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사도행전 11:1-30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1:21).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크리스천과 믿음이라는 두 순례자가 허영이라는 도시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에는 허영의 시장이라는 장이 매일 열렸습니다. 크리스천이 허영이라는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시장 사람들이 술렁이며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이 입은 옷이 허영의 시장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의 말도 시장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들이 이곳 상품을 눈여겨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인들이 물건을 사라고 외치면 그들은 내 눈을 열어 헛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시장 상인이 도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사기 원하오?” 하고 물으니 크리스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존 번연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그리스도인은 삶의 스타일, 곧 말과 옷 입는 것과 관심의 대상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지성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고전 1:22). 그러나 주의 손이 함께하셨을 때에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디옥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주의 손이 함께하여 예수님을 믿고 삶이 달라지기를 기도합니다.

 

차례로 설명하는 베드로

 

사도행전 111-18절은 사도행전 10장을 다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저자가 두 번씩이나 같은 내용을 기록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11:1).

 

이방인들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천지가 진동할 일입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남녀의 장벽, 이념의 장벽, 인종의 장벽, 신분의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1:8)이 현실화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11:2-3).

 

할례자들은 유대 크리스천들을 말하고, 무할례자들은 이방인을 지칭합니다. 유대 크리스천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비난하다(criticize)의 뜻은 단순한 이의 제기가 아니라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단정하고, 더 나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기득권과 특권의식, 우월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종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할례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다른 민족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성골이고, 저들은 무수리들이라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같은 천한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들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나쁜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남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잘되는 것이 배가 아팠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차례로 설명했습니다(11:4). 베드로는 매우 성질이 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차분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논리나 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이나 지식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과 철학을 개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셨고,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을 사건 그대로 설명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말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들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셨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시기에 나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본 환상을 여러분도 보았다면, 그리고 고넬료가 말씀을 듣고 변화된 것을 보았다면, 당신들도 나와 똑같이 행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정죄하는 마음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반박하기 위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편에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위치를 바꿔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통입니다. 사랑은 소통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논쟁과 오해가 생기고 소통이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입장에 서서, 위치를 바꿔놓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 논쟁이 아닌 서로 소통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베드로는 그들에게 증언했습니다. 그의 증언은 합리적인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확신이었습니다. 그의 증거는 자신의 경험을 통한 확신이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것도 베드로 혼자 경험했다면 의심할 수 있었지만 베드로는 자기를 포함한 6명의 증인을 내세웠습니다(11:12). 히브리인들은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반면에 로마 사람들은 7명의 증인이 필요로 했습니다. 따라서 이 증언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11:14).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베드로는 열방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방인의 집에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면 안 된다는 식사 문화로 인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막히면 안 됩니다. 복음은 문화보다 앞섭니다. 문화는 변하지만 구원의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규례도 변하고 윤리도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죽고 사는 갈림길에 있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53-7절에서 예수님은 잃은 양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양 일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양 한 마리가 없어졌습니다.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양을 생각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맹수에게 쫓기고 있을 양을 생각하면 남아 있는 아흔아홉 마리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사실 잃은 한 마리를 찾다가 아흔아홉 마리 남은 양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자는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나섰습니다. 마침내 목자는 양을 찾았습니다. 목자는 달려가 양을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비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양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단숨에 집으로 달려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15:7).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면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112-15절을 보면 성령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11:12).

 

베드로는 성령께서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고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령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성령이 하라고 하시면 어떤 희생도 각오하고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이방인의 집이든지 아니든지 상관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노라(11:16)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승천 직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1:5).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이제 그 말씀이 생각나자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 용기 있게 말씀을 전했고,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들은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11:18).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잠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3:29).

 

저자 누가가 이 말씀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우리의 사명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받은 복음을 다른 이방인에게 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충만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헬라인에게도 말씀을 전하매

 

복음이 로마 사람인 고넬료의 집에 전해졌습니다. 이때에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헬라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서 각기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이르렀습니다. 안디옥은 2000전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안디옥 인구가 5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은 교통의 중심지요, 동서 문화가 만나는 곳입니다.

헬라인은 지성의 상징입니다. 헬라인들은 지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이성을 중시하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대는 로마 제국의 동쪽 자락의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초라하고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는 헬라인들에게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명의 예수님 제자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이 유식한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어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1:21).

 

이는 주의 손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셨을 때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무명이냐 유명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무명의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이 유능한 헬라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하시면 역사가 바뀝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시자 이방 세계에 최초의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앞으로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이방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세계선교의 발전소가 됩니다.

성경에서 주의 손은 전능하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하시매 모세의 마른 막대기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양치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는 과거 애굽의 왕자였기 때문에 애굽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군인 한 명, 무기 하나 주시지 않고 애굽으로 가서 고통당하는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겸손하게 순종하여 마른 막대기를 손에 들고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모세가 쥔 지팡이의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4:20). ‘하나님의 지팡이로 불린 이후부터 그 지팡이는 더 이상 마른 막대기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로 광야의 반석을 내리쳤을 때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손이 지팡이를 잡고 있는 모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른 지팡이는 모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마른 지팡이처럼 광야에서 장인의 양이나 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손에 잡혔을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는 목자요 장군이요 이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거인이 되었습니다. 청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하나님 나라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 역시 다윗 개인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다윗과 일평생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39:7-10).

 

다윗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31:15).

주의 손이 함께하실 때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시면 무명인이 유명인이 되고, 역사상 위대한 거장이 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시면 우리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캠퍼스가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사회가 변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즉시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11:22).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님에게 굳게 붙어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그의 권면으로 인해 큰 무리가 주님께 더했습니다(11:23-24).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양적으로 불어날 때 바울을 초청하여 일 년간 말씀을 공부하고 제자들을 굳게 세웠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신화 문화를 버렸고 쾌락과 음란 문화를 버렸습니다. 그들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를 열심히 닮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11:26).

 

이로 인해 사람들은 안디옥 교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제자들, 형제들,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에서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안디옥 신자들을 조롱하여 부른 별명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이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니 예수님께 미친 자들이라는 뜻으로 불러준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를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의 준말입니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이 이름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시면 이방인도 복음을 영접하게 됩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셨을 때에 안디옥의 헬라인들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디옥 교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하시면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주의 손이 늘 함께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엮인글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수

마가복음 제 32강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마가복음 제 31강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마가복음 제 30강 믿는 자에게는 능히 못할 일이 없는니라

마가복음 제 29강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마가복음 제 28강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가복음 제 27강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마가복음 제 26강 이 말을 하였으니

마가복음 제 25강 약한 것이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제 24강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마라

마가복음 제 23강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가복음 제 22강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가복음 제 21강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마가복음 제 20강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마가복음 제 19강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마가복음 제 18강 잠잠하라 고요하라

마가복음 제 17강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마가복음 제 16강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마가복음 제 15강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마가복음 제 15강 좋은 땅에 뿌려

마가복음 제 14강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일용할 양식

예배 안내

  • 주일 오전 예배 - 오전 11:00
  • 주일 오후 예배 - 오후 3:30
  • 어린이 예배 - 오전 11:00

대학마을교회 개척교회

우남식 목사님의 저서


    전도서에서 만난 복음
    (퍼플,2023)

      요한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퍼플,2022)

        요한계시록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 감성,2021)

          예레미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1)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0)

              이사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9)

                대학선교와 세계선교를 향한 권서행전
                (지식과감성,2019)

                  야고보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7)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저서 구입연락처

                                    • 010-8215-7966
                                      안은경
                                    • 우리은행
                                      1006-601-218050
                                      대학마을교회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