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16(엡 4:24~25; 골 3:9~10)
제9계명-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 가운데 늑대와 소년 이야기가 있습니다. 늑대가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을 속여 놀라게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것이 재미가 있어 또 거짓말로 늑대가 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또 한 번 대소동을 벌였습니다. 이제 진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놀란 소년은 고함을 지르고 울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를 믿는 사람이 없어 결국 늑대에게 해를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더 나쁩니까? 도둑질이 더 나쁩니까?” 물으면 도둑질이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도둑질은 다른 사람에게 직접 피해를 주지만, 거짓말은 직접으로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보다 먼저 나오므로 더 중요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둑질보다 거짓말이 더 나쁩니다. 도둑질한 물건은 다시 돌려주고 배상해 주면 됩니다. 그러나 거짓말로 인한 상처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간음죄와 도둑질에 대해서는 회개합니다. 그런데 제9계명에 대해서는 별로 회개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우리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거짓말한 것을 심각하게 회개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짓말하는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으니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신뢰할 수 없으니 마음을 터놓고 사귈 수 없고, 마음을 터놓고 사귈 수 없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거짓말합니다. 오히려 거짓말을 삶의 전술과 전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거짓말을 섞어 정치하고 목회도 합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이런 사람과 사회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무서운 사회는 거짓말의 사회입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정부나 부부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뢰를 잃어버린 목사나 교인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지옥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거짓말에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거짓 유혹에 빠져 하나님과 등졌습니다. 이후로 인간은 언제나 거짓말의 위험과 유혹 속에서 살아갑니다.
클라우디아 마이어(Claudia Meyer)는 《거짓말의 딜레마》에서 “사람들은 진실을 원하지만, 오히려 진실을 사양한다”고 했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사람들이 하루에 거짓말을 얼마나 하고, 거짓말을 많이 하는 시기와 언제부터 거짓말을 하는가를 알아보았는데, 사람들은 하루 평균 2.19번 거짓말을 하고, 10대가 평균 2.8회로 가장 많이 하고, 보통 3세 전후에 거짓말을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2017년에 교육방송(EBS)에서 “거짓말”이라는 기획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하루 평균 3번의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늦으면 길이 막혔다거나, 받기 싫은 전화나 곤란한 전화가 오면 회의 중이라고 문자를 보내어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거짓말을 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거짓말이 보편화 된 불신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말과 행동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과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말 한마디가 보증수표가 되는 진실한 사회, 신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말이란?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제77문에서 ‘제9계명의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피차간의 진실함과 우리 자신과 이웃의 명예를 유지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고 했습니다(슥 8:16; 벧전 3:16; 요삼 12절; 잠 14:5, 25; 엡 4:15). 그리고 제78문에서 ‘제9계명이 금하는 것은 진실함에 해롭고, 이웃의 명예를 상하게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잠 19:5, 9:16~19; 눅 3:14; 시 15:3; 골 3:9; 고후 8:20~21).
그렇다면 거짓 증거의 반대는 진실함과 신실함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 증거입니다. 그런데 거짓 증거에는 선의의 하얀 거짓말과 새빨간 악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직업상 불가불 하얀 거짓말을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사 선생은 말기 암 환자를 진단하고 난 뒤에 어떻게 말합니까? “당신은 암 말기입니다. 몇 달 후에 죽을 테니까 가서 죽을 준비하세요.” 하는 의사 선생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가셔서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요양을 잘하시면 건강이 회복될 것입니다”라고 하지 않을까요?
이런 거짓말은 분명 거짓말이지만 악의가 있는 거짓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무엇이 거짓이냐를 물으려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선”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애굽 바로왕은 산파들에게 이스라엘 여인들의 아이를 받다가 남자아이면 모두 죽이라는 영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는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남자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에게 “히브리 여인들은 건강해서 산파인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들을 다 낳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혜를 옳게 보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Rahab)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여리고 경찰이 와서 이 집에 분명 이스라엘 정탐꾼이 들어왔다고 다그쳤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이 왔다가 이미 떠났다고 시치미를 뗐습니다(수 2:1~14). 성경은 라합은 거짓말을 했다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명예로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살린 산파들이나 정탐꾼을 보호해 준 라합이 거짓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새하얀 거짓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새빨간 거짓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증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위증은 큰 죄입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나쁩니다. 유대 속담에 “칼로 상처를 입힌 것은 시간이 가면 치유가 되지만, 혀로 입힌 상처는 한평생 치유가 안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상처를 받는 경우를 보면 몸싸움보다는 혀로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몸싸움의 전 단계가 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출 23:1)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거짓말을 커피 마시듯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 참말인지조차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서민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전세 사기범들입니다.
