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전도서 9:1~18
모두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전 9:1)
우리는 행과 불행을 운명이나 우연, 아니면 숙명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우연과 운명, 숙명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특별한 일이 생기면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기적 또한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뜻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현대의학이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의학은 일시적으로 불편을 덜어주고 연장할 뿐이지 생명을 좌지우지 못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2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데려갈 사람 데려가시고, 살릴 사람 살리십니다. 파직할 사람 파직시키고 세울 사람 세우십니다. 퇴출할 기업은 퇴출시키고 회생할 기업 세우십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 병들고 건강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은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으로 시작합니다. ‘마음에 두었다’는 것은 모든 각도에서 상하, 좌우, 전후, 삼차원의 공간, 입체로 생각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살폈다’는 것은 문제의 근원을 깊이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고 살펴보고 생각한 결론이 무엇입니까?
1. 모두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전 9: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전 9:1)
전도서는 모두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나의 자녀가 어떻게 될지, 나의 부모가 어떻게 될지, 나라가 어떻게 될지, 내 직장이 어떻게 될는지 불안하여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특히 청년들은 불투명한 미래로 불안하여 우울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손이 늘 함께하심을 믿어서입니다. 이사야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의로운 오른 손’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므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산 요셉의 생애는 아름답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의 시기로 은 20에 팔려 하루아침에 아버지 집을 떠나 낯선 이방 땅인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고향이 그립고 아버지 품이 그리웠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우면 고독과 슬픔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주체할 수 없이 몰려왔습니다.
더욱이 용모가 준수한 요셉은 보디발 부인의 유혹을 물리치다가 성추행이란 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이보다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한 것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이 따르는가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장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의탁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믿음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살았을 때 그 어디나 하늘나라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나의 생애를 맡기면 장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대신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나의 삶이 아름답고,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2. 인간은 미친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전 9:2~3전)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전 9:2~3전)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이는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이나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나 깨끗하지 않은 자, 제사 드리는 자나 드리지 않는 자, 선인이나 죄인, 맹세하는 자나 맹세하지 않는 자, 모두가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미쳐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갑자기 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짓을 합니다. 이유 없이 혼자 웃고, 혼자 울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이유 없이 화를 냅니다. 이는 모두가 마음속에 악이 가득하여 미쳐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미쳐서 죽을 줄도 모르고 불나방으로 뛰어듭니다. 모두가 정욕에 미쳐 정욕의 불 속으로 뛰어듭니다. 모두가 물질에 미쳐 탐욕의 불 섶으로 뛰어듭니다. 사람들은 미쳐서 죽음의 불구덩이로 뛰어듭니다. 모두에게 정도의 차이일 뿐 뭔가에 미쳐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사 1:4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0~18)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을 헬라 신화에 나오는 구두사와 같은 화근이 가슴 속에 숨어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성훈의 내적 치유에서 우리의 내면은 모두가 여러 모양으로 정신 장애가 있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이상(disorder)한 사람들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프로테지가 조금 높으면 정신병원에 가는 것이고, 좀 낮으면 집에서 살 뿐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농산물이나 종자가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종자가 싹이 노랗습니다. 완전한 부패, 전적 부패, 모든 지체가 부패했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사람이나 천박한 사람이나 다 똑같이 육은 육일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롬 8:6~7). 우리가 어떻게 미쳐있는 상태에서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하)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이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죄는 힘을 상실하게 합니다. 죄는 사람을 추하게 합니다. 죄는 코로나19처럼 오염시킵니다. 죄는 사람을 발광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발광하는 광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든 몸, 병든 생각, 병든 마음, 병든 영혼을 깨끗하게 치료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에 미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받고 새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미쳐서 자기 몸을 상하고 울부짖는 거라사 광인을 변화시켜서 데가볼리의 목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타는 목마름으로 매일 우물가를 찾는 사마리아 여인을 변화시켜 사마리아 지방의 목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돈밖에 몰라 동족을 등쳐서 돈을 긁어모으던 세리 마태를 변화시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사슬에 묶여 있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르다를 변화시켜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경쟁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던 베드로와 요한을 변화시켜 1세기의 위대한 스승으로 삼으셨습니다.
