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마가복음 5:1-20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5:9).

 

광인은 미친 사람입니다. 미쳤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매여 있는, 무엇인가에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매이게 되면 내 뜻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나는 거룩하고 품위 있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런 자신을 보며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7:15)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7)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종국에 가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하며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8:34). 사람이 죄의 종노릇을 하는 근본 이유를 보면 그 뿌리가 욕심 때문입니다(1:15). 아담이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교만과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의 핵심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자와 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광인이 됩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는 것으로 족해야지 배까지 맺으려고 하면 탐욕이요, 교만입니다. 인간은 탐욕과 교만 때문에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리다가 광인이 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광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만나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거라사인

 

예수님은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후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셨습니다. ‘거라사열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데가볼리의 한 도시로, 로마 14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돼지 농장이 있는 이방 도시였습니다. 이방 도시는 우상 숭배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 주둔하는 도시는 성적으로 문란합니다. 또 이곳은 도시입니다. 도시는 향락적이고 물질적입니다. 이를 볼 때 이곳은 귀신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마치 병균이 더러운 곳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귀신도 추하고 더러운 곳을 좋아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한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새벽에 예수님 일행을 환영한 사람은 고상한 귀부인이나 지성인이 아니라 흉한 모습을 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무덤에서 살아감

가정은 쉼과 힘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정을 떠나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무덤이 있는 곳은 죽음이 지배하고 어둡고 으스스합니다. 그는 그런 무덤 사이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더러운 귀신 들린 자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산 사람과 함께 생명과 더불어 삽니다. 소망과 더불어 삽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사람은 죽은 자와 함께 삽니다. 절망과 더불어 삽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며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며 고운 정, 미운 정 들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가정과 사회를 떠나 혼자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무덤을 친구 삼아 무덤 사이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하 게임방, 비디오방과 영화관, 어두운 카페와 술집, 그리고 밀폐된 자기 방을 무덤 삼아 사람들과 관계성을 끊고 혼자 어둡고 음울한 생활을 합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청년들이 어둡고 절망적인 삶을 삽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단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들은 희망이 없고 고독하기 때문에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고 다닙니다. 이는 귀신이 그의 내면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옷을 벗음

옷은 문명과 문화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는 옷을 벗고 삽니다. 아마 옷을 일부러 찢어 입기도 했을 것입니다. 머리는 몇 달 동안 감지 않아 악취가 나고 흐트러진 채 다녀서 마치 동물과 같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고결한 형상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파괴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왜 옷을 벗고 다녔을까요? 몸에서 열이 나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기존 문화와 질서에 반발해서 그랬을까요? 자기를 짓누르는 어떤 세력에 대항해서 그랬을까요? 답은 귀신 들렸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린 자의 특징은 옷을 벗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노출이 심한 옷을 걸치고 도심지와 캠퍼스를 배회합니다. 특히 일부러 옷을 찢어 입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예술이요, 문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예술이나 문화가 아니라 어두움의 문화, 공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문화를 떠나서 옷을 단정히 입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13:14).

 

셋째,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함

거라사인은 가두리 기법으로 자신을 가두고자 했지만 가둘 수 없었고,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자 했지만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욕을 절제하고, 탐욕을 절제하고,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정과 탐욕, 그리고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분열되고,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절제하지 못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니 동물보다도 못합니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동물에게는 소화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소화제를 먹으면서까지 탐욕스럽게 먹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기관차나 자동차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의 제어기능이 파괴되면 광란의 사회가 됩니다.

우리는 귀신 들린 사람더러 광기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 돈에 미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급속하게 확산되는 것이 성의 광기입니다. 성폭행이 세계 제3위입니다. 영상물과 광고와 책 등이 거의 다 성을 중심한 것들입니다. 성이 상품화되어 돈벌이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정욕에 광인이 되어갈까요? 이는 소득과 여유 시간은 늘어났지만 인격 수양과 고급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원초적인 성욕만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졸부들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인격 수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도시개발로 떼돈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란 자기 극기, 자기 훈련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건강을 잃고, 시간을 잃고, 순결을 잃고, 신앙도 잃게 됩니다. 결국 그러다가 패망하게 됩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는 절제입니다. 우리는 먹고 입고 잠자는 모든 삶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5:28).

