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전도서 7:1~7
좋은 이름은 좋은 기름보다 낫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 7:1)
이름은 나의 존재와 인격과 명예의 상징입니다. 특히 히브리인들에게는 성은 없고 이름만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이 아니라 이름입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란 뜻이고, ‘이삭’은 웃음이란 뜻이고,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입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나의 손을 잡아 주십니다. 예수는 가장 귀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빌 2:10). 예수님은 33세의 짧은 생애에 소중하고 귀한 이름을 남기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후손에게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나는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 나의 이름이 충성스러운 이름으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명예롭지 못한 이름으로 기록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명예로운 이름, 후대에 길이 빛나는 이름, 모든 사람에게 본을 보여 칭찬받는 좋은 이름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전 7:1전).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전 7:1전)
‘좋은 기름’은 재물과 부와 소유를 뜻합니다. 재물은 귀신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으로 재물을 모으고 추구합니다. 그래서 재물을 모으는 길이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재물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지만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이 낫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 석 자를 남기고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짧은 생애에 이름을 어떻게 남기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좋은 이름을 남기는 것, 내가 어떤 인격과 어떤 존재로 이름을 남기는가 하는 것은 재물을 추구하고 소유하는 것보다 값지고 귀합니다.
특히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이름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귀하고 놀랍지만, 더욱더 귀하고 놀라운 것은 예수 이름입니다. 우리 가스펠 송을 불러보겠습니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언제나 기도 들으사, 오 예수 나의 손 잡아 주시는 가장 귀한 그 이름♬
역사 이래로 좋은 기름을 좇다가 좋은 이름, 명예를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장관들의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좋은 이름보다 좋은 기름을 쫓아간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명예롭게 사신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을 선택한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녀는 좋은 기름을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이를 본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며 분을 내며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좋은 이름보다 좋은 기름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 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좋은 기름으로 좋은 이름을 남겼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좋은 이름보다 좋은 기름을 좋아하다가 가장 비극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보다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창세기에 야곱이 나옵니다. 야곱은 인간성이 강한 집념의 사람입니다. 그는 둘째 아들로 태어나 처음부터 장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 에서를 속여 장자의 명분을 취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12남 1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 그가 얍복강 나루터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 했습니다. 별빛은 초롱초롱 빛나고 그 별빛은 얍복강에 비쳐오건만 그의 내면은 불안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는 “아, 나는 내가 얻고 싶은 모든 것을 소유했다. 명예, 사랑, 물질을! 나는 이런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열심히, 지독히, 굳센 의지로 살아왔지!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내 내면의 두려움과 불신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구나! 아! 불안하고 답답하다”고 외쳤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야곱과 씨름하셨습니다. 야곱의 힘이 얼마나 세었던지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으로 마침내 그를 넘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 야곱은 죽자사자 하나님을 붙들고 다리를 절며 복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호 12:4).
그에게 무슨 복이 더 필요합니까? 그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복을 다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안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소유를 얻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의 존재, 자신의 실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대해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소유보다 존재, 실존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야곱이 한참 생각하다가 “나는 야곱”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곱’이란 속이는 자, 싸우는 자, 빼앗고 쟁취하는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황태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속이고 취하고 빼앗는 삶에서 인격이 변하여 하나님의 황태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황태자가 되어 속이고 뺏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만백성을 위해 베풀고 축복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황태자로 변화되었을 때 불안하던 내면이 변화되어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을 지날 때 해가 돋았습니다. 야곱은 비록 다리는 절뚝거렸지만, 그의 마음에는 찬란한 희망, 하나님의 빛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인 이스라엘, 하나님의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좋은 기름을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좋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살고 있는가?” “후손에게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후손에게 돈 몇 푼을 남기고 갈 것인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 성경을 사랑하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남을 돕고 이웃을 섬기며 살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자기밖에 모르는 구두쇠라는 이름을 남기고 갈 것인가?“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을 택하여 후대에 좋은 이름을 남겼습니다. 우리 모두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을 남기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전 7:1~2).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1하~2)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은 역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소식보다는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아버지인 필립 왕은 죽음의 소식을 늘 가까이하고 살았습니다. 필립은 한 시종을 시켜서 날마다 그에게 “폐하는 돌아가십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왕의 권세와 부귀영화 속에서도 자기의 죽음을 늘 들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옛날 로마에서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초상집보다 즐겁게 노는 잔칫집 가기를 좋아합니다. 초상집에는 조전과 조화를 보내고 잔칫집에는 축전과 화환을 보냅니다. 잔칫집의 음식은 맛이 있어 집으로 음식을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초상집의 음식이 아무리 맛이 있어도 가지고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초상났다고 집집에 떡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돌떡과 백일 떡은 집집에 돌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초상집에 가면 숙연해집니다. 결혼식장에 가서 주례 메시지를 한 시간, 찬송 5, 6곡을 부른다면 신랑과 신부는 말할 것도 없고, 하객들 모두가 지쳐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집에서는 메시지가 길면 길수록 좋고 찬송 또한 부르면 부를수록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주례 메시지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고, 장례 메시지는 길면 길수록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례 메시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장례 메시지는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서 내가 죽으면 가족 외에 누가 올까, 이제 베풀고 섬기며 좋은 이름을 남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초상집에 다녀오면 모두가 나도 언젠가 죽겠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죽음 저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잔칫집에 갔다 오면 배탈이 나나, 초상집에 다녀오면 모두가 진지한 철학자가 됩니다. 초상집에 다녀오면 죽음이 추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날 준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한국에 왔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힌 양화진에 다녀온 분들은 모두 은혜를 받고 옵니다. 거기에 묻힌 대부분이 선교사들입니다. 그들은 조선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삶을 마감한 사람들이거나 선교사로 왔다가 모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가 조선을 잊지 못해 다시 후손들에 의해 조선에 묻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곳에는 천수를 다한 분도 있고 어린이도 묻혀 있습니다.
