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마 5:27~32)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왜곡된 性, 聖스러운 性)
“간음하지 말라.”(출 20:14)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쓴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사회의 범죄가 어디에서 오는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요즘 일어나는 범죄는 그가 말한 대로 거의 돈, 섹스, 권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성 문제가 가장 심각합니다.
인기 있는 소설, 드라마, 영화의 주제는 거의 불륜을 미화하는 내용입니다. 간음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런 것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데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될 충격적인 사건을 보고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2015년에 헌법재판소는 간통은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논리로 간통죄를 합법했습니다. 울타리를 넘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울타리를 없애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판결입니다. 자유란 선악의 테두리 안에서 허용되는 것이지, 본능에 이끌려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본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면 동물농장으로 변하여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됩니다. 간통은 행위자의 인격과 삶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붕괴됩니다. 따라서 간통은 단순한 도덕적인 범죄가 아닙니다. 간통은 가정과 사회에 피해를 주므로 공법으로 금하고, 공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사회는 스스로 돌이킨 적이 없고, 결국에는 다 멸망했습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조지 언윈(George Unwin)은 86개 사회 집단을 조사한 결과 성(性)의 정절(貞節)을 지켰던 사회는 번창했고, 혼인의 성적 정절은 그 사회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징이라고 했습니다.
국민일보가 2015년 2월 25일에 행한 여론조사에서도 69.3%가 간통죄가 있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헌재는 다음날 2월 26일에 간통죄 처벌에 위헌판결을 내림으로 국민들의 윤리적 정서를 무시했습니다.
설령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 해도 간음은 죄입니다. 간통은 죄입니다. 성경은 “간음하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간통죄가 폐지된 이런 시대일수록 더욱 더 정절을 지키고 음행을 피해야 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8~20)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은 앞으로 ‘포르노피아’가 하나의 종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정황 속에서 제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현실성이 없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는 성(性)을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뜻과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왜곡되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섹스(sex)라는 단어는 ‘나눈다’, ‘분리하다’의 뜻인 섹코(seco), 섹크(Sec)에 관련된 라틴어 섹서스(Sexus)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남녀의 구분을 뜻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성(male), 여성(female)으로 구분됩니다. 이로써 동성애는 선천성이 아니라 후천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이란 섹서스(Sexus)는 라틴어로 6(six)이란 뜻입니다. 이는 천주교의 십계명 중 제6계명인 “간음하지 말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가정 보호를 위해 주셨습니다.
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성은 남자와 여자가 성인이 되어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 사이에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 성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고 인간의 욕망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이 상품화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의 본래의 목적과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개인은 물론 가정과 사회가 왜곡된 성(性)이 성스러운 성(聖)으로 바르게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바른 혼인관
성(性)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바른 혼인관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은 혼인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중요한 것은 ‘본래’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혼인을 모세의 율법에서 찾지 않고 ‘본래’에서 찾으셨습니다.
‘본래’ 가정이 어떠합니까?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행복의 동산인 에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남자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돕는 배필’이란 가장 적합한 동역자란 뜻입니다. ‘지으리라’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지를 갖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23)
하나님은 남자의 사랑 고백을 들으신 후, 혼인예식을 거행하시고 성혼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그들이 혼인한 후에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아담과 그 아내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창 2:25). 이를 볼 때 ‘본래’ 혼인이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래 혼인의 뜻이 어떠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로 이루어집니다. 요즈음 혼인하기 전에 먼저 동거해보고 혼인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을 언뜻 들어보면 그럴듯합니다. 몇 개월 신을 신발도 신어보고 사는데 일생을 살 사람인데 좀 살아보고 결정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혼인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생각입니다. 혼인은 자신의 의지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혼인은 인간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혼인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합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육체의 결합뿐만 아니라 인격과 영혼의 결합입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는 그 어떤 누구도 낄 수 없습니다.
넷째는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일부일처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몸이 나뉘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는 혼인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성 혼인은 그릇된 것입니다.
여섯째는 부모를 떠나 자립을 해야 합니다. 남녀가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면 정신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나 자립하여야 합니다.
