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긍정심리 펴내며

 

요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나누는 화두는 행복이다. 그래서 필립 반 보슈는 행복에 관한 10

가지 철학적인 성찰에서 인간의 모든 사람은 행복이란 목적을 향해 있다.”고 했다. 이처럼 행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요 궁극적 가치이다. 요즘 행복이란 단어를 삶의 질, 혹은웰빙( well being)’ 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날이 갈수록 물질과 기술의 거인이 되어 가지만 도덕과 윤리는 점점 난쟁이가 되어 간다. 2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간다.

 

일찍이 헬라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 그리고 영국의 러셀 등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저마다 행복론을 설파했다. 밀턴은 실낙원을 썼고 말년에 복락원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인간의 행복의 추구를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성경 창세기 3장에서 에덴 동산을 상실한 이후로부터일 것이다. 실낙원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첫 음성은네가 어디 있느냐”(3:9)였다. 행복의 추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왜 행복이 필요할까? 첫째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행복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갈망하는 목표이자 궁극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10)로 규정하고 있다. 행복 추구는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이다.

 

우리나라 헌법뿐만 아니라 미국독립선언문에도 행복의 추구권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그리고 세계보건기구( WHO )에서도건강이란 단지 질병에 걸리거나 허약하지 않은 상태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양호한 상태(well-being)” 라고 했다.

 

굳이 법 조항을 들지 않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따라서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국가와 정부는 국민들의 행복 수준을 높이기 위해 삶의 질(웰빙)’의 향상이라는 목표 아래 각종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여 행복 추구의 보장이라는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행복의 개념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그 개념 속에는 삶 속에서 느끼는 만족도라는 질

적인 성격이 포함된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이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요인은 경제적인 소득

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문화와 환경, 신체적 또는 인구학, 제도와 소속된 집단의 가치 기준

등에 의해 매우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세계 10위권에 들고 있다.

에 비해 행복지수는 OECD 36 개국 중의 27위로 현저히 낮다( 2013).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24일 공개한 ‘2014년 세계 웰빙지수에 따르면, 한국인이 느

끼는삶의 질 만족도2013년에 세계 145개국 가운데 42단계나 추락하면서 거의 최하위

권인 117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장기 내전 중인 이라크가 12.1%102, 기니는

 

9.4%116위보다 낮은 수치다. 최하위인 145위는 오랜 내전에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이었

. 항목별로 보면 인생목표 96, 사회관계 112, 경제상황 53, 공동체 113, 건강 138

위를 기록했다. 경제상황만 간신히 중위권을 유지했을 뿐, 나머지는 세계 최하위권으로 추락한 셈이다. 3 어린이 행복지수 또한 공부의 양은 1위이지만 살아가는 능력은 최하위이다(2011). 왜 이런 형상이 일어날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남북분단으로 인한 적대적 이데올로기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남북분단은 민족의 단절과 고통을 가져다주고 쌍방체제와 극단적 대결을 초래하여 동족간에 반목과 불신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4 그리고 한해 우리나라의 국방비가 344억 달러(36)에 이른다. 5 서울시의 2014년 예산이 24.5조 원인데, 무려 1,000만 명의 서울시 예산의 1.5배의 예산이 국방비로 지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공공복지사업이나 국가경제의 발전의 저해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남북분단은 여러 모양으로 긍정지수를 높이는 데 부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긍정지수는 행복지수와 비례한다. 남북분단은 상호 간의 불신과 대립의 각을 세운다. 필자의 초··고등교육은 반공을 국시의 제 1로 살았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섬뜩한 구호를 외치곤 했다. “쳐부수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지금은 이전의 반공교육보다는 평화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교육환경과 사회 환경은 변한 것이 없다.

 

남북분단은 교육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남북분단은 모든 판단을 2분법의 잣대로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그 근저에는 미움과 쟁투, 보복과 복수, 그리고 발음도 경음화 현상을 넘어서 살벌하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를 사회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로 접근하여 진보를 좌경빨갱이, 종북으로 매도하고, 보수를 보수꼴통, 종미라고 정죄한다. 복지조차도 단순히 나눔을 넘어서서 종북과 좌경이라고 매도한다. 이 모든 근저에는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이 자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의견과 맞지 않는다 싶으면 좌경빨갱이, 보수꼴통이라고 정죄한다.

