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조회 수 2359 추천 수 0 2012.07.11 05:59:24
창세기25:27-28:22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28: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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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제가 어느 날 자신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참모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수고 많이 했소, 이제 소원이 있으면 소원 한가지씩을 말해 보시오.” 그때 사람들은 “휴가를 보내주십시오. 집 한 채를 주십시오. 예쁜 여자를 아내로 주십시오. 잠을 실컷 자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데닉”이란 사람은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 정복한 나라 중에 한 나라를 제게 주십시오.”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제는 뜻밖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라 하나를 그대에게 주겠소. 그대는 나 알렉산더를 나라라도 뚝 떼어줄 수 있을 만큼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런 호의를 베푸는 것이오.”

성경에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고 했습니다. 우리가 작은 하나님을 믿으면 작은 일을 하게 되고, 존귀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위대하고 큰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선 한 토막을 놓고 파는 거리의 행상이 되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세계를 놓고 기도하면 세계를 주십니다. 요한 웨슬리는 세계 지도를 펴놓고 “세계는 내 교구이다”라며 세계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세계를 목장으로 주셨습니다. 영국의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는 세계선교의 창을 열기 위해서 인도의 바다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으라. 위대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고 위대한 일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라.”

본문에는 야곱과 에서의 가치관이 나옵니다. 그리고 야곱을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고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 서원 기도하는 야곱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큰 꿈을 꾸고 고상한 가치관을 갖기를 원하시고, 구체적으로 서원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1. 야곱과 에서의 가치관(25:27-34)

25장 27,28절을 보면 야곱과 에서는 자라면서도 대조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에서는 몸에 털이 많고 익숙한 사냥꾼으로 야성미가 넘치는 들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전통을 메고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꿩, 노루, 토끼, 멧돼지 등 풍성하게 잡아와서 미식가 아버지인 이삭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체격도 어깨가 딱 벌어지고 육체미가 넘치는 인기 스타였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매끈매끈하고 성격도 조용한 훈남이었습니다. 그는 주로 장막에 거하여 어머니 심부름을 했습니다. 팥죽도 끓이고 설거지도 하고 시장에 가서 시장도 보곤 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마미 보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지만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가치관이 어떠합니까? 29-34절을 보겠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어떻게 하면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뺏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들에서 사냥을 하고 에서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곧 배를 움켜쥐고 야곱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야곱아! 그 거서기 있지, 그 붉은 것, 한 사발 좀 줘라.’ 그는 팥죽이라 하지 않고 성질이 급하여 ‘그 붉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배가 좀 고푸기로서니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보통 사람 같으면 ‘형! 배고프지?’하며 팥죽 한 그릇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형 에서에게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31)”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야곱의 마음에는 장자로 태어나지 못하고 次子로 태어난 次子 콤플렉스, 움켜쥐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장자의 명분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당시에는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장자가 누릴 특권이 많았습니다. 장자에게는 가족을 다스리는 지배권이 있었고(27:29), 또한 재산을 상속받되 차자의 두 몫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신27:17).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언약의 축복을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있어서 장자의 명분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장자의 명분은 현실적으로 별 유익이 없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당장 밥을 먹여 주고 또 장자라고 하여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장자가 되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양과 소를 잡는 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당장에 손해보고 유익이 없다 할지라도 이를 귀히 여겼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 현실적인 유익보다는 가치와 의미 있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무엇이 가치가 있고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이는 장막에 거하면서 15년 동안 신앙의 거부인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믿음을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야곱의 의식 세계, 무의식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에서가 들로 산으로 들 나귀처럼 돌아다닐 때 야곱은 믿음의 거장들로부터 믿음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부모의 방향을 좇아 믿음의 결혼을 했습니다.

