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17(약 1:15)
제10계명-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자고새는 다른 새의 알을 훔쳐다가 품는 습성이 있습니다. 한편 뻐꾸기는 둥지를 만들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탁란의 새입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제 둥지인 양 본래 둥지의 주인인 알을 밀어내어 떨어뜨리고 집을 차지하는 아주 못된 새입니다.
제8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과 제10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서로 겹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도둑질은 행위와 관련되어 있고, 탐욕은 마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5계명에서 제9계명까지는 행동에 관한 계명이라면, 제10계명의 “탐심하지 말라”는 계명은 마음에 관한 것으로 행동 이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살도록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이 거룩하고 순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행위에 대해 말씀을 하신 후, 이제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의 생각과 동기와 태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마음은 생각과 말과 행동과 생명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생각이 동기를 유발시키고 행동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계명으로 인간의 근원을 다스리는 “탐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은 자기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탐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도둑질하고 거짓말을 합니까? 자기 것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80문에 제10계명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형편에 만족하며 이웃과 그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의롭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다.”(히 13:5; 딤전 6:6; 욥 31:29; 롬 12:15; 고전 13:4~7).
그리고 제81문에 제10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산업에 대한 모든 불만족, 이웃의 유익을 시기하고 배 아파하는 것, 이웃에게 속한 것에 대해 부당한 행동과 감정을 갖는 것이다.”(고전 10:10; 갈 5:26; 골 3:5)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의 근원은 자기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약 1:15). 그런데 탐심은 보편화되어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탐심’이 죄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마음속에 있는 탐심을 회개하고 자족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탐심이란?
‘탐심’과 ‘욕망’은 다릅니다. 욕망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탐심은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해 그릇된 소유욕을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소유에 대한 본능을 제어하지 못할 때 탐심이 됩니다. ‘탐심’(πλεονεξια)은 헬라어로 ‘움켜쥐다’는 뜻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탐심이란 충족된 상태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있는 것 중에 더 있기를 원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소유를 탐하되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탐심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만연되고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포함됩니다. 탐심은 태어나서 생긴 것이 아니라 가지고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먹을 쥐고 태어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라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탐심은 들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이 획득하는 정보의 95%가 시각으로 얻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눈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았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그런 그가 거짓의 아비 사탄의 미혹을 받아 탐심의 눈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의 열매로 다가왔습니다(창 3:6). 그래서 예수님은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마 6:22). 탐심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족하는 마음(딤전 6:6~8), 안분지족(安分知足), 자기 분수를 알아 탐하지 말고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탐심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 탐심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이다.
사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만 사냥합니다. 사자는 쌓아 놓기 위해 사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먹을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쌓아놓습니다. 냉장고에 저장합니다. 온장고에 보관합니다. 포를 떠서 소금에 절여 말립니다. 그것뿐입니까? 진공으로 통조림에 보관합니다.
그런데 탐욕은 인간을 좀 더 높은 데로 이끌어가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조금 더 갖고자 하는 욕구,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욕구, 남보다 더 빨리 가고자 하는 욕구, 이런 욕구는 일을 더 열심히 하는 에너지의 분출구가 됩니다. 욕구가 있을 때 뭔가를 할 수 있고, 뭔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취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욕구는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고, 성취감을 가져다주고, 문명의 발전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좀 더 더 갖자, 좀 더 더 앞서가자, 좀 더 더 올라가자.”는 끝없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겨질 때 탐욕이 되어 개인은 물론 가정과 사회가 망가집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파홈은 가난한 바시키르 마을에서 살고 있던 중에 굉장히 넓은 땅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1,000루블만 내고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점에 돌아오면 자신이 밟은 땅을 모두 차지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거래는 무효였습니다.
다음 날 파홈은 동이 트자마자 신이 나서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점심이 지나 돌아올 지점을 통과했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눈앞에는 더욱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파홈은 죽을 힘을 다해 출발점으로 달려갔습니다. 해가 지기 직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출발점에 도착했지만, 그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 가슴을 쥐고 피를 토한 채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시키르 사람들은 땅을 파서 파홈을 묻어주며 고백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땅 2㎡이면 넉넉하구먼!”