루마니아 김레베카 선교사는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황해도에서 월남한 부모님의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어쩔 수 없이 일찍 돈을 벌고자 간호학과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는 꿈을 이루지 못한 슬픈 생각으로 대학을 다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변화시켜 복음의 저널리스트로 삼아 동유럽에 복음의 특파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믿음의 거장이 됩니다.
3. 인간은 다 죽은 자에게로 돌아간다(전 9:3후).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후)
인간은 악이 가득하여 평생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죽은 자에게로 돌아갑니다. 죽음만큼 실제와 현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반드시 죽은 자의 길로 갑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지만,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롬 6:23; 히 9:27). 사람이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여서 내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삶을 진지하게 삽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경거망동하고, 죽음 앞에서 농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철학자가 되어 진지해지고, 진실해지고, 겸손해집니다.
로마 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성대한 개선행렬을 할 때 바로 뒤에 노예 한 명을 세워놓고 따라가면서 계속 다음과 같이 외치도록 했습니다.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도 한낱 인간임을 기억하라”(Memento mori. Hominem teesse memento). 지금은 승리자로 개선 행진을 하지만 너 자신도 언젠가는 패하고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죽음을 생각하며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러나 죽은 후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납니다(요 5:29). 선한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악한 자가 선한 자가 되어 생명의 부활로 나타납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 15:42~44).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나면 무덤에 있던 성도들이 부활하고, 후에 산 자들이 들림을 받아 사모하고 사모하던 예수님, 빛나고 영광스러운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게 됩니다(살전 4:16~17). 이때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다가 당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계 21:4).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우리를 조롱하던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성도들에게는 위로와 승리와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생각하며 삶을 진지하게 진실하게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4.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전 9:4~18)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전 9:4~6)
초원의 왕자인 사자와 개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초원의 왕자인 사자라 할지라도 죽으면 산 개보다 못합니다. 이처럼 산 자는 귀중하고 존엄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는 산 자보다 못합니다. 죽은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희망이 없습니다.
반면에 산 자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따듯한 사랑이 있습니다.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큰 특권이요,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변변치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삶 자체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산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첫째, 먹는 즐거움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 9:7)
사람이 맛있게 먹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산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밥맛이 없습니다. 밥맛이 꿀맛이 난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늙고 병들면 식욕이 떨어지고 곡기가 끊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으므로 먹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촐한 식탁일지라도 즐거움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입는 멋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전 9:8)
‘희다’는 것은 청결을 뜻하고, ‘향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맵시를 뜻합니다. 옷은 청결하고 우아하고 맵시가 있어야 합니다. 맵시와 우아함은 비싼 옷에 있지 않습니다. 값싼 옷이라도 얼마든지 품위 있고 우아하게 입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옷을 입습니까? 나를 위해 옷을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여주기 위해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맵시와 우아함은 저 멀리 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맵시와 우아하게 입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아함과 맵시는 외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고 했습니다. 내면이 천박한데 비싼 옷만 걸치고 다니면 다른 사람에게 악취와 혐오감을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맵시 나는 우아하고 격조 있고 품격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 아내와 함께 하는 즐거움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성인된 남녀가 하나님 안에서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산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복입니다. 우리말에 조강지처를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를 잠언에서는 젊었을 때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넷째, 일하는 즐거움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 놀 수는 없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한다는 것은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죽은 이후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살후 3:10).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우리는 생명이 있을 때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빨리 출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럴 때 결과만을 놓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균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전 9:11~12). 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게으름에는 결코 보상이 없습니다(전 9:13~17).
하나님께는 우연이나 운명, 그리고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나의 삶을 의탁할 때 내일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일을 희망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나의 삶 전체를 맡기고 살아서 산자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