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마가복음 12:13-27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12:27).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위트 박사는 한국에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 결핍 장애(JDD: Jesus Deficit Disorder)이다.” 그는 미국 교회의 집회나 회의에 참석해 보면 주로 리더십 강좌나 교회의 새로운 전략 프로그램 이야기이고,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하는 등 교회에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예수님 대신 그동안의 성공, 그 자체를 예배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 결핍 장애의 치유책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맛보고 느끼고, 내가 만든 예수가 아니라 이미 있는 예수를 찾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보는 것이며 거기서 미를 보고, 그 미에서 진리와 선함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회개와 십자가의 메시지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와 같은 성경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을 듣지 않을지라도 십자가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정교분리의 대원칙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산 자가 되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자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가장 지모가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충실한 유대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반로마 입장을 취하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결사반대했습니다. 반면 헤롯 당원들은 로마의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친로마파였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이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평소 서로를 혐오하고 경멸해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데는 연합전선을 펴곤 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은 모두가 복음의 적대 세력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둘 다 인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손을 잡고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의도를 숨기고 예수님께 듣기 좋은 아첨의 말을 했습니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12:14).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들의 말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참되십니다. 또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가 요구하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비판적인 말을 해주시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의인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인 부도덕한 헤롯 정권과 맞서 투쟁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한껏 추켜세운 뒤 아주 민감한 정치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12:14-15).

 

당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이에 대해 늘 반항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면 백성들은 로마의 앞잡이, 매국노 등으로 매도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시면 로마에 대한 반역을 선동한 죄로 헤롯당에 의해 즉시 체포당하시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라고 하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바치지 말라고 하실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알아서 하라고 하실 수도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제야 예수님이 그들의 덫에 걸렸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그들의 중심의 외식함을 아시고(12:15)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12:15).

 

데나리온은 로마의 작은 은화로, 세금 납부를 위해 사용하던 화폐였습니다. 이 동전의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가이사의 형상과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가이사 디베료, 신성한 아구스도의 아들, 만민의 주.” 예수님은 이 동전을 가리키시며 그 화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듣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12: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삽니다. 한편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근로의무, 병역의무, 납세의무, 교육의무, 환경보존의 의무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각종 법률과 각자 자기 위치에서 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사와 학생으로서의 의무가 있고, 직장인으로서 행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또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로서 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하고 권세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무를 행해야 할 이유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3:1).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12:11).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됩니다(3:8-9). 우리는 또 첫 열매도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23:19, 26:2, 10). 우리는 주일이 주님의 날’(Lord's day)이기 때문에 다른 날과 구별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우리 몸은 안일과 쾌락을 즐기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써야 할 거룩한 성령의 전입니다.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듯이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1:26-27).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화폐입니다. ‘화폐란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있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데는 자발적인 열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과태료가 붙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처벌을 받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릴 때 영적 질서가 생기고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오해함이 아니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완패를 당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도전장을 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사두개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 최대한 즐기려는 쾌락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멋진 대제사장 가운을 입었지만 그 삶이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해 세상과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부활을 믿을 경우 심판도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죄를 마음 놓고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모순성을 지적하기 위해 신명기 255-10절을 가지고 예수님께 기상천외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형이 결혼해 아들이 없이 죽을 경우 동생이 형의 아내를 맞이해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모두 건강하게 성장해 장남이 결혼을 했습니다. 장남은 여섯 명의 동생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갈릴리 해변으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신혼여행지에서 신랑이 해수욕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인은 할 수 없이 율법에 따라 둘째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예루살렘백화점에 반지를 사러 갔다가 백화점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슬픔을 딛고 셋째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더니 아들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때부터 이 여인에게는 남편을 잡아먹는 귀신이 붙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넷째 아들은 이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했습니다. 그는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첫날밤에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고, 마침내 여인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이들이 머리를 짜내서 만든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참으로 슬픈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들이 모두 부활한다면 여인은 칠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결혼한 장남입니까? 아니면 제일 나중에 결혼한 막내입니까? 아니면 제비를 뽑든지 결투를 벌여야 합니까? 이는 부활이 가져다주는 비극이요, 모순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문제를 간파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12:24-25).

 

첫째,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함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아는 것 같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 리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확히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문맥을 따라, 즉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입관을 버리고 성경 저자의 기록 목적을 따라 의미를 찾아야 하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신약은 구약 속에 계시되어 있음과 구약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적 관점에서 이해하며 해석해야 합니다. 이때 성경의 깊은 뜻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함

사두개인들은 성경말씀을 이성의 잣대로 이해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이 세상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 시에 현재의 모습으로 부활하지 않습니다. 만일 현재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 시에 불멸의 영적인 존재가 되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 시에 지금과 같은 욕되고 추하고 연약한 몸으로 부활하지 않습니다. 신령하고 영화로운 영의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산 자의 하나님

 

예수님은 계속해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해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12:26).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이 말씀의 시제는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부활시키셔서 현재 그들도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초로 역사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요, 이삭의 하나님이시요, 야곱의 하나님이시요, 모세의 하나님이시요,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두개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이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12:27).

 

죽은 자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육의 사람을 말합니다. 죽은 자들은 세상의 풍요를 갈구합니다. 그들은 결국 풍요를 추구하고 즐기다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은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빠집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그리고 죽은 자는 마음이 차갑고 딱딱합니다. 죽은 자는 생각이 어둡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도 어둡고, 생각도 어둡고, 표정도 어둡고, 행동도 어둡습니다. 죽은 자는 꿈이 없습니다. 그들은 안 된다’, ‘힘들다’, ‘허무하다’, ‘무의미하다등 부정적인 단어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그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반면 산 자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3:5). ‘거듭난다위로부터 난다’(born from above), ‘다시 태어나다’(born again), 중생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적인 태어남과 영적인 태어남이 있습니다. 육적으로 태어남에는 육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부여 받게 됩니다.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땅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흑암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1:13), 어두움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로의 변화, 땅의 소망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됩니다(고후 5:17).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산 자가 되면 말도 살아 있고, 생각도 살아 있고, 행동도 살아 있습니다. 꿈도 살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에는 죽음의 요소가 없습니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신령하고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시키십니다.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거듭나 성령의 사람이 될 때 산 자가 됩니다. 우리가 산 자가 될 때 하나님이 늘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물 댄 동산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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