파홈이 톨스토이 작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것을 얻고도,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사납게 살다가 좋은 일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어느 날 ‘한 평’이 기다리는 무덤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봅니다. 욕심이 가득하면 ‘한 평’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돌아가야 하는 인생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한 평’만을 위해 일생을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둘째, 탐심은 죄의 근원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탐심은 죄의 근원입니다(약 1:15). 신문 사회면을 뒤덮고 있는 모든 사건의 뒤에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남의 재산을 탐하는 탐욕, 권력을 탐하는 탐욕, 여색을 탐하는 탐욕입니다. 각종 추문이 있는 곳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탐심 때문에 도둑질하고, 탐심 때문에 거짓말하고, 탐심 때문에 간음하고, 탐심 때문에 싸우고, 탐심 때문에 사람을 죽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다’는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죄를 낳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욕망에 속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약 1:16). 죄의 원천은 욕심입니다. 죄는 장성하여 결국 그 최후는 사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말려들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이 땅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결국 이 세상을 공동묘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이를 기초로 매슬로우는 다섯 단계의 욕구이론을 전개했습니다. 만일 사람에게 욕구가 없다면 메마르고 역동성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 욕구를 어떻게 절제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자동차는 3요소, 구동, 제동, 조향입니다. 자동차가 구동만 있고 제동 기능이 없으면 움직이는 흉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욕망을 제어할 원리가 없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는 파멸에 이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원리인 성경 말씀으로 욕구를 제어해야 합니다.
시인 단테는 “탐욕은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원수다”라고 했습니다. 억 만 장자 카네기는 “돈이란 우상보다 사람을 더 타락시키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자제하고 절제하고 제어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 중의 마지막이 절제입니다. 이는 절제가 성령의 열매를 뒷받침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성군 다윗이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는 범죄가 나옵니다. 그 원인은 탐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의 탐욕은 제6계명에서 제9계명을 어기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탐심과 건강한 욕구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플 때 먹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먹고 싶은 욕망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식탐은 죄입니다.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이 되어 잠을 자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게으름은 죄입니다. 청년이 자매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멈추지 않고 계속 정욕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은 죄입니다. 무엇을 소유하고자 집착하고, 고착하고, 도착하는 것은 죄입니다. 성경은 욕심이 죄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전리품을 취하지 말도록 했습니다(수 6:18). 그러나 아간(Achan)은 노략질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2.28㎏)과, 오십 세겔(570g)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하여 취했습니다. 아간의 탐심은 급기야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참패하는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아간을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게 했고, 그 모든 탐욕으로 취한 물건과 함께 불태워졌습니다.
셋째,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후)
사람에게 한 번 탐심이 일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것에 집착합니다. 집착은 죄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 숭배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탐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탐심의 올무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탐심의 종류
사람에게 탐심의 대상은 각양각색입니다. 그 대상에 따라 탐심의 종류를 분류해 본다면 우선 돈, 물질의 탐욕이 있습니다. 성의 탐욕이 있습니다.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성적인 타락상이 더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미모에 대한 탐심이 있습니다. 요즈음 살 빼기 경쟁이라도 하듯이 인하대역 주변에 “뼈만 빼고 다 빼준다는 광고”가 걸려 있습니다.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살을 빼어 날씬한 몸매를 갖고자 합니다. 성형외과가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한국이 세계에서 색조 화장을 제일 많이 합니다. 물론 예뻐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그러나 영어 격언에 “Beauty only is skin deep.”(아름다움이란 단지 얼굴 표피 두께 만큼밖에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외모를 단장하려 하지 말고, 내면을 단장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머리를 꾸미며 금붙이를 달거나 옷을 차려 입거나 하여 겉치장을 하지 말고, 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벧전 3:3~4, 새번역)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면 사람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사십 이전의 아름다움은 주어진 아름다움이다. 그건 어찌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도 나이가 들면 퇴색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퇴색된 후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은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다.”