 

넷째, 자기애가 없음

거라사인은 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었습니다. 옷을 벗고 다닌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았고, 밤에 잠을 자지 않는다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정이나 사회나 사회의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 외적으로 볼 때 완전한 자유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자유가 없었습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5).

 

그는 불안과 초조, 공포와 두려움으로 무덤에서 울부짖었습니다. 그에게는 참 자유가 없었습니다. 자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8:32)고 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었기 때문에 자유가 없었습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14:6). 그는 내면에 예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오직 허무와 절망, 원망, 증오심과 복수심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놈이야! 더 이상 살아갈 필요가 없어! 미쳐 죽겠다!” 그는 자신을 부정하고 자학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왜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가치 있고 고결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는 왜 이처럼 추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부모님이 늘 싸우는 가정이 싫어서였을까요?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 어머니를 때리고 밥상을 뒤엎는 집이 싫어서였을까요? 결손가정에서 자라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을까요? 사랑하던 여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였을까요? 도시의 선정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돼지를 인간보다 더 중히 여기는 물질적인 가치관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물질이 왕 노릇 해 인간이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회는 점점 세분화되고 조직화되어 인간소외의 비극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물질과 제도의 노예가 되어 그 존엄성과 가치관이 점점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와 도시의 선정적인 문화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사회는 한마디로 포스트모던 시대입니다. 이로 인해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고 자기가 옳다는 소신대로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산 시대는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윤리와 도덕의 붕괴로 인한 도덕적인 공동화 현상입니다. 그리고 혼돈과 어두움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정작 미치게 하는 것은 이런 외부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내면에 파고드는 죄의 소욕입니다. 죄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죄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어두움이 지배하는 무덤으로 몰아갑니다. 자제력을 잃어 동물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시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5:3-4).

 

사람들은 그를 가정에 붙들어 매기 위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꽁꽁 묶어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쇠사슬과 쇠고랑을 뚝뚝 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내면을 조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외적인 규제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 발광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귀신 들려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외적인 쇠고랑으로만 해결하고자 합니다. 제도로 묶어두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젊은이들은 더 발악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이름을 물으시는 예수님

 

사람들은 귀신 들린 거라사인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만나주셨습니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려와 넙죽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5:7).

 

그의 말은 행동과 상반됩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 안에 귀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사람을 싫어하며 혼자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반발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반발하는 이유는 이미 예수님이 그의 안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향해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5:8).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인간을 영혼을 가진 존재로 보시는 예수님

그의 육체는 상할 대로 상해 마치 동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귀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치료 방법도 달라집니다. 인간을 단지 육적인 존재로 보면 인간이 단지 물질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입니다.

 

둘째,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을 귀신으로 보시는 예수님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귀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역사하는 귀신의 존재를 알게 되면 자신과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자학하지 않고 이해와 소망과 긍휼함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귀신이 역사하는 것을 아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시자 귀신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도전해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5:9).

 

귀신 들린 사람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5:9)고 대답했습니다. ‘군대’(Legion)란 로마 군대의 6,000명으로 구성된 군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속에 6,000마리의 귀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 귀신, 정욕 귀신, 음란 귀신, 시기심 귀신, 자의식 귀신, 반항 귀신, 절망 귀신, 안일 귀신, 원망 귀신, 물질 귀신, 열등감 귀신, 운명 귀신 등 갖가지 귀신이 떼를 지어 그의 지정의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다스렸습니다. 그는 귀신이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에게 이름을 물어보셨습니까?

첫째로,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귀신의 속성은 속이는 것입니다. 귀신은 교활한 거짓말쟁이입니다(8:44). 따라서 귀신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의 존재를 속이고 사람 속에 거해 그를 다스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고 하셨지만 귀신은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를 속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어보심으로 그 정체를 폭로하게 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 앞에서 참 자아를 발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나타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왜 그런 생활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 줄 알았습니다. 현재의 모습이 본래 자기 모습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이는 그의 자아가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 중 가장 비참한 것은 자아가 상실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제일 먼저 찾아오셔서 그 이름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3:9)고 물으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알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명예, 사랑, 물질을 추구하다가 자아를 상실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심으로 참된 자아를 찾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자아를 찾을 때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싸울 내적인 힘이 생기게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귀신의 속성은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귀신은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도 단절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신은 영혼과 마음과 육신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부모, 친구, 이웃, 사회와의 관계가 좋아지고, 영혼과 마음과 육신의 건강도 좋아집니다.

