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사도행전 7:51-60

 

스데반의 순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60).

 

 

주후 361년에 줄리안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나중에는 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처형했습니다. 그 시대에 무명의 순교자가 원형 경기장의 사자 밥이 되기 위해 서있었습니다. 황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무명의 순교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이 또 묻습니다. “어째서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주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주님이 살아 계시다고? 그렇다면 지금 그 나사렛 목수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지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폐하와 같은 사람을 위해 관을 짜고 계십니다.” 이는 주후 361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황제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주후 363년에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는 죽어가며 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승리자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본문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순교 장면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가해자와 순교자, 그리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나는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 가해자인가, 아니면 스데반의 위치에 있는가?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누구를 보는가? 또 예수님은 지금 내게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은혜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7:51-53)

 

그러자 그들은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찔렸다(furious)는 말은 헬라어로 화살이 꽂혔다’, ‘정곡을 찔렀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의 메시지는 그들의 심장에 꽂혔습니다. 말씀이 그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사람이 말씀에 찔림을 받게 되면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더 마음이 완악해지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회개를 촉구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찔려 회개했습니다(2:37). 그런데 저들은 스데반의 메시지를 듣고 도리어 이를 갈았습니다. 마음이 더 굳어졌고 악의가 생겼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듣고 찔려 회개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들은 마음이 완악해져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간다는 것은 증오심의 표출입니다. 증오심은 사람을 죽이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에 말씀에 대해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주시는 말씀인 것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 말씀이 구원의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에 은혜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말씀은 나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회개합니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훼방하고, 말씀을 들은 후에는 쓴 뿌리를 품도록 합니다. 교회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거의 다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이를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귀까지 막았습니다(7:57). 귀를 열면 돌을 집어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싸울 때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합니다. 특히 악에 바치면 귀를 막고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을 죽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귀를 열고 그래 얘기 해봐, 한번 들어보자!” 하면 절대로 싸울 수 없습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하니까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이를 간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일심으로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7:57-58).

 

큰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는 군중심리와 집단화된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군중심리에 휩쓸리면 이성이 마비됩니다. 법을 어기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을 못합니다. 악이 집단화될 때에 그 파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현대 교인들의 특징은 귀를 간지럽게 하는 축복의 말만 좋아하지 심판이나 회개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면 무엇을 회개하란 말입니까?” 하며 반발합니다.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면 귀를 막습니다. 마음에 쓴 뿌리를 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공의회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듣고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자기를 깨는 아픔이 있지만, 회개에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선과 거짓을 회개해야 합니다. 안일과 탐욕과 정욕과 음란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상숭배와 사치와 허영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할 기회가 계속 오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찔림이 되면 변명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때 은혜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회개는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그들과 달리 스데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7:55).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흔히 무아지경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예수님의 영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 자유와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면 표독스럽고 일그러진 모습이 천사의 얼굴로 변합니다. 그리고 담대함으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모습이 됩니다.

스데반은 지금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과 공포의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스데반은 주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위를 보면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립니다.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보면 절망스럽습니다. 자녀를 보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마 스데반이 땅을 쳐다봤다면 먼저 처자식이 보였을 것입니다. 원수들이 이를 갈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두려울까요? 얼굴은 공포심으로 사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3:2).

 

땅의 것은 눈에 보이는 일체의 것입니다. 반면에 위의 것은 영원한 것, 하늘에 속한 것, 약속된 영원한 미래,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권능,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과 순결과 온유와 긍휼과 인내입니다.

스데반은 눈을 들어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7:56).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벵겔은 주님께서 스데반을 환영하시기 위해 일어서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순교자를 보시고 구출작전을 펴시지 않고 장렬하게 죽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켜보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켜 기쁨으로 영접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일어서서 기쁨으로 맞이하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좌에 우편에 서서 자신을 환영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위를 보니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 평화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샬롬, 평화였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새찬송가 412).

 

우리가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면 마음에 찬송이 나옵니다.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면 감사가 나옵니다. 유대 속담에 앞도 막히고 뒤도 막혔거든 위를 바라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 영광을 보고 땅을 보게 되면 길이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뵙고 나를 보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이웃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실수가 나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그는 백성들이 원망할 때 위를 보지 않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았기 때문에 실수했습니다.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데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두 번을 쳤습니다. 그가 만일 위를 보고 한 번만 쳤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고 땅을 봐야 한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을 보면 길이 보입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땅을 보며 불뱀 잡기 운동을 벌이지 말고 위를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놋뱀은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그들이 놋뱀을 바라보았을 때에 살았습니다.

우리 주위에 불신의 불뱀, 원망의 불뱀, 절망의 불뱀, 두려움의 불뱀, 쾌락의 불뱀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고 나를 보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면 얼굴이 해같이 빛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나를 보면 절망에서 희망이 보입니다. 불신에서 믿음이 보입니다. 두려움에서 용기가 생깁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는 지혜요,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7:59-60).

 

이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위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올린 기도와 비슷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23:34).

 

그러나 스데반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속죄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기도는 속죄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나의 잘못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뭔가 잘못해서, 내 실수로 저들이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스데반은 이 기도를 드린 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죽음을 잔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잔다는 것은 언젠가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깨어납니다.

스데반의 메시지와 장렬한 순교와 기도는 바울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울은 후에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보고, 신구약 모든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췄습니다. 바울 신학은 스데반의 메시지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메시지를 경청했습니다.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후에 사울의 얼굴을 천사로 변화시켰습니다.

 

스데반은 불신자들의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믿음이 가장 좋다는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기독교 2000 역사의 최초 순교자가 되었고 순교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는 순교의 순간에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장렬하게 첫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같이 빛나네 해같이 빛나네”(새찬송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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