테레사(Teresa) 수녀의 깊게 파인 주름살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마음이 아름답고, 삶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탐심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심술보가 붙어 있는 추물이 되지 말고 곱게 늙어가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탐심은 보이는 것에 대한 탐심이 있는 반면에 보이지 않는 탐심도 있습니다. 명예에 대한 탐심, 권세에 대한 탐심, 헛된 지식에 대한 탐심, 일류와 최고만을 추구하는 일류와 최고에 대한 탐심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것들을 탐하여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그런 것들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파멸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성향을 잘 아시고 “네 이웃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3~15절을 보면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생님, 내 형에게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모세의 율법(신 21:17)에 상속할 때 장자에게는 모든 소유에서 두 몫을, 동생에게는 한 몫을 주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형이 동생의 몫까지 차지하고 한 푼도 주지 않습니다. 제가 ‘형님, 이럴 수 있습니까?’ 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로써 우애가 하루아침에 깨졌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로 재산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말을 다 듣고 그 중심을 아신 후, 그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인생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했습니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죽으면 다 놓고 빈손으로 가는구나, 이제 보람이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재산 중에 얼마가 내게 돌아올 것인가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보라, 탐심에서 자신을 지키라(KJV).”(눅 12:15전)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생명이 소유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각종 보험과 각종 증권과 각종 부동산 투기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멸망해 가는 오늘을 위해 재물을 쌓아두었습니다. 그는 소출이 풍성해지자 흥분하여 외쳤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놓으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눅 12:16~21)
그는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무조건 쌓고 쌓아두었습니다. 그는 벌어 놓은 것을 선한 일에 한 번도 써 보지 못하고 그날 밤에 급성 심정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눅 12:20~21). 그의 문제는 자신을 위해 쌓을 줄만 알았지,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삶의 원리를 몰랐습니다.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다가 많은 사람이 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소는 한 번 빠진 웅덩이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소보다도 어리석어서 탐심이 멸망의 길임을 알면서도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그 길을 갑니다. 노자는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 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탐심의 길에서 돌이켜야 평강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탐심을 극복하는 길
첫째, 바른 눈,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탐심은 들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이미 언급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람의 성향과 가치관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우리의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게 되고,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둡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바로 볼 줄 아는 눈,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눈’, ‘바른 가치관’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 나를 지배할 때, 바른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잘못된 가치관을 바르게 세워지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때 바른 눈, 바른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둘째, 절제해야 한다.
절제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갈 5:22). 절제는 성도의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벧후 1:6). 따라서 성도는 모든 것에 절제해야 합니다. 욕심과 감정에 끌리지 않도록 절제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호기심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절제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고 했습니다. 바울은 운동선수가 절제하고 자기관리를 하여야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성도도 신앙생활이라는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철저하게 절제해야 썩지 않는 승리의 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본주의 특징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를 성공의 척도로 생각합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최신, 최고의 상품을 구입하는 것을 성공한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해 최신의 것, 최고의 것, 가장 큰 것을 삽니다. 이런 자본주의는 천민자본주의입니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을 쓰기 전, 1759년에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썼습니다. 자본주의는 도덕의 가치 위에 세워야 합니다. 도덕의 가치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섬기기 위해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금욕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절제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탐심은 절대군주와 같아서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탐심을 억누르고 절제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만이 탐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삭개오(Zacchaeus)는 물질에 대한 탐심에 붙잡혀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의 것을 토색하여 자신의 저금통장에 집어넣는 즐거움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변화되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보다 가난한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불의하게 토색했던 죄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다 빈치는 예수님을 닮은 얼굴을 찾아 나섰다가, 시골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소년의 순수하고 평안한 모습을 보면서 그를 모델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는 몇 년 후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아 나섰다가, 길에서 술에 취해 잠자고 있는 술주정뱅이 얼굴을 유다의 모델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탐욕스럽고 일그러지고 야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주정뱅이가 깨어 한 마디 내뱉습니다. “당신이 예수의 얼굴을 그릴 때도 내가 모델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사람이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얼굴 모양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가졌던 성가대 소년이 유다의 모습으로 변했듯이,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모습이 변합니다. 풍경이 변해야 계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바뀌어야 풍경이 변합니다. 얼굴이 변해야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해야 얼굴이 바뀝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내 얼굴이 변하고 삶이 변하고 성품과 인품이 변합니다. 절제의 덕목을 갖게 됩니다.
셋째, 주는 생활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9복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실천했습니다. 그는 범사에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텐트를 만드는 자비량 선교사가 되어 본인 것뿐만 아니라 자기와 동행하는 이들의 생활비까지 충당했습니다. 그는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러면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될까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강줄기의 끝은 바다로 이어집니다. 강물은 흘러가면서 주변을 옥토로 만들고 많은 생물을 살리고 바다로 들어갑니다. 한강은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주변을 옥토로 만들고 2,000만 명을 살리고 서해로 흘러갑니다. 이스라엘의 요단 강(Jordan River)은 헬몬 산(Mt. Hermon)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만들고, 갈릴리 호수는 다시 사해(Dead Sea)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사해는 물을 밖으로 흘러 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해를 죽음의 바다라고 합니다. 반면에 갈릴리 호수는 물을 받아서 밖으로 흘러 보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젖줄이 되고, 각종 물고기가 서식하며, 주변이 초원을 이룹니다.