 

셋째,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귀신의 정체가 폭로되자 귀신은 더 이상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순순히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귀신은 제발 이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때 마침 돼지 떼가 산비탈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자 귀신은 돼지들에게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귀신 들려 꿀꿀거리며 바다로 내리달아 몰사했습니다. 이때 귀신 들린 사람은 온전해져 옷을 단정히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돼지 2,000 마리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경제논리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생명의 원리로 대하셨습니다. 생명의 원리는 희생의 원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원리요, 생명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모든 보좌를 버리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2,000 마리의 돼지 떼를 희생시키시면서까지 한 인간을 살리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목자로서의 사랑과 구원의 말씀을 관심을 가지고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곳에 오래 계시면 돼지 떼가 전멸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생명의 구주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명을 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거라사인 지방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지만 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5:19).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신 동기는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신음하고 고통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인생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셔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속에 이루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 들려 발광하는 거라사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심으로써 그를 지배하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2,000 마리의 돼지 떼를 희생시키심으로 그를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을 대하실 때 경제원리가 아니라 생명의 원리, 희생의 원리로 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주님의 물음 앞에 진실되게 자신을 고백해 자아가 회복되고 사명이 회복되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 마가복음 5:21-24, 35-4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5:36).

 

공포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공포를 경험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공포는 전염병과 같아서 한 사람이 공포에 떨면 순식간에 그 공포가 주위로 퍼져나가서 창궐하게 됩니다. 공포와 두려움은 우리의 의지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두려움에 저항하려 하면 할수록 더 두려워집니다.

두려움은 단절과 단절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데서 옵니다. 죽음, 군 입대, 이별, 사업 실패 등 단절의 다음에 어떤 것이 올지 모르는 느낌이 공포와 두려움의 실체입니다. 왜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합니까? 이는 사람들이 죽음 후에 어떤 것이 올지, 죽음 후의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타나토노트에서 사후세계를 인지하게 된 이후 인류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지에서 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죽음 이후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믿는 사람들은 영생의 부활로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딸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강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 간곡히 구하는 야이로

 

예수님이 무리들을 돕기 위해 바닷가에 계실 때 무리 중에서 황급히 달려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회당을 중심한 사회였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마다 예배를 섬기고 모든 행정업무를 맡아 감당하는 명예로운 직분이었습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턱수염도 기르고 품위 있는 긴 예복도 입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시대의 엘리트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열두 살 된 예쁜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가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딸이 아빠!” 하고 부르며 뛰어나올 때의 그 행복감이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격무에 시달렸던 모든 피로가 싹 가시고 무한한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딸은 그에게 기쁨이요, 소망이었습니다.

그런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용하다는 의사를 다 불러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시시각각 어린 딸에게 다가올 때마다 그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소문을 듣자마자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곡히 구했습니다.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5:23).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간곡히 구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회당장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위신과 체면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매장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는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게 했습니다.

유대인은 12세가 되면 성년 취급을 합니다. 우리나라로 본다면 청소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청순한 젊은이들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청소년은 깊은 열등감과 관계성 문제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청소년은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해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청소년은 육신의 쾌락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어떤 청소년은 희망을 상실해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들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그녀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때 회당장의 집으로부터 사람들이 와서 절망적인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5:35).