한편 에서는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이 있느냐며 팔았습니다. 그는 육신의 배고픔만 알지 신령한 특권을 몰랐습니다. 그는 육신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인내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육신에 쉽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당장에 유익이 없다고 해서 영적인 것을 소홀히 여기고 현실의 유익을 추구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진리에 기초한 분명한 철학과 인생관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철학은 유익이 있고 실리가 있으면 진리요,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팔고도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꿈과 희망이 넘쳐야 할 나이에 여자에 눈이 어두워서 미팅, 고팅 등을 하며 육신의 정욕을 즐겼습니다. 그는 사냥하러 나갔다가 여자들을 hunting하여 40세 때에 헷 족속의 딸 중에서 두 명씩이나 아내를 취했습니다(창26:34). 그는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을 근심하게 했습니다(26:35). 에서는 이삭과 리브가가 이를 싫어하자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또 삼았습니다(28:6-9). 그는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무지하고 육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34). 히브리서는 이런 에서를 일컬어 망령된 자 곧 불경건한 사람,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히12:16). 이처럼 에서는 겉으로 보면 매력이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영원하고 가치 있고 귀한 것을 알지 못하고 순간적이고 현실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 명분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축복을 주어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념보다는 실리, 명분보다는 현실의 유익을 중히 여깁니다. 꿈과 비전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 감각을 찾습니다. 맘몬, 돈이 시대를 지배합니다. 이 세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청와대에서 신문사에 기사를 빼달라고 하면 노하지만 삼성에서 기사를 빼달라고 하면 당장 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광고비가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피로 세운 보배로운 믿음과 명분을 경홀히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대에 믿는 자로서의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신자로서의 고결한 명분, 목자라는 고귀한 직임의 명분이 있습니다. 이런 명분을 소홀히 여길 때에 현대 판 에서가 됩니다. 하나님은 명분을 귀히 여기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 사역에 쓰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굶는다 할지라도 명분만큼은 버리지 않는 가치관과 철학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180도 달라집니다. 영을 좇는 자는 생명과 평안이요, 육신을 좇는 자는 사망입니다(롬8:5-6). 우리에게는

2. 야곱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28:6-15)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자 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이고자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27:41). 이를 안 리브가는 야곱을 외가로 보냈습니다(27:42-45). 이삭은 야곱을 외가인 밧단아람으로 보내면서 믿음의 결혼을 반드시 하도록 당부하고 축복하여 보냈습니다(28:1-4). 야곱은 부모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개나리봇짐을 지고 브엣세바에서 밧단아람으로 향했습니다(10). 그는 나그네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만큼 가니 태양이 서산에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루스로서 브엘세바에서 이곳까지는 약90km이었습니다. 보통 이 곳까지는 3일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걸린 것을 보면 에서에게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뛰다시피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여장을 풀 곳이 없어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하늘을 지붕 삼아서 별을 보며 누웠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그러나 그 별은 고향에서 어머니의 무릎에서 보던 별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몹시 피곤했습니다. 그는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피곤했습니다. 그는 에서에 대한 두려움과 장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이 때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12-15을 보겠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 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 꿈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여 주신 꿈이요 비전이었습니다. 이 비전은 하늘나라의 세계, 영적 세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곧 지상 세계에서 천상까지 통하여 있었고, 현실 세계에서 영원한 세계와 연결된 놀라운 꿈이었습니다. 이는 현재 야곱의 모습을 잘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현재 당면한 문제로 비전과 꿈이 없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개척해야 하였습니다. 사람이 꿈과 비전이 없으면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전과 꿈과 희망이 있다면 현실의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그네 인생길에 야곱에게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비전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러면 꿈은, 비전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는 곳에 꿈, 비전이 있습니다(행2:17). 비전은 인간적인 욕망과 비슷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욕망은 자기에게서 출발합니다. 비전은 하나님 중심이지만, 욕망은 자기중심입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욕망은 자기 영광을 드러냅니다. 비전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지만, 욕망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피해를 끼칩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만 욕망은 자기를 기초한 것이므로 일시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허무하게 끝납니다. 인간적인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그 내면이 불안합니다. 조급하며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비전에 충만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높아지고자 하고, 크고자 하고, 섬김 받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전이 아닙니다. 부하고자 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비전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비전은 세상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항하는 것입니다. 비전은 영원한 것을 구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헌신하고 축복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비전은 일반적 비전과 구체적 비전으로 나누어집니다. 일반적인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이는 모든 믿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동일한 것입니다. 이런 비전을 소유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전을 구체적 비전, 즉 사명(the Mission)이라고 표현되는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 말씀으로 제자를 양육하여 가정과 캠퍼스와 민족과 열방을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과 치유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기존의 모든 것을 무조건 파괴하고자 합니다. 파괴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정파괴, 질서파괴, 가격파괴, 학력파괴, 역사파괴 등 파괴만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파괴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파괴되어가는 가정을 회복하고 영적 질서를 회복하고 윤리와 도덕을 회복하고 사명을 회복하여 교회의 부흥과 캠퍼스를 복음화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에게나 비전을 주시는데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전 없이 살아갈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을 향한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비전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비전에 항상 수반되는 것은 헌신입니다. 헌신은 열심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자신을 매일 새롭게 점검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비전을 아는 사람은 그 비전에 따르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차 받게 될 영광을 바라보며 자신을 주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비전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단 한번 밖에 없는 생명을 주님을 위해 드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드릴 각오가 되어 있다면 당신의 삶에 크고 놀라운 비전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개척이나 모험을 싫어하고 안정된 생활을 희구하며 현실에 안주합니다. 십자가를 싫어하고 할 수 있는 대로 편안하게 살고자 합니다. 이런 자들은 작은 소원에 얽매이고 생각하는 것이 밴댕이 뱃속처럼 작습니다. 고상하고 거룩한 영적 소원보다 죄의 소욕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비전이 충만한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구원 역사에 쓰임 받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가득합니다. 현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또 말과 행동에 박력이 있고 삶에는 생동감이 넘칩니다. 생각하는 스케일이 크고 웅장하며, 개척 정신과 모험 정신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최고의 핵심 가치로 생각하고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고자 합니다. 이처럼 비전이 있는 사람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위대한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야곱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요 이삭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되고자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약속의 하나님이시요 역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야곱의 일생을 돌보시고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임한 은혜입니다. 야곱은 한 마디로 이기적인 사람으로 다른 사람에게 배려가 전혀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런 야곱을 일생동안 지키시고 돌보고 사랑하고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3. 야곱의 서원(16-22)