일곱째는 혼인은 사회적인 승인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인 승인이 없이 동거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덟째는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나 각기 역할이 있습니다. 삼강오륜에서는 이를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남편은 가정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고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벧 전3:7). 여자를 귀중히 여기는 가정이나 사회는 건강한 가정이요 사회입니다.
한편 아내는 ‘바라는 배필’이 아니라 ‘돕는 배필’입니다. 잠언에 현숙한 여인을 축복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잠 31:10~12)
아내는 하나님이 남자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남자는 아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 뒤에는 반드시 여자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여자의 손을 거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손은 훌륭한 어머니이고, 또 하나는 어진 아내의 손입니다. 위대한 남자들 뒤에는 위대한 여인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무엘의 뒤에는 기도하는 한나가 있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뒤에는 기도의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고, 존 웨슬리의 뒤에 또한 기도의 어머니 수잔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자들에게 겉모양보다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를 종합한다면 혼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그런데 요즘 혼인은 어떠합니까? 상대적인 가치관으로 세속적인 욕구충족과 성적인 매혹에 이끌리어 혼인합니다. 여성의 ‘미’와 ‘가치’를 성적인 매력으로 판단합니다. 혼인의 기본 터가 무너졌습니다(시 11:3). 혼인의 진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혼인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대로 회복되고, 본래 혼인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곡된 성
우리는 보통 간음하면 육체적인 간음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육체적인 간음만을 간음죄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남녀가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제7계명은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로써 그들은 항상 자신이 의롭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곱째 계명 속에 담긴 뜻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을 천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미움을 살인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육체의 순결뿐만 아니라 마음의 순결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며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행동 이전,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동기가 악한데 행동이 선할 수가 없습니다. 종두득두(種豆得豆),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고, 종과득과(種瓜得瓜), 오이 심은 데 오이가 납니다. 뿌린 대로 거둡니다. 악한 데서 선한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예수님은 인간 내면의 악한 것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 간음, 탐욕, 속임, 음탕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은 인간의 성적인 범죄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08문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불륜을 정죄하신다. 혼인 생활과 독신 생활에서 순결하게 살고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더 나아가 영적인 간음까지도 간음죄에 포함합니다(렘 3:4).
그런데 성경은 성을 악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것입니다. 부부간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형제가 가다가 멋진 자매를 보고 ‘아, 정말 멋지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자매 또한 가다가 멋진 형제를 보고 ‘정말 멋져’라고 하는 것 죄가 아닙니다. 성욕이 없는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성욕은 식욕, 수욕과 더불어 인간의 본능입니다.
문제는 여자가 남자를 보면서, 남자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죄입니다. ‘품는다’(επιθυμἣσαι, lust after)는 것은 의지를 갖고 계속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번 보고 지나가면 되는데 뒤를 돌아서서 보고 또 보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깨끗한 마음을 갖고 본다면 수십 번을 보아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여자, 또는 남자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하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성을 대할 때 가족과 같이, 일절 깨끗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딤전 5:2).
간음은 그 뿌리가 깊어 근절되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남자만 있거나 여자만 모여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고 하였습니다. 간음은 눈으로 시작합니다. ‘본즉’으로 시작하여 손과 발이 따르고 결국 행동으로 옮겨져 불이 붙습니다.
간음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만, 이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상처로 심신이 쇠약해집니다. 무서운 질병에 걸립니다. 마음에 그늘이 생깁니다. 잔상이 남아 무슨 일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평생 죄의 종이 됩니다. 신령한 은혜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합니다. 간음은 몸 안에서 짓는 죄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고전 6:9~18). 간음은 반드시 죄의 씨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약 4:4),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집니다(계 21:8).
