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전도서 11:1~10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하루도 만나지 못하면 안 되고 한 시도 떠나면 안 되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또 하나는 보통 친구, 그저 만날 수도 있고 안 만날 수도 있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먼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어쩌다 생각나면 한번 만나는 그런 정도의 친구였습니다. 이제 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이 죽은 다음에 보니 그 절친했던 친구는 그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보통 친구는 문가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 반갑지 않았던 먼 친구가 찾아와 내세의 길을 동행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돈입니다. 내가 세상을 사는 동안 절친했던 돈은 세상을 떠날 때 나와 동행해 주지 않습니다. 돈은 내가 죽는 순간 나를 떠납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평생 가장 가까운 관계였지만 역시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문가에 서서 울고 있을 뿐 나와 동행해 주지 못합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입니다. 내가 가끔 생각나면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행이 마지막 가는 길까지 동행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였고,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베푼 그 선행만이 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해 준다는 것과 우리가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고 섬기는 삶이 복되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1. 식물을 물위에 던져라(전 11:1~2).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너는 네 떡을 식탁에 던져라”, 아니면 “네 떡을 배고픈 사람에게 던져라”고 하면 이해를 하겠는데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는 말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물고기에게 떡을 주라는 것입니까? 물고기에게 떡을 많이 주면 나중에 물고기가 자라서 던진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면 “씨앗을 물 위에 던져라. 왜냐하면, 수일 후에 그것을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던져라’는 말은 영어로 cast인데, 이 말은 낚시할 때 고기를 유인하는 미끼를 뜻합니다. 낚시꾼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주위에 미끼인 깻묵을 계속 던집니다. 그러면 고기들이 몰려옵니다. 그때 낚시를 던지면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이처럼 사람이 계속 선행을 베풀면 언젠가 도움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낌없이 돕고 섬기라는 것입니다(욥 22:24).
먹는 것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 “먹고 죽은 시체는 때깔도 좋다.” “목자가 되기 전에 먹자가 되자.” 사람들은 이런 철학을 가지고 열심히 먹습니다. 이로써 현대인들에게 생기는 문제가 비만이고, 비만은 각종 합병증을 가져다줍니다. 비만은 유전의 원인도 있겠지만 과잉 섭취에서 옵니다.
사람들이 비만으로 합병증에 걸리는 모습을 보면 먹는 것이 남는다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는 것이 남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선행을 베풀고, 남을 돕고 나눠주고 섬기는 것이 남는다는 진리를 기억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섬기고 베풀고 나눠주려면 탐욕, 욕망을 절제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을 다 입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남을 돕고 섬길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반면에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능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제어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보물은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와 지식과 학문과 재능과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땅에는 좀과 동록이 보물을 해치고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반드시 썩고 쇠하고 부패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좀과 동록은 눈에 보이지 않게 보물을 해칩니다. 좀은 비단을 못 쓰게 만듭니다. 당시 화폐는 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녹이 슬어 나중에는 못 쓰게 됩니다. 보물은 항상 도둑이 눈독을 들이고 있어 언제 어느 때 약탈할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애써 쌓아 놓은 보물을 약탈해 가는 약탈자가 곳곳에 있습니다. 불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로 만듭니다.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는 순식간에 우리의 보물을 앗아갑니다. 전쟁과 태풍과 지진, 그리고 화산폭발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으로 내몰아 평생 수고하며 모았던 모든 보물을 한낱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죽음 앞에는 부와 명예와 권세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는 약탈자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소유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세상의 욕망대로 살다가 비참한 삶을 마감한 사람이 나옵니다. 한 어리석은 부자가 소출이 풍성해지자 혼자 속으로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고자 했습니다. 또 그는 내가 내 영혼에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눅 12:17~19). 그의 말속에는 내라는 단어가 6번이나 반복합니다. 그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
그는 자기가 벌어 놓은 것을 한 번도 선한 일에 써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스테판 M. 폴란이 쓴 “다 쓰고 죽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는 낭비나 헛된 일을 위해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가치 있는 일에 다 쓰고 죽자는 것입니다. 유산을 많이 남겨 놓고 가면 자식들이 다투고 재산을 다 탕진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소질, 철학, 마음, 정신, 신체 등을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내려놓고 내일을 위해, 영원을 위해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만듭니다(눅 16: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됩니다.
성경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삶을 윤택하게 하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보물을 하나님께 신탁하고 하나님과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면 그 삶이 부유하고, 저 앞에 밝은 세계가 보이고 그 삶이 아름답고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복음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양들에게 cast하는 것입니다. 그가 오든 안 오든 기도하고, 메시지도 보내고, 편지도 보내고, 쪽지도 보내고, 메일도 보내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무엇을 바라지 않고 계속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안은경 사모는 매주 주일 설교문을 20여 통을 보내는데 그냥 설교문을 보내지 않고 손으로 편지를 일일이 써서 보냅니다. 3년 동안 계속 보냅니다. 어떤 분은 고맙다, 은혜를 받았다는 답도 옵니다.