 

사람들은 회당장에게 딸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딸이 죽었으니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빨리 가서 장례식을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든 사람은 고치실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살리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일말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조금의 호흡이라도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이제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 온몸에 힘이 쫙 빠져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영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한없는 슬픔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처럼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낼 때 이제 매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며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훔칩니다. 그러나 매일은 만나지 못하지만 가끔은 만날 수 있기에 눈물을 얼른 닦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앞이 캄캄했습니다. 죽음은 그의 소망을 송두리째 앗아갔습니다. 죽음은 그를 무기력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은 야이로의 마음 가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5:36).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야이로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이 자리 잡기 전에 재빨리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갈 때 느끼는 고소공포증, 넓은 곳에 나아갈 때 느끼는 공간공포증, 사람 앞에 나아가면 수줍어서 얼굴이 붉어지는 홍안공포증, 혼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독거공포증, 조금 아프면 혹시 암이 아닌가 의심하는 통증공포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노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 자랄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이 생기면 매사 소심해지고 확신이 없어집니다. 객관성을 상실해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겁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 눈이 커지고 신경이 예민해져 신경질을 잘 부립니다. 원망과 불평이 저절로 나옵니다. 무기력해집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쥐가 쥐구멍 앞에 있다가도 고양이가 야옹 하면 두려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잡아먹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두려움에 빠지면 수족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병의 92%가 두려움에서 온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의 적 또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인간의 실존을 상실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큰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행 제1호입니다(21:8). 우리는 두려워할 때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담대하라’(courage)라는 말이 365번 나옵니다. 이는 매일 두려움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이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딤후 1:7).

두려움은 염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고, 염려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는 염려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 결과는 이러합니다. 염려의 40%는 절대로 현실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고, 염려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며, 염려의 22%는 사소한 고민이고, 염려의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나머지 4%는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한 염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장애를 극복하고 26대 미국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도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내면의 두려움을 해결해 줍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에 많은 죽을 고비를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내면의 두려움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힘 되신 하나님을 만나자 그의 내면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1-2).

 

마르틴 루터는 1527년 비텐베르크에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부패한 로마 가톨릭 세력에 도전했습니다. 이때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이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많은 원수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으로 인해 여러 번 타협하고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어로 번역하던 성경을 여러 번 찢어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성이 되시고 방패와 병기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내적, 외적으로 파고드는 원수들을 물리치고 승리해 종교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새찬송가 58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도와주시고 그분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41:10-13).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상황과 조건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엄마 품에 있을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엄마의 큰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안길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바울은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가 평안했던 것은 주님의 큰 사랑이 약하거나 감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큰 사랑은 그로 하여금 움츠러들지 않게 했고 악에 맞서 싸우게 했습니다(8:32-39). 주님의 사랑은 모든 두려움에서 이기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안겨야 합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새찬송가 405).

 

그러면 믿기만 하라란 무슨 뜻입니까? 야이로는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불신의 소리로 인해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흔들리는 그가 처음 가졌던 믿음을 계속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했으면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받은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1:6-8).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갔을 때 분위기가 어떠했습니까? 떠들며 울며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 절망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아이의 어머니를 위로하며 같이 울어주었습니다. 초상집에서는 같이 울어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아이의 아버지인 야이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더욱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5:39).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는 말씀은 울고 있는 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셨습니다.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남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다시 깨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틈만 있으면 잠을 잡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과 예수님이 계신 곳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절망과 허무와 슬픔과 체념이 지배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잠시 이별하는 슬픔이 있지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더 좋은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때문에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믿음이 좋은 네 자녀를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임종을 앞두고 네 자녀에게 인사했습니다. 세 명의 자녀에게는 굿나잇하고 인사했는데 한 자녀에게만 굿바이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저에게만 굿바이를 하십니까?” 그때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네 형과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너는 예수님을 안 믿으니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지 않니!” 이때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다시 만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슬프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불신하는 자들을 다 내보내시고 세 제자들과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5:41).

 

달리다굼!” ‘달리다굼이란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생명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죽은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습니다(5:42). 누구든지 말씀을 들으면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우리는 평소 주위 사람들로부터 또 내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많은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생명을 죽이는 사탄의 음성인가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음성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 그리고 겸손입니다. 반면에 생명을 죽이는 음성은 불신과 미움과 절망, 그리고 교만입니다. 사탄의 음성은 죽음을 가져다줍니다. 반면에 주님의 음성은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음성입니다. 주님의 생명의 음성을 단순하게 듣기만 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딸을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기만 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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