 

그러면 북한은 어떠한가? 그들은 지금도 미국을 철천지원수, 남한을 미제국주의 식민지라고 매도하며 적대적 반미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핵으로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겁박한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에게 내적 가치를 추구하는 행복은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나라가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보수와 진보를 이념의 잣대로 판단하는 2분법의 사고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옳고 그름의 잣대에서 같음과 다름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어느 사회나 보수와 진보는 존재한다. 보수와 진보는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고, 양축의 바퀴와 같다. 새의 날개가 균형을 갖추지 않으면 날 수가 없고, 양축의 바퀴가 균형이 깨지게 되면 굴러갈 수 없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보와 보수가 상호 존중될 때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행복지수가 높은 서구사회, 스웨덴과 핀란드를 보면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고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현 시점에 대해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는 6·25라는 참혹한 동족상쟁의 비극을 경험했다. 6·25전쟁의 피해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남한의 인명피해 중 사망자는 군인이 147,000, 민간인은 244,0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사망자 수는 군인이 294,000여 명, 민간인은 406,000명으로, 남북한 군인을 포합한 사망자가 약 44만 명, 민간인 사망자 수는 약 65만 명이나 된다.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추정한 다. 이들 중에는 전쟁기간에 폭격이나 사고 등에 의한 사망자가 아니다. 학살과 피살로 숨진 민간인만도 남한에서만 적어도 10만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6 이런 비극을 겪은 우리 심중에는 깊은 한과 분노와 복수심이 깔려 있다. 이런 분노와 복수심과 미움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남북분단은 군사적인 대치로 인한 자원의 분할로 막대한 민족의 역량이 손실되고 있다. 그리고 민족의 동질성이 훼손되며, 민족사의 방향이 왜곡 변질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옳은 일일까? 말 한 마리가 각자 있는 힘을 다해 물건을 끌면 2톤을 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두 마리가 힘을 합하면 23톤이나 끌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옳은 일일까? 남북 분단의 비극을 그대로 다음 세대까지 끌고 가야 하는가? 다음 세대까지 낮은 행복지수로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남북문제는 이데올로기나 정치, 경제 문제로만 풀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어떻게 남북문제를 풀 수 있을까? 복수심과 미움과 분노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오직 화평의 복음으로만 풀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2:14). 여기에서 은 구별을 뜻한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 뜰과 성전 뜰 사이에 담이 있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접근하지 마라, 접근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팻말이 있었다. 이방인들은 절대로 성전 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뜰과 성소 사이에 담이 있어서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제사장들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담이 있어서 대제사장 외에는 누구도 지성소를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런 담들을 허셨다.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담을 허물어 차별이 없게 하였다. 성소의 휘장을 찢어 성소와 지성소의 담을 허셨다. 십자가는 바로 모든 담을 헐어 하나가 되게 하는 화평의 십자가이다. 화평의 십자가에는 어떤 담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살다 보면 많은 담이 있다. 여러 차별이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에게는 양반과 상민이라는 차별이 있었다. 적자와 서자라는 높은 담이 있었다. 지금은 동서의 담, 남북의 담이 높다. 계층 간의 담 또한 높다. 화평의 십자가는 이런 모든 담을 헐어 둘을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다. 화평의 십자가의 복음은 남북의 높은 벽을 허물 수 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2:4).

 

둘째, 성공지향적인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교육의 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교육법 1).‘홍익인간이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이타적인 삶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먼 출세지향의 교육이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간 우리사회를 지배한 계층이 과거라는 등용문을 통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과거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고시가 출세의 잣대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일류지상주의와 1등만이 존재하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농장의 사회가 되었다. 교육은 건전한 시민 양성이 아니라 출세의 수단이 되었다. 그로 인해 학교교육은 입시위주와 출세주의 교육으로 전락하였다.

 

우리나라는‘1’이라는 숫자를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지하철만큼은 유독 2호선을 선호한다. 이는 2호선에 소위 말하는 일류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호선 지하철에서 여인들의 대화 주제는 , 이란 말이 있다. 이 평등은 평등이라는 영어 이큐어릴티(equality)가 아니다. 아파트 몇 평에 살고 있고, 자녀의 석차가 몇 등이라는 첫 글자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입시와 부의 상징인 아파트에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는가를 풍자하는 단어이다.