우리가 사랑을 물 위에 cast하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cast하는 것은 허비가 아닙니다. 물 위에 던지는 것이 결코 허비가 아닙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반드시 단을 거두게 됩니다. 사랑은 허비가 아니라 축적됩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자기를 위해 쓴 것은 하나도 남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드린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2)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나누되 최소한 7, 8명에게 나눠주는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산다면 이는 잘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7은 완전수입니다. 돈이란 잘 벌기도 하여야 하지만 잘 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냉수 한 그릇을 내 이름으로 주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최선을 다하라(전 11:3~8).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전 11:3~4)
속담에 “떡 못하는 사람이 안반 탓하고, 일 못하는 사람이 쟁기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환경을 탓합니다. 처칠은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그다음에는 건물이 우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건축학에서는 공간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받아 윤 대통령은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이지 대통령 취임 60일도 채 안 되어 국정 수행 능력이 32%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상황을 탓하고 환경을 탓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날씨를 보니 씨뿌리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의 운세를 보니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날씨가 흐린데 어떻게 씨를 뿌리고, 비가 오려고 하는데 어떻게 곡식을 거둘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입니다. 바람 부는데 어떻게 씨를 뿌릴 수 있습니까? 비가 올 것 같은데 어떻게 추수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상식에 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상식을 찾고, 상황과 환경을 찾는 사람은 일생 아무것도 못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것을 하면 유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손익계산만 찾다가 위대한 일을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환경이 좋으면 주님께 충성하고, 봉사하겠다고 합니다. 북한을 돕자고 하면 우리도 못 먹는데 그런 빨갱이를 돕느냐고 비판합니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환경이 좋아진 때가 있었습니까? 환경이 좋아지면 뭐 하겠다고 하는 사람과 내일 하겠다는 사람은 안 하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내일 산다는 보장 있습니까? 우리는 현재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청년은 시선을 환경에 두면 되지 않습니다. 청년은 환경을 넘어서서 위의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청년의 기상입니다. 청년이 너무 이재에 밝고, 계산에 민감하면 청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숫자는 사람을 오만하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좀 어리숙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비가 올 것 같고, 바람이 불어도 씨를 뿌리고 거둘 수 있는 패기와 용기를 갖게 됩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사람은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이는 좀 손해를 보더라도 무슨 일을 추진할 수 있는 패기가 있고, 미래를 향하는 vision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지혜로운 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5~6)
바람의 길을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아이가 태 중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생명의 신비, 생명의 아름다움, 생명의 고귀함을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뜻과 목적대로 이루십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므로 해보지도 않고 된다 안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도할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에서 새싹이 나게 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큰 동풍으로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을 가르셔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모양으로 인도하실지 누구도 모릅니다. 미국 속담에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이래서 못하고, 상황이 저러니 저래서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손해 보더라도 그것이 타당하면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몸을 과감하게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젊은이의 특징이요 젊은이의 기상입니다. 그때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7~8)
‘빛’은 생명과 축복의 상징이고,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란 생의 즐김을 뜻합니다. ‘해’는 청년의 때요, ‘캄캄한 것’은 노년의 때, 죽음의 때를 말합니다. ‘즐겁다’는 것은 달콤한 삶을 말합니다. 즐거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상황을 넘어서서 몸을 던지기 바랍니다.
3. 청년의 때를 즐거워하라(전 11:9~10).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전 11:9~10)
젊음은 즐거운 것입니다. 젊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젊음은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년은 놀더라도 멋지게 놀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의 추억이 게임이나 웹툰이나 즐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방종과 향락을 경계합니다. 다시 말해 무한대한 자유를 주시지만 무한대한 책임 또한 있음을 말씀합니다.
청년은 젊기에 마음에 원하는 것과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는 비전과 꿈이 넘치는 시기인 동시에 많은 유혹을 받을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년의 때를 장미에 비유합니다. 아름다운 장미꽃 뒤에는 무서운 가시가 있듯이, 청년의 아름다움 뒤에는 무서운 유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를 조심해야 합니다. 미혹, 유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 모든 행동, 내 모든 삶의 결과는 내가 뿌린 씨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삶을 즐기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이민들을 실은 배가 목적지를 향하여 가다가 조난으로 무인도에 기착했습니다. 그 섬에서 얼마 동안 지체했습니다. 그들은 다소간의 양식이 있었기에 몇 달 동안 사는 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민 가서 심을 종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종자를 심어 가꾸게 되면 그 섬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섬에 금광이 있었습니다. 금덩어리가 굴러다니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금을 캐고 모으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금만 있으면 금덩어리가 모든 것을 다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금을 캐고 모으다가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닥쳐왔습니다. 금덩어리는 많은데 그들에게는 먹을 식량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금덩어리를 안고 굶어 죽었습니다. 금이 아무리 귀하지만 금을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강력한 우상은 돈신입니다. 재물은 원어에 ‘맘모나스’로 이는 신성화된 허욕, 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신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돈과 물질 앞에 양심을 팔고, 신앙을 팝니다. 돈 벌기에 바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돈 버는 일에 몰두하여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맘몬교에 입교한 ‘돈 신자’ 들입니다.
우리가 헌금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신앙의 문제, 곧 돈신, 맘몬신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양들을 위해 물질을 쓴다는 것은 돈신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삶의 표현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내 이름으로 등기하면 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갑니다. 잠깐 내 손에 있을 뿐입니다. 잠깐 가지고 있는 소유를 어떻게 쓰는가가 중요합니다. 소유란 남을 섬길 기회요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 주와 복음을 위해, 그리고 선행을 베푸는 데 쓰일 때 지혜로운 삶입니다. 주님 안에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섬기고 나누는 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