주인으로 대할 때 아내가 남편에게 반말할 수 없고, 대들 수 없고, 때릴 수 없고, 욕할 수 없습니다.
아내는 가정에서 얼마든지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장하는 자세로 말하면 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주장하는 아내들은 열이면 열 모두가 자녀들 앞에서 남편에게 덤빕니다. 자녀들 앞에서 남편 흉을 봅니다. 아내는 자녀 앞에서 남편 흉을 절대로 보지 마세요. 자녀들 앞에서 남편 흉을 보는 그런 집에서 무슨 부권이 서겠습니까? 이런 집은 콩가루 집안과 매일 전주비빔밥만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면 적어도 콩가루 집안은 되지 않습니다. 때론 아내의 말이 남편의 말보다 백번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일단 남편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미국의 청교도 아내들은 남편에게 많은 제안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 결정은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남편의 말을 따른다고 합니다. 왜 아내는 남편의 말에 복종해야 합니까?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첫째,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몸과 머리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몸과 머리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유기적인 관계인 머리와 몸이 따로 놀 수 없습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면 비정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가 각기 따로 논다면 정상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정상인 몸은 머리의 통제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상의 아내는 남편의 통제를 받습니다. 따라서 정상인 아내는 남편과 상의 없이 제멋대로 하지 않습니다. 항상 남편과 상의하여 가정과 자녀들을 돌봅니다.
둘째, 몸의 구주이기 때문이다.
‘구주’(Savior)란 보호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고 길러주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모든 사람의 보호자입니다. 남편이 자기 육체를 양육한다고 했습니다(엡 5:28~29). 남편은 가장으로 아내를 돌보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요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를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엡 5:24).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에 100% 따르고, 그리스도의 뜻에 100%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지 않고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아내는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내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 3:1~2)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고 했습니다. 이는 화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겉모습을 보므로 겉모양도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 옷을 입더라도 세련되게 입어야 합니다. ‘미의 얼굴’이란 책을 보면 매혹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외모도 외모이지만 속사람이 아름다운 우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 꼰대가 아니라 이남대라고 하겠지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은 이남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어느 정도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느 정도 사랑하셨습니까?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교회를 위해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사랑이란 희생입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생하면 목숨을 바치는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희생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희생은 아내의 불편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아내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례 때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를 어떤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만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내 심장을 다스릴 것이고, 내가 그리워하는 이는 당신뿐이며 당신이 없이는 나는 완전치 못하며, 나는 당신에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주되 나 자신까지 줄 것이며,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만 위해 살 것이며, 나는 당신을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며, 나는 당신에게 고통이나 심지어 말로도 어려움을 주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당신을 보호하고 지킬 것이며, 나는 모든 악에서 건져내기를 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내 생각을 나누기를 즐겨할 것이며, 내 가슴도 내 몸도 내가 소유한 모든 것도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들을 것이고, 나는 당신의 축복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는 당신 곁에 항상 있기를 소원합니다.”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둔 ‘남편의 행복’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모인 친구 중에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자랑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병을 앓고 있는 친구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각기 자기 아내를 자랑했습니다. 내 아내는 절세미인이야! 내 아내는 음식 솜씨가 먹방에 나가도 될 수 있는 일품이야! 내 아내는 나를 끔찍이 사랑해!
이제 병을 앓는 남편 차례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모아졌습니다. 저 사람은 과연 무슨 말로 자기 아내를 자랑할까? 그런데 그는 활기 있는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정말 감사가 많아. 친구들이 아는 바대로 나는 아내를 자랑할 것이 없지. 그러나 나의 행복은 이런 아내를 만남으로 내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네. 만일 가정에 고통이 없고 화평하기만 했다면 기도와 신앙이 지금처럼 뜨겁지 않았을 거야. 나는 아내의 건강 문제로 항상 기도하게 되었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이 말을 들은 친구들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또한 크게 감동했습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사랑은 감사로 나타납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는 감사하다(thank you)입니다. 유대의 격언 중에 감사라는 말이 혀에 붙어있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어느 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간의 언어도 감사입니다. 감사는 뜨거운 태양 빛 가운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를 표현하는 데 인색합니다.
오래전, 미국의 미시간 호수에서 선박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마침 이 배에 젊은 수영 선수 한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걸고 헤엄쳐 23명이나 구출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 청년의 이름은 물론 신문 지상에 토픽감으로 등장했고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토레이 신부가 로스엔젤레스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미시간 호수에서 이러저러한 사고가 났을 때 23명의 목숨을 건져 준 청년이 있었습니다’하고 설교하면서 내려다보니, 그때 그 청년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설교를 마친 후에 토레이 신부가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일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노인의 대답이 “그 23명 중에 내게 찾아와 고맙다고 말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억납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특히 남편은 아내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기도가 막혀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가정이 영혼의 쉼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듯이 아내를 거룩하게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거룩’이란 구별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남편은 아내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목욕탕에 데리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편은 가장으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성경 선생이 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하면 가정이 깨끗하고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가정이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셨듯이 영광스럽게 하라.
아내를 어디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셨듯이 아내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아내의 모든 가능성을 살려주고, 하나님 앞에 영화로운 존재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이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마 누구도 자신 있게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연합하라
첫째, 연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혼인하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독립적인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을 합일성, 친밀성이라고 말합니다. 부부 사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연합’이란 완전한 하나 됨을 말합니다.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영적으로도 하나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 혼인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불신자와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고후 6:14). 빛과 어두움은 사귈 수 없습니다. 좋은 조건인 규수나 신랑감이 있다 할지라도 불신자와는 혼인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미 불신자와 혼인했으면 믿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의 차가 있을 경우는 같은 믿음과 같은 뜻을 갖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이혼하지 말라.
혼인하면 둘이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둘이 한 몸이 되므로 나누면 온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혼을 금합니다. 그리고 분방을 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방을 금합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합의상 얼마 동안 하되 다시 합하라고 했습니다(고전 7:5).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없지만, 부부와 연합되는 그 속에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혼인의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은 혼인을 비밀이라고 했습니다(엡 5:32).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우리는 자기 몸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존경은 헬라어로 포베타이(φοβήταί)로,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러나오는 헌신적인 마음으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때 행복한 가정, 아름다운 가정, 완전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두 부인이 남편의 바지바느질을 하면서 자기 남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 남편은 회사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는 집에 와서도 회사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린 남편은 올해도 진급을 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좋겠어요. 그러자 다른 부인이 우리 남편도 댁의 남편처럼 열심히 회사일을 하고 있어요. 이번에 승진하여 연봉도 많이 올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묵묵히 바느질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승진하지 못한 아내는 의자에 걸터앉아 남편 바지를 바느질하고, 다른 아내는 무릎을 꿇고 바느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옷을 깁더라도 남편을 존경하는 모습으로 바느질을 하였습니다. 이런 가정에 행복이 없을 리 없고 남편이 승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윤리가 아니라 상호 간의 사랑과 섬김이 바탕이 된 윤리입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종과 주인과의 관계 모두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윤리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며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종하고 사랑할 때 신비로운 천국의 비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