국제투명성기구(T.I.)의 통계를 보면, 2022년의 한국 부패지수가 100점 만점에 63점으로, 180개 국가 중 31위, OECD 국가 38개국 중에 22위입니다. 공직사회와 경제활동에 관련된 점수가 낮습니다. 우리나라가 외형으로는 선진국입니다. 그런데 신뢰 지수는 여전히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가 신뢰 지수를 높여 외적으로 내적으로 선진국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은 다른 죄보다 쉽게 노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나와 너와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잠 30:8상)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
첫째, 거짓말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했습니다. 시편 5편 6절은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신다”고 했습니다. 잠언 20장 10절에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measures)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새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4~25)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옛사람의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거짓된 말과 거짓된 행동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거짓을 버리고 참된 말과 참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셋째, 거짓은 항상 또 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거짓말은 눈덩이와 같아서 굴리면 굴릴수록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이 참말인 것처럼 합리화하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합니다. 또 그 거짓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로 사람을 속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잠시 한두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영원히 모든 사람을 속이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속이고 감추고 감춰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실상을 반드시 다 드러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십니다(시 33:4).
요즘 가짜가 판을 칩니다. 가짜 뉴스, 가짜 브랜드, 가짜 스펙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십니다(시편 25:8). 따라서 우리는 정직한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넷째, 거짓말은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인간관계를 지탱해주는 뿌리는 신뢰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사귐도 깨집니다. 거짓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친구 관계 등 모든 신뢰 관계를 깨뜨립니다. 거짓은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친구 되기를 원하면, 사회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면 거짓을 버리고 진실해야 합니다.
다섯째, 거짓말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고, 거짓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 (Ananias)와 삽비라(Sapphira)가 나옵니다. 그들은 밭을 팔아 헌금할 만한 믿음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팔아 일부를 감추고 헌금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한 것을 알고 왜 성령을 속이고 얼마를 감추었느냐 물었습니다. 그들은 사실대로 말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를 드렸다고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삽비라와 아나니아를 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한 푼도 안 사람보다 낫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의 기초를 놓는 때입니다. 이런 중요한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교회에 거짓이 들어오면 사회가 교회를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없게 됩니다. 교회가 거짓을 용납하면 교회는 도덕적인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나타내고 인정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의 섬김과 봉사는 순수해야지 위선적이면 안 됩니다. 거짓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릅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밖에 있으리라.”(계 22:15)
그러면 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합니까? 왜 사람들이 거짓 증언을 합니까? 첫째는 타락한 본성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타락한 본성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 존경을 받는 것, 칭찬을 받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런 것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거짓으로 위증하여 남을 해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했을 때, 자기에게 오는 책임과 비난, 수치, 무시당함과 따돌림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거짓말하고, 과장된 hollywood action을 취합니다.
둘째는 허영과 이기심, 시기심 때문입니다. 거짓말의 밑바닥에는 항상 허영, 헛된 영광, 자신을 드러내고, 잘난 척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특히 예비역들은 군 이야기를 할 때 본인이 가장 훈련을 많이 받은 강군이라고 과장을 섞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이기심이 거짓말의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셋째는 사탄의 흉악한 계략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했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로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어떻게 거짓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첫째, 거짓말이 죄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찮은 거짓말도 죄입니다. 거짓말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의 경중을 따라 심판하지 않고 똑같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무거운 죄로 여겨야 합니다. 그럴 때 거짓이 없는 신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혀를 통제해야 합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사람이 여러 종류의 짐승을 길들일 수 있으나 혀는 능히 길들일 수 없습니다. 내가 잠깐만 방심하면 혀는 그 순간 제멋대로 놀아납니다. 그러나 그 혀도 통제된 때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성령에 사로잡혔을 때, 각종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면 성령께서 입을 통치하도록 구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거짓과 악독이 가득한 우리의 혀를 통제하여 하나님을 증언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고, 덕을 세우는 혀로 만들어 주십니다.