그중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묘비명을 쓴 헐버트 선교사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선교사이자 고종의 외교 밀사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입니다. 그는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7세 노구를 이끌고 한국에 다시 왔다가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조선에서 한 살 때 죽은 아들 쉘던과 함께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는 시끄러운 잔칫집보다 초상집 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전 7:3~4,6).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전 7:3~4,6)
우리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웃음보다 얼굴에 근심이 낫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역설적입니다. 티 없이 맑고 밝은 웃음은 모든 이를 즐겁게 합니다. 그래서 직장마다 스마일 운동을 벌입니다. 웃음은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웃음 뒤에는 가식이 있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울음은 가면이 없습니다. 물론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눈물은 거짓이 없습니다. 슬픔과 눈물은 진실합니다. 슬픔과 눈물은 감격스럽습니다. 눈물이 마른다는 것은 감격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회개치 않는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습니다. 찬송가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새찬송가 549장)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눈물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 얼마나 숭고합니까? 예레미야의 눈물, 얼마나 고귀합니까? 실없이 웃는 사람보다 우는 사람이 얼마나 진실합니까? 요즘은 웃음이 헤픕니다. 많은 사람이 천박한 말로 천박한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많은 사람이 T.V. 앞에서 실없는 웃음을 짓습니다.
눈물을 흘린 사람만이 인생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낍니다. 시편 저자는 원수의 목전에서 내 잔이 넘친다고 말했습니다. 기쁨 속에서는 하나님의 위로가 없지만 슬픔 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승리 속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수 없지만,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희망 앞에서는 위로가 없으나 캄캄한 절망과 무망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얻습니다. 눈물과 슬픔 속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성경에 눈물을 흘린 한나가 나옵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여럿이 있었고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래도 한나는 자식이 없는 콤플렉스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브닌나는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랑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랑 콤플렉스를 한나에게 다 쏟아부었습니다. 한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였습니다.
한나는 슬픔과 아픔을 안고 여호와 앞에 나와 눈물로 간구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기도하는 한나에게 잉태케 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녀는 아픔과 슬픔을 눈물의 기도로 승화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한나의 눈물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눈물 한 방울’이란 육필 원고를 남겼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말’을 찾다가 눈물 한 방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물 한 방울은 마음의 표현이다. 눈물 한 방울은 심장에서 시작한다. 자신을 위한 눈물은 무력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나와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다. 작은 눈물 한 방울은 세상을 위한 희망의 씨앗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엄하고 거룩한 눈물 한 방울은 자녀들 모르게 흘리는 부모님의 눈물이다.” 눈물은 웃음보다 낫습니다.
요즘은 눈물이 없습니다. 눈물이 없어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눈물이 없으니 회개가 없고 회개가 없으니 세상이 요란스럽습니다. 세상이 요란하니 살벌합니다. 전쟁의 참화를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라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조국과 이 시대를 위해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지금은 헤픈 웃음이 아닌 눈물을 흘릴 때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곳에 생명의 역사, 희망의 역사, 창조의 역사가 있습니다.
4. 책망이 노래보다 낫다(전 7:5~7).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전 7:5)
여기에서 노래는 세속적인 노래를 뜻합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노래방을 즐겨 찾습니다. T.V마다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안방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노래를 듣는 것보다 책망이 낫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책망이 노래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를 깨닫는 이가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책망은 아무에게나 하지 않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책망하다가는 뺨을 맞습니다. 관심, 애정을 가질 때만이 책망할 수 있습니다. 충고하고 권고하고 책망할 수 없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닙니다. 권면하고 책망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러야 진정한 친구입니다. 책망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충고하고 책망하면 오히려 기분이 상하여 관계가 멀어집니다.
책망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귐은 잘못을 잘못했다고 책망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같은 뜻과 같은 소망과 같은 사명을 공유하여 서로 충고하고 책망하며 걸어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고,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그리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전 7:6~7).
예수님의 이름은 가장 좋은 이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이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여기게 됩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책망이 노래보다 나음을 느끼게 됩니다. 죄와 죽음이 주는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밝고 빛난 삶을 살게 됩니다. 상처받은 마음이 치료됩니다. 유혹하는 삶에서 매력이 있는 삶, 기쁨과 영광과 찬양과 기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좋은 이름 예수를 사랑하여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을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