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6:1-11

 

다시는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사망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패배의식, 좌절, 열등감, 미움, 교만, 탐욕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벗어나려고 애써보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전자를 탓하고, 조상을 탓하고, 성격을 탓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보다 더 강한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부터 죄 짓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군. 진하게 죄를 지어 더 많은 은혜를 받아야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하기 위한 말씀이 본문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세례와 연합의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죄에 대해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 산 자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바울은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을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특징은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가 끝났습니다. 판사도 죽은 사람에게는 형을 선고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경우 장례행렬 차량은 교통신호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죽음은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죄에 대해 죽었습니까?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6:3).

 

우리는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을 때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합하여란 안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세례를 받았다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말합니다. ‘세례란 잠긴다는 뜻으로, 성령 세례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8:9).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해집니다. 여기에서 죽었다란 통치 개념입니다. 로마서 64절에서 장사를 지냈다란 완전한 죽음, 죽었다는 사실에 서명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자신도 못 박혀 죽었음에 대한 확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부활에 참여하여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된 우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음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4).

 

새 생명이란 미래적인 삶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을 뜻합니다. 생명은 자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생명이 넘치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침울하고 어둡고 염세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은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자라되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야 합니다. 생명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했으므로 우리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

 

부활은 미래의 부활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현재 누릴 수 있는 부활도 포함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부활의 감격 속에 살아야 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5-58).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아는 우리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옛사람이란 아담 생명을 말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사망이 왕 노릇 했습니다(5:17).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고전 15:22).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3:6). 우리는 아담의 죄성(罪性)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아담의 죄성은 자기중심으로, 자기가 왕입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자기애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은 죄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9:27). 아담의 죄성으로 죽은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납니다. 아담 생명은 이 땅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길어야 100년 살지만 오는 세상은 영원합니다. 아담의 죄성으로 태어난 인간은 뜨거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9:48).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화상으로 인한 통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때 우리의 옛사람, 아담 생명이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온전히 예수 생명이 되었습니다(9:11-15). 예수 생명은 아담 생명이 영원한 것처럼 역시 영원합니다. 이 생명은 지금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있습니다(2:6).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3:20).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 죽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부활한 일도 없습니다. 승천한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묻혀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경험하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죽고, 예수님이 땅에 묻히실 때 우리도 묻히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하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우리도 승천하고, 예수님이 하늘의 우편에 계실 때 우리도 우편에 앉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함께 재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체도 부활합니다. 부활의 몸과 생명이 만나는 것, 이것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영화로운 영광입니다.

어떤 종교에서 한 번 믿음으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떤 종교가 한 번 믿는 순간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값없는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있다가 없어질 물질을 위해, 죽으면 끝나는 육신의 사욕을 위해 어리석게 살 수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물질과 시간을 주님을 위해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고 인색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보이는 영광과 정욕을 좇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쉽게 배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은혜와 사랑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배반자는 지옥의 가장 밑에 거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룟 유다와 부르터스가 지옥의 맨 밑에서 고통하고 있음을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꿈에서조차 현실의 유익 때문에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예수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생명을 얻은 것은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죽다’(destroyed, KJV)란 헬라어로 카타르게오(καταργέω), 무력화시키다, 효력이 없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마귀는 아직 멸망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아 헤매듯 우리를 미혹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닙니다. 재림하신 주님이 마귀를 무저갱의 영원한 불 못에 던지실 때에야 비로소 그는 멸망합니다. 따라서 마귀는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죄가 우리를 통치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마음의 법이 이제 더 이상 죄를 좇지 않고 의를 좇으며 거룩한 삶을 삽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죽은 결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거룩과 의와 생명을 좇다가도 금세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정욕과 탐욕에 무릎을 꿇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곤고한 자라고 탄식했습니다. 바울이 탄식한 이유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탄하던 바울이 갑자기 감사 찬송을 불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바울은 죄의 법 아래 무릎을 꿇는데도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를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8:1-2).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지지만 죄의 지배를 받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죄가 우리를 유혹할 수는 있지만 우리를 자신의 소유나 통치권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매개체인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속성은 항상 살아 있는 매개체를 통해 그 능력을 행사합니다. 그런데 그 매개체가 죽었기 때문에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능력을 행사할 수 없고, 우리를 지배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분은 어떤 경우에도 바뀔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불신자는 가끔 착한 일을 하다가도 다시 죄 집으로 돌아갑니다. 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곳에 있는 것이 편합니다. 죄의 다스림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죄를 짓는 것이 어색하고 괴롭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어둠침침한 곳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있는 것이 거북합니다. 우리는 죄에 넘어지지만 죄의 소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아 헤매지만 그곳에 머무르거나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더 이상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6:7).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는 우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의 유혹에 넘어질지라도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는 못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란 장차 이루어질 미래적인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미래적인 의미가 아니라 현재 그와 함께 살고 있음을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새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미래의 것을 현재 누리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며 이를 즐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죽음의 지배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6:9-10).

 

한마디로 싸움은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고, 하나님께 대하여 계속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믿을 것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 곧 예수님이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셨고 하나님께 대해 계속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여기는 우리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이와 같이란 앞서 10절의 원리와 같이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다란 기록하다, 간주하다,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믿으라는 단어보다 더 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체험과 상관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이미 정해진 사실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는 자로 간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면 실패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 넘어집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 과거에 죄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떠올라 두렵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수족이 마비되고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은혜도 기억나지 않고 믿음의 체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워서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암벽을 오를 때 끝까지 위를 쳐다보고 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무섭다고 밑을 내려다보면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추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 살아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될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주 예수 나와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 계셔서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새찬송가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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