거룩한 성
손을 잘랐다고, 눈을 뽑았다고 간음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다면 내시들은 모두 순결하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젊다고 더 위험하고, 늙었다고 안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안 보이면 상상으로 더 많은 죄를 짓습니다. 손을 잘랐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간음 문제만큼은 누구도 안심할 수 없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간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첫째, 십자가에서 사죄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한 손에 돌을 들고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그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 중에 간음하지 아니한 사람이 있으면 돌로 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간음죄 앞에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똑같은 죄인임을 아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는 말씀이 양심을 찔러 돌멩이를 내려놓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줄행랑을 쳤습니다. 우리 또한 부정한 일은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간음한 여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간음죄를 범할 수 있고, 범한 사람들이므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면 예수님은 그를 피 묻은 손으로 끌어안으시고 모든 죄를 씻어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둘째,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성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상상으로 짓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젊은 이성들이 둘러싸여 있는 일터에서 종일 생활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려운 시험이 매일매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의 의지로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눈을 뽑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손을 잘라 버리려는 비장한 각오로 성령께 매달려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적극적인 자세로 매달리는 자를 도와주시고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하여 주십니다. 악한 생각들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도우미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매일 경건의 훈련을 연습해야 합니다. 바울은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했습니다(딤후 4:7).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매일 읽고 읊조리며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종일 말씀을 읊조리며 묵상했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다윗은 주의 말씀을 사랑하였으므로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담고 종일 즐거워하고 묵상하였습니다. 다윗이 그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말씀이 그를 지혜롭게 하여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였나이다.”(시 119:98)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는 것이 마음을 지키는 비밀입니다. 그리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 일에 시간과 돈을 투지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지성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 성령께서 마음에 파고드는 음욕을 끊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을 지켜주십니다.
셋째, 죄악된 환경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의 소욕은 활화산과 같아서 불을 가지고 기름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잠언 6:27~28). 특히 젊은 시절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시기이지만, 동시에 죄의 유혹을 받아 무한히 타락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장미꽃은 아름답지만, 뒤에는 진드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순간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 몹쓸 사람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를 고민하다가 해답을 얻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따라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바울은 말씀합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청년의 때 정욕을 이기려면 과감하게 환경을 바꾸고 주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어느 날 다윗이 오후에 예루살렘이 한눈에 보이는 옥상에 올라가서 예루살렘 시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때는 추한 것도 아름답게 보이는 석양이었습니다. 그때 멀리에서 한 여자가 누가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람이 안 보이자 옷을 벗고 몸을 씻었습니다. 황혼에 비친 젊은 여성의 몸매는 매혹적이었습니다. 먼 거리에서 보니 더 매혹적으로 보였습니다. 다윗이 아무리 왕이지만 그 여자는 금단의 영역, 금단의 성(城)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을 빨리 돌리고 그 자리에서 떠나 궁으로 들어와 ‘어, 못 볼 것을 봤네’ 하며 눈을 씻어야 했습니다. 환경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더는 생각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점점 안 될 자리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다윗은 이미 마음으로 간음했습니다. 행동만 남았을 뿐입니다. 음욕을 품었을 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윗은 그의 생애에 가장 치명적인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서 떠났습니다. 어느 날 보디발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며 아양을 떨었습니다. 여자는 끈질기게 날마다 유혹했습니다(창 39:10). 그러나 요셉은 여인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고 처음부터 멀리했습니다. 더 나아가 요셉은 유혹을 과감하게 물리쳤습니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8~9)
요셉은 주인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온몸으로 죄를 거부하였습니다.
우리는 간음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고 단호하게 끊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문단속을 철저히 하지 않습니까?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문을 잠그고도 행여나 문이 열렸나 하고 다시 확인하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문 열어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세상이 험하여 가져갈 것은 쓰레기밖에 없을지라도 문단속을 철저히 합니다. 이제 우리는 집의 문단속으로 끝나지 말고 마음의 문단속까지도 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죄에 빈틈을 주지 않도록 수비를 잘 해야 합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4:23전, 16:32)
우리 몸은 성령의 거룩한 전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전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피의 은혜와 성령을 의지하여 음행을 피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을 성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8~20)
♬너 성결키 위해 늘 기도하며 너 주 안에 있어 늘 성경보고 온 형제들 함께 늘 사귀면서 일하기 전마다 너 기도하라♬(새찬송가 4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