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로마서 9:6-33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의 교리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이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란 믿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다 이해하고 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다 이해하고 사용하는 사람은 아마 몇 명 없을 것입니다. 저는 스마트폰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없이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믿고 사용하다 보니 이해가 되었고 이전의 핸드폰보다 편리한 것이 많았습니다.

성경에는 이해가 앞선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입니다. 이해가 먼저였던 그는 예수님 앞에 왔지만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믿고 이해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6:69).

본문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시고 미워하기도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기준이 있어서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선택받고 구원받은 것이 큰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민족으로 구원하시지 않는 하나님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아들로 삼으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는데 왜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폐기된 것이 아닌가? 그럴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바울은 고민하다가 성경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문제를 사람이나 세상 학문에서 찾지 않고 성경에서 찾아 해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감정이나 이성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문제를 성경에서 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성경을 묵상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해지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9:6).

 

바울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선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구원이란 국가나 민족이나 사회 집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5-6).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제사장 나라, 택한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켜야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또한 아닙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도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순절에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예수님을 안 믿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을 보편화하여 단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인천 사람들은 모두 짠물이다. 서울 사람들은 모두 깍쟁이다라고 보편화하여 단정을 짓습니다. 그런데 인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짠물이 아니고, 서울 사람이라고 해서 다 깍쟁이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현상을 보편화시켜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국가나 사회나 민족 단위로 구원하시지 않고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구원하십니다.

 

혈통으로 구원하시지 않는 하나님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9:7).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이고, 또 한 명은 사라의 소생 이삭이었습니다.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고, 이삭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14살이나 위였습니다. 혈통을 중시하는 이스라엘로서는 이스마엘이 장자가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12). 이를 볼 때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9: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방법으로 태어났고, 이삭은 사라의 태가 죽은 자와 방불하였을 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혈통이나 육정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 말미암습니다(1:13).

 

인간의 행위로 구원하시지 않는 하나님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9:10-13).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했습니다. 하나는 에서이고, 또 하나는 야곱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이스마엘과 이삭과 달리 모든 면에서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잉태되었습니다. 어머니도 같고 아버지도 같습니다. 할아버지도 같고 할머니도 같습니다. 그리고 둘 다 리브가와 이삭의 기도의 열매입니다. 임신하여 몇 날이 되자 태중에 있는 두 아이가 계속 싸웠습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리브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5: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1:2-3).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신 것은 그들의 선악 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슨 악이나 선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행위나 선행 이전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선택해서 누구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공부를 잘해서, 내가 어떤 선행을 함으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녀로 태어났고, 부모의 양육을 받고 자랐고, 의식이 있은 후 누구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왕 노릇 하던 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난 후에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구원보다 선택이 앞섭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위와 무관하게 무조건 우리를 택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

 

그 기쁘신 뜻대로란 하나님이 우리가 좋아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조건 사랑스러워서 택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과 구원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택하신다니 이는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모세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9:15).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산에서 내려올 때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은 뒤 먹고 마시고 춤추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 한 사람을 통해 큰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32:10). 이때 모세는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진노를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뜻을 돌이키시고, 친히 동행하시어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으면 모세를 제외한 이스라엘 전체가 진노를 받아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

 

달음박질하다란 노력하다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를 좋아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를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는 긍휼을 베푸셨지만 바로에게는 심판을 결정하셨습니다(9:17-18). 하나님은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바로는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로를 강퍅하게 하셨습니다(4:21, 7:3, 9:12, 10:1, 27, 11:10, 14:4, 8). 이는 강퍅한 상태대로 버려두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바로는 스스로 강퍅하여 모세를 거역했습니다(8:15). 이로 인해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그에게 내리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온 세상에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나타내시기 위해 죄 중에 멸망하도록 바로를 내버려두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총입니다. 반면에 심판은 전적으로 교만과 죄 때문입니다.

 

불의하지 않은 하나님의 선택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신가?”라는 항의에 대해서 변증했습니다. 이제 또 다른 항의에 대해 반론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9:19).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셔서 강퍅하게 되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시는데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하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예정대로 그리스도를 배반했고, 이로 말미암아 인류 구속 역사가 완성되었으니 그 배반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9:20-21).

 

이는 쉽게 말해 , 이 친구야! 자네가 뭐기에 하나님께 말대꾸를 하는가? 지음받은 주제에 지으신 분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진흙 한 덩이로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 수도 있고, 볼품없는 뚝배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어떤 모양으로 만들든지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귀히 쓸 그릇이나 천히 쓸 그릇이나 만들어진 그 자체로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왜 나를 얼짱과 몸짱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얼꽝으로 만드셨습니까?” 하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좀 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더라면, 좀 더 유능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39:13-14).

 

하나님께 대항하고 따지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교만과 죄악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가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이때 가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살피고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4:5). 하나님께 불공평하다며 인상을 쓰고 대들었습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다가 스스로 파멸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도록 하는 데 쓰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9:22-23).

 

그릇에는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멸망받도록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바로처럼 스스로 심판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고 관용을 베푸십니다. 이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18:23; 벧후 3:9).

반면에 긍휼의 그릇은 믿음으로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의 부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이제 값없이 하나님의 긍휼로써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된 자들은 스스로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자비를 찬양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상한 심정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긍휼의 그릇을 가리켜 우리라고 했습니다(9:24). 이는 바울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긍휼의 그릇이고, 이방인들은 진노의 그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신 이들도 포함됩니다. 유대인이라도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들은 진노의 그릇이고,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자들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이 구원의 진리는 바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자기 백성으로 삼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9:25-26). 베드로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남은 자를 가리켜 하나님이 남겨두신 씨라고 했습니다(9:27-29). 씨는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씨에는 무한히 성장하고 번식하여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씨앗을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긍휼로써 씨앗을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종족은 벌써 망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거룩한 씨를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수가 멸망하는 중에도 소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그 남은 자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성취해 나가십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진노의 그릇으로 버림받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9:30-32).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복음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은 극소수의 남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의를 추구하기 위해 율법을 준수했지만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딪칠 돌에 부딪쳤습니다. ‘부딪칠 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9:33).

 

하나님은 절대 주권으로 타락한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님을 시온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하사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반석이 되셨습니다(벧전 2:7-8).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바위가 되시고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민족으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혈통으로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불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요, 긍휼로 인함입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새찬송가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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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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