우리가 받기만 하고 주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사해와 같이 죽은 바다가 됩니다. 반면에 갈릴리와 같이 베풀고 나눠주는 생활을 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산술로 생각하면 주는 생활은 당장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2-1’은 분명 1입니다. 그러나 주는 생활은 ‘2-1=1+a’입니다. 주는 생활은 초등학교 산술의 삶이 아니라 고등 수학의 삶입니다.
주는 생활은 마치 샘과 같습니다. 샘에서 샘물을 떠내면 떠낼수록 계속 맑은 물이 고입니다. 주는 삶은 엄마의 사랑의 젖과 같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젖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기가 젖을 빨지 않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는 생활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씨를 많이 뿌리면 거둘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고 돕는 것을 돈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는 생활이란 돈만이 아닙니다. 내게 돈이 없으면 내가 가진 은사나 재능, 노동, 그리고 따뜻한 마음 한 자락과 아름다운 미소를 이웃과 나누는 것도 아름다운 기부입니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지만, 베풀고 나누는 것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도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습니다. 돈 없이도 베풀 수 있는 ‘무재칠시’(無財七施)가 있습니다.
첫째로 화안시(和顔施)입니다. 부드러운 얼굴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아침을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하는 사람은 하루가 좋고, 하루를 좋은 얼굴로 사는 사람은 인생이 펴게 됩니다. 얼굴 성형을 하는 것은 돈과 위험부담이 있지만 자기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 것은 마음의 선택으로도 가능합니다.
둘째로 언시(言施)입니다. 좋은 말씨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좋은 말씨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말을 잘못하면 칼이 되고, 말을 잘 쓰면 천 냥 빚도 갚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품격입니다. ‘품’(品)자는 입 구(口)자가 세 개 모인 것이다. 입에서 품격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심시(心施)입니다. 마음가짐을 좋게 해 베풀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내가 먼저 선한 마음을 보내면 상대도 나를 편안하게 해줍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온도계대로 상대를 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평정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넷째로 안시(眼施)입니다. 좋은 눈빛으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눈빛을 바로 하는 것이 수양의 첫걸음이자 사랑을 대하는 기본이라고 했습니다. 어른을 대할 때, 자녀를 대할 때, 아내와 남편을 대할 때, 그리고 상사와 동료를 대할 때, 또 아랫사람을 대할 때 좋은 눈빛이면 만사가 평화롭습니다. ‘좋은 눈빛’은 곧 좋은 메시지입니다.
다섯째로 신시(身施)입니다. 몸으로 남의 짐을 들어주고, 수레를 밀어주고, 넘어진 사람 일으켜 주는 등 몸으로 남을 돕는 것을 뜻합니다.
여섯째로 좌시(坐施)입니다. 노약자, 임신부,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앉을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찰시(察施)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살펴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시경에 녹명(鹿鳴)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녹명’이란 사슴의 우는 소리를 말합니다. 사슴은 다른 동물과 달리 먹이를 보면 큰 소리로 울어서 동료 사슴을 불러 함께 먹습니다. 그래서 빈객을 초대하여 베푸는 잔치를 녹명이라고 합니다. 나누고 베풀고 배려할 때 행복하게 됩니다. 삶이 풍요롭습니다.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의 “하버드대학교 인생 성장 보고서”를 보면, 남을 돕는 사람이 금연이나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주는 생활은 삶을 윤택하게 하고 부유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주는 자에게 헤아리는 것 이상,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 6:38).
넷째,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바울은 자신의 삶에 자족했습니다. 그는 풍부한 데 처할 줄도 알고, 빈곤한 데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자족’이란 조건과 환경과 상황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고 했습니다(딤전 6:5~6).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족한 줄을 알면 즐거워할 수 있고,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만 더한다.”(知足可樂 無貪卽憂)고 했습니다. ‘안분낙도’(安分樂道), 재화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인생을 평안히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불만 대신에 자족해야 합니다. 족함을 모르는 것은 병 중의 큰 병이고,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입니다. 반면에 족함은 심신이 온전할 수 있는 근간이요, 최고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탐심은 모든 행동의 원인이 됩니다. 탐심을 물리치려면 절제하고 주는 생활,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자족할 때 바른 소유,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잎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 하네 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복음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