야곱은 잠에서 깨어 외쳤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이를 볼 때에 야곱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을 인식하는 정도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났습니다. 이를 일컬어 벧엘 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벧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만나자 몹시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임을 깨닫고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전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본래 이름은 루스였습니다.

그는 외로운 나그네 길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기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20-22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야곱은 영적인 축복에는 관심이 없고 15절 말씀인 자기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함께하여 주시겠다는 당면한 현실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기적이고 조건적이며 좀 얌체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서원이 공리적이고 조건적이라고 매도할 수만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어찌 할 수 없는 현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고 돌보아 달라는 절실하고 진실한 서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 인생은 자기가 개척하고 자기의지와 뜻대로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야곱은 이 서원을 출발로 비로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서원이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겠다고 구체적으로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서원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또한 서원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성을 맺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다시 말하여 자기의 뜻과 이성과 감정을 기초로 사는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겠다는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서원을 중심으로 외가인 밧단아람에서 야곱을 돌보시고 키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서원을 기억하시고 재물을 얻을 수 있는 지혜와 삶의 방향을 주셨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성실한 야곱을 끝까지 하나님의 종이 되기까지 키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진실 되게 서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신 자라 할지라도 꼬투리가 있어야 키우십니다. 바로 벧엘의 서원은 야곱을 키우실 수 있는 작은 꼬투리였습니다. 이는 마치 뿔난 송아지를 내버려두면 키울 수 없지만 코를 뚫고 멍에를 메기까지 훈련을 시키면 온순하고 또 쓸모 있는 소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서원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원을 얽매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잡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망아지와 같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원을 하여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을 때 하나님은 일생동안 내 인생을 돌보시고 복주십니다. 서원하면 한나가 생각납니다. 한나는 아기를 주시면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삼상1:11). 한나가 아들을 낳았을 때에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서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전5:4-6).

하나님, 고결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큰 꿈을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서원기도를 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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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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