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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4-17

행복론 : 행복의 동산, 에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창세기 1장이 창조에 대한 총론이라면 2장은 인간 창조에 대한 각론으로 인간 창조를 입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를 위하여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의 화두는 행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행복을 찾아 바쁘게 움직입니다. 행복은 만인의 바람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본질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 장을 통해서 우리는 행복의 본질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2:4-7)

 

창세기 11절에서 23절까지 나타나신 하나님은 엘로힘(Elohim), 즉 권능자이십니다. 24절부터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Jehovah), 스스로 있는 자’, ‘완전하신 분’, ‘구속자로서, 전에도 계시고, 현재도 계시고, 영원히 계셔서 나와 함께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권능의 하나님, 구원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4-6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대략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으므로 땅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아직 나지 않았습니다.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안개만 땅에서 올라올 뿐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자연이 자신을 관리하고 지키고 다스려줄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인간이 없는 자연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인간 창조의 필연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하나님은 흙으로 정성을 다하여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형체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눈썹과 속눈썹, , , , , 두 손과 두 다리, 그리고 뇌의 기능과 신체의 각 조직과 기능을 보면 신비스럽고 놀랍기만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39:13-14).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히브리어로 아다마’(adrma)인데 이는 흙이란 뜻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체는 질그릇과 같아서 약하고 잘 깨지고 쉽게 부서집니다(고후 4:7). 하나님이 흙덩이에 불과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은 생령(a living being, NIV),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의 생명에는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육적인 생명은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다 똑같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제한적입니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간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영원합니다. 이 생명이 죄로 인해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게 됩니다.

생명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포는 아무리 단세포라 할지라도 광대한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DNA가 지닌 유전정보는 총 70만 건으로 1,000권의 대백과사전과 맞먹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이런 세포가 60조 개가 있습니다. 이런 생명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 생명은 도대체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많은 과학자들이 생명의 신비를 캐고자 많은 노력을 했지만 생명의 근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1:4).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지으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는 열심히 일을 하여 일생 동안 먹고 즐길 수 있는 양식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러나 이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12:20).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육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받은 영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4).

 

2. 에덴을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2:8-14)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2:8).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황막한 광야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름다운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인간을 두셨습니다. ‘에덴이란 환희, 기쁨이란 뜻으로 낙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히 사랑하셨기에 인간을 위해 희락의 동산, 기쁨의 동산, 행복의 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나무를 나게 하셨습니다. 에덴에는 영양이 풍부하고 향기 그윽한 각종 과일들이 풍성하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먹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먹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아름다운 나무를 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과일을 먹을 때 이것저것 고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는 것을 보면 이 두 나무는 에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그 열매를 먹는 자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곳에 산다 할지라도 생명이 유한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해주는 나무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악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만드신 것으로, 인간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악은 인간이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생겨났습니다. 여기에서 선은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이요, 악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리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은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요,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크신 배려입니다.

또 에덴의 주위는 어떠합니까? 네 줄기의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있었는데 곧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였습니다. 강은 인류 문명의 젖줄입니다. 4대 문명의 발상지도 모두 강을 끼고 있습니다. 현대 산업사회를 이끌고 있는 지역도 모두 강을 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의 발원지로 맑은 물이 늘 솟아오르는 에덴이야말로 얼마나 비옥하고 아름답겠습니까?

또 그 강변에는 정금, 진주, 호마노, 물방울 다이아몬드 같은 진기한 보석들이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맑은 강물에서 각종 물고기가 헤엄치며 놀았습니다. 각종 아름다운 꽃들이 사시사철 에덴 동산을 수놓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동산에 진동했습니다. 여기에 가시덤불, 엉겅퀴는 없었습니다. 이곳은 예쁜 새들이 노래하고,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 시원한 바람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는 아파트 문제, 공해 문제, 수도세나 전기료나 난방가스 요금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춤을 추며,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누워 장난했습니다. 사자와 토끼가 서로 팔씨름을 하다가 사자가 져주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었습니다. 생로병사의 괴로움도 없고, 치열한 생존경쟁도 없고, 속되고 가증한 것도 없었습니다. 죽음도 없고, 이로 인한 공포도 없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풍요롭고 아름답고 밝고 희망이 넘쳤습니다. 자유와 사랑과 감사와 시와 찬미가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에덴에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11:9). 에덴은 전혀 부족함이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주셨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에덴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예루살렘,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습니다. 또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으며, 그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습니다. 그곳에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빛이 되어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은 세세토록 왕노릇하게 됩니다(21-22).

 

3. 사명을 주신 하나님(2:15)

 

에덴은 외적인 환경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내적인 환경도 아름답게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2:15).