 

2014년 사교육비 총규모는 약 182천억 원이다. 7 이는 우리나라 예산이 357조라고 볼 때 5%에 해당한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반면에 교육투자의 효율성은 주요 국가들 중에서 하위권이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발전적인 학문의 연구가 아니다. 오직 입시를 위한 교육, 그것도 학원교육이라는 점이다. 이로 인해 학력(學力)이 아니라 학력(學歷) 8이 되고 있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간판, 즉 출신학교로 평가한다. 그러다 보니 비교의식과 상대주의로 인한 열등감이 팽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교육환경과 사회 환경은 행복과는 멀다. 그러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80년대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1등을 목표로 하는 부모의 압력을 받던 여고생이 자살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삼성의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는 더욱더 1등 지상주의로 몰아넣는다. 1등만 존재한다면 2등 이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1등은 하나밖에 없지만 2등 이하는 부지기수이다. 이런 살벌한 교육환경과 사회 환경은 행복지수를 떨어뜨리고 있다. 2013년에 자살인구는 14,427명으로, 이는 OECD 회원국의 인구 10만 명당 평균자살률이 12.1명인 데 비해 우리나라 자살률은 2.35배나 이르는 것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이다.9 유엔 산하 기구인 지속 가능한 발전 해법 네트워크( SDSN)’ 에서 발표한 ‘2015 세계 행복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총 5.984점으로 47위이다. 이는 세계 평균인 5.1점보다는 높았으나, 이전 2013년 행복지수와 비교하면 6단계 하락한 것이다.

 

셋째, 천민자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 10는 저서 국부론을 통해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1776년에 국부론을 쓰기 17년전인 1759년에 도덕감정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인간의 사회적 덕성을 인혜(仁惠)와 정의 및 신려(愼慮)의 구분과 조정(調整)에 두고, 그 인식능력을 동정(同情)과는 질적으로 다른 동감(同感)’에서 찾았다.

 

한편 천민자본주의는 독일의 막스 베버 11가 처음 사용했다. 그는 유대인의 예를 들고 있다. 유대인은 게토( ghetto )라는 지역에 모여 살면서 유럽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으며 살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천박하게 여기던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다. 성경은 같은 성도끼리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하고 있다(22:25, 23:20). 그러나 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청난 이자를 받고 돈을 벌어 유럽인들은 이들에 대한 혐오감이 더 높아졌다. 오죽하였으면 셰익스피어 12 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악덕 사채업자로 묘사하였겠는가? 이 중에 유럽 금융계를 장악한 로스차일드 등은 엄청난 돈을 벌어 왕들과 지배층에 돈을 빌려주고 지배층은 돈 대신 화폐발행권 등의 이권을 넘겨주었다. 막스 베버는 유대인들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모습을 천민자본주의라 불렀다.

 

우리나라에 천민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직후이다. 당시 정부는 선 성장 후 분배라는 정책을 내세워 경제성장에 목표를 두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고, 자본가는 노동을 착취하였다. 거기에다가 정경유착으로 돈을 모아 부동산에 투기하였다. 결국 자본주의는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지배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자본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시장은 그만두고 국가까지 지배하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역사는 아주 짧다. 여기에다가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산업사회로 진입하고 지식정보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개발로 인해 갑자기 부자들이 생겨났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13를 보면 자본주의는 경건한 크리스천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은행에 저축한 것이 자본이 되어 산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땀을 흘려 돈을 번 기업도 있고 기업가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해방과 더불어 정치권과 결탁하여 일제적산(日帝敵産)의 인수, 갑작스러운 강남 개발로 인한 보상금, 그리고 차관과 구제금융 등의 특혜를 통해 성장했다. 이로 인해 천민자본주의가 생기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속성인 부와 권력획득을 최고의 선으로 여김으로 인해 목적지향이 아니라 지위지향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한 일간지의 보도에 의하면 강남에 집 200채 이상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빈부의 간극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다. 혹자는 본인이 게을러서, 공부 못해서 출세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는 거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고 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사회든 낙오자가 있게 마련이다. 모두가 1등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1등을 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있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이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제 3차 로잔대회 14에서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교회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3대 우상을 ‘GPS ’, 즉 탐욕(Greed)과 권력(Power), 성공(Success)으로 보았다. 이를 타파할 개념으로 ‘HIS’, 겸손(Humility), 정직(Integrity) , 단순함(Simplicity)을 제시하였다. 그는 성공과 탐욕과 권력을 제거하고 겸손과 정직, 단순함을 세워 나가는 노력은 지금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비단 교회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GPS에 있는가, 아니면 HIS의 위치에 있는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자본주의 속성은 나눔보다 성장과 소유에 있다. 이로 인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를 향해 질주하게 되고, 살벌한 경쟁사회로 몰아간다. 어렸을 때부터 토끼와 거북이의 예를 들어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만이 선이고 정의라고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토끼는 달리기 선수이고 거북이는 수영 선수인데 지상에서 게임을 시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이념의 잣대로 판단하는 2분법의 사고체계를 다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교육과 평화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공지향의 교육에서 성취지향적인 교육과 천민자본주의에서 나눔과 배려 및 동감(同感)’의 자본주의 교육이 필요하다. 이때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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