셋째, 인격이 성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고 말씀하셨습니다. 혀는 정신과 영적 건강의 check list, 리트머스 종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혀는 육체의 건강 체크 리스트이기도 합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이 가장 먼저 혀의 상태를 보지 않습니까?
거친 사람들은 항상 거친 말을 합니다. 무례한 사람들은 무례한 말을 합니다. 잔악한 사람들은 잔악한 말을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교만한 말을 합니다. 인격적인 사람은 인격적인 말을 하고, 겸손한 사람은 겸손한 말을 합니다. 내면에 깊은 사고와 가치를 지닌 사람은 사려 깊은 말과 가치 있는 말을 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사고이자 인격입니다. 그 사람의 언어습관과 말을 살펴보면 그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이 성숙하면 거짓이 사라지고 신실한 말을 하게 됩니다.
넷째, 언어를 훈련해야 합니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후)
선생은 입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은 태생적으로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가 실수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사실은,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고 좋은 것인데, 배우려고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가르치는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그것이 더 잘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은 남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도는 남도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정도는 남도 느낍니다. 내가 가르치려고 하면 사람들은 속으로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잘난 척하지 말고 아는 체하지 말라. 네가 아는 것,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건 상식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약 1:19)고 했습니다.
언어는 상호 의사소통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말로 피해를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우리가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대인은 사상을 이야기하고, 범인은 가십을 이야기하고, 소인배는 남의 이야기를 한다.” 대부분이 범인이고 소인배이므로 가십(gossip)과 남에 대한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성경을 많이 알고 공부하니 소인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소인배 같은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짓말하고, 남의 허물을 침소봉대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남을 비판합니까? 예수님은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 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4~5)
사람은 흔히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허물은 잘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바울은 어떤 사람의 잘못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다른 이에게 옮기지 말고 조용히 그 사람과 마주 앉아서 바로잡아 주고 자신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남의 허물과 거짓말하는 사람의 배후에는 심리적으로 열등감과 시기심과 교만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듣기 좋아하는 것도 거짓말의 공범입니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면 졸다가도 남의 추문을 말하면 정신을 가다듬고 듣는 정도가 아니라 경청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바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라.”(잠 12:19)고 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국민회의(Korea National Assembly) 회장으로 미국 여러 지방을 순회하기 위해 기차를 타기 위해 정거장에 나왔을 때였습니다. 한 간부가 “이번 여행에 경비가 모자라 한국 목사님의 신분증을 빌려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목사 행세를 하시면 철도운임을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라며 목사님 신분증을 내밀었습니다.
도산 선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하다가 들키면 나의 신용도 떨어지고, 목사의 신용도 떨어지며, 우리나라의 신용도 떨어질 것이니 그럴 수 없소. 경비가 모자라면 조금 더 장만해서 며칠 후에 떠나도록 합시다.” 도산 선생은 자신과 목사의 신용도 신용이지만 신용 사회인 미국에서 대한의 신용도가 떨어지는 것을 먼저 걱정했습니다.
혼인 대상의 첫 번째 조건은 인물보다 정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뽑을 때도 능력보다는 정직한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신 6:18~19; 시 11:7; 잠 12:19,22; 잠 14:11).
우리는 누구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마귀 자식입니까? 우리가 진실을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이고, 거짓을 말하면 마귀 자식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깨끗하면 상한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고, 약한 사람을 튼튼하게 세울 수 있고,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룰 수 있고, 불신 사회에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하기 전에 이 말을 주님께서 들으시면 어떻게 여기실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 말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을 주님께서 들으셔도 부끄럽지 않고, 주님께서 열납될 수 있는가를 마음에 두고 말을 하게 되면 말에 실수가 없게 됩니다. 말에 실수가 없어야 온전한 사람입니다(약 3:2).
우리는 거짓이 난무하는 불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거짓이 없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불신 사회가 신용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진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하는 향기로운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복음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