하나님은 아담이 무위도식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에덴을 다스리며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놀며 인생을 즐기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간은 행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으며 인생을 즐기는 것을 행복하다고 한다면 이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하면 가정 일을 돌보지 않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직장에서 일하지 않고 단지 교회에서 봉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사명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원론적 사고방식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직업은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근무 중에는 사적인 전화나 이메일 등을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하나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증인된 삶은 영향력입니다. 영향력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함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칠 때 불신자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 보면 교회로 나오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믿는 자로서의 매력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이 시대를 스마트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는 스마트한 삶, 매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계명을 주신 하나님(2:16-17)

 

하나님은 거룩한 사명을 주시고 인간과 거룩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이 말씀은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공격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놓아 따 먹게 하셨는가? 만들지 않았으면 인간들이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이는 하나님이 병 주고 약을 주신 격이 아닌가? 하나님은 인간이 뻔히 따 먹을 것을 알고 만드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Adam’s Bible)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이 말씀을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한 후손들에게도 이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이다라는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자유의지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동산의 각종 과일 중에 가을에 나는 사과만 먹고 기타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각종 나무의 열매를 원하는 대로 먹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열매까지도 먹도록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까지도 임의로 따 먹을 수 있는 곳에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말씀에 순종하여 따 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따 먹을 수도 있고, 따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인간이 죄를 지었다며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선악과를 자유의지로 따 먹은 것이 아니라 마귀의 미혹을 받아 따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유의지는 마귀의 유혹으로 향하도록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자율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가 없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무한한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타락할 위험이 있을지라도 고귀한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자유까지 주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이후로 타락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만 있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의지는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의 은총으로 말미암습니다.

 

둘째, 영적인 질서

한 가정이 유지되려면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자연계에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아름다운 동산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살다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 쉽습니다. 사람은 축복을 받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때 인간은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반면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존재할 때 인간은 그 나무를 보며 아름다운 동산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높아진 마음을 회개하고 겸손하게 됩니다. 바로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이라는 영적인 질서를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창세기 128절이 인간과 만물의 질서라면 216-17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질서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열쇠요, 행복을 지킬 수 있는 비밀입니다.

 

셋째, 거룩한 명령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이란 영과 육을 다 포함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 기준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반대는 인간 중심, 하나님 기준의 반대는 인간 기준입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기준으로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기준은 절대적입니다. 반면에 인간 중심, 인간 기준은 상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좌표가 없습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좌표가 없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 하나님 기준의 절대적인 삶은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기 때문에 방황하지 않게 되고 의미와 보람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 하나님 기준의 절대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샛별이 되어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우리가 에덴을 소유하기 원한다면 하나님 중심, 하나님 기준의 절대적인 거룩한 명령이 있어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절대라는 용어를 싫어합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절대라는 단어가 상실되고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방황하고 표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변함없이 우리 삶의 절대 좌표가 되어 바르게 살도록 인도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는 한때 사교에 심취해 있었고 그릇된 철학을 인하여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정원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밖에서 아이들이 집어서 읽으라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곧 방으로 들어가 성경을 집어서 펼쳐보았고 바로 그 귀절이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3-14)절이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가 구원을 얻고자, 바르게 살고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두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죄 문제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죄 사함의 기쁨을 얻지 못해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하나님의 진노 앞에 떨어야 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두렵고, 기도해도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에 있는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로마서 117절이 기억났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

그가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성령 안에서 생명의 빛이 그 마음에 임했습니다. 그는 일어나 바로 이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고 심령에 자유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라는 명제를 붙들고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중세의 어두움이 지나가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갔다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올더스게이트라는 작은 거리를 지나가다가 조그만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몇 사람이 모여서 로마서 서론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서론을 듣는 중에 마음이 뜨거워져 온 세계를 위하여 오신 주님이 이제는 자신을 위해 오셨음을 믿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 있든지 말씀을 굳게 붙들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참된 기쁨과 에덴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에덴은 행복의 동산입니다. 말씀과 사명이 있고, 거룩한 계명이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있습니다. 에덴 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행복의 동산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이 에덴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글을 써서 에덴을 그렸습니다. ‘유토피아’(Utopia)‘ou’라는 부정사와 ‘topos’가 합쳐진 희랍어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결코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상이나 이즘, 이데올로기, 교육 등을 통하여 에덴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는 결코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상, 이즘, 이데올로기 등은 미움과 증오심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사실 진보와 보수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입니다. 보수가 성장을 강조한다면 진보는 복지와 나눔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서로를 향하여 보수 꼴통, 좌경 빨갱이라고 매도합니다. 이런 곳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육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도 대학에서 행복학을 강의하지만 학생들에게 행복이 아닌 긴장감을 심어주는 게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상대평가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은 행복과 거리가 먼 성공지향적인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성공해야 산다는 성공의 원리, ‘이겨야 산다는 필승의 원리, ‘가져야 산다는 힘의 원리 등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속여야 산다는 잔꾀의 원리, ‘죽여야 산다는 상극의 원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는 행복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에서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교회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3대 우상을 ‘GPS’, 즉 탐욕(Greed)과 권력(Power), 성공(Success)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타파할 개념으로 ‘HIS’, 겸손(Humility), 정직(Integrity), 단순함(Simplicity)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성공과 탐욕과 권력을 제거하고 겸손과 정직, 단순함을 세워나가는 노력은 지금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어느 시점에 있을까요? GPS일까요? 아니면 HIS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같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에덴을 회복할 수 없음을 아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자에게 복이 임하는 활동의 원리, 알아야 사는 학습의 원리, 정직해야 사는 정직의 원리, 믿어야 사는 신뢰의 원리, 더불어 사는 상생의 원리인 사랑과 믿음과 충성, 신뢰를 통한 행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낙원을 회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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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과 감성,2021)

          예레미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1)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20)

              이사야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9)

                대학선교와 세계선교를 향한 권서행전
                (지식과감성,2019)

                  야고보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7)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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