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노라

조회 수 3477 추천 수 0 2012.07.11 02:21:27
사무엘상 17:1-58, 요절 17:45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가노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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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다윗의 통쾌한 승리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로 The Lord of Hosts입니다. 호스트는 파티의 주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군대를 뜻합니다. 그래서 보다 일반적으로 번역하면 The Lord of Armies입니다. 성경에 이 단어가 무려 282번 등장합니다. 그런 경우에 거의 예외 없이 여호와 하나님은 천사들을 군대로 부르시는 분으로 요약합니다. 성경에 만군의 여호와로 표현할 때에는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향하여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간다고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권능으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그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상황이 그에게 불리해 보여도 다윗은 보이는 상황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다윗은 전쟁이 여호와께 속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싸웠습니다. 그 때 그는 골리앗을 한 순간에 격파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악령과의 싸움이요, 죄와 사망 권세와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했을 때 승리했습니다. 우리 또한 만군의 여호와를 믿을 때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위협하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군대는 맞은편 엘라 골짜기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었습니다. 가드에는 아낙 자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낙 자손은 장대한 족속입니다(민13:28-33). 그는 키가 여섯 규빗 한 뼘(3.3m)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습니다. 그 어린갑의 무게는 놋 오천 세겔(56kg)이었습니다.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는데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그 창날만도 철 육백 세겔(6.7kg)이었습니다. 그는 완전 무장을 하였습니다. 그 앞에는 방패 든 자가 딱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런 골리앗이 나타나 베틀채 같은 창자루를 휘두르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양 진영의 챔피언들끼리 싸워서 진편은 이긴 편의 종이 되자”고 소리 질렀습니다(8,9). 골리앗은 당장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엄포만 놓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40일간을 朝夕으로 나타나 위협했습니다. 골리앗이 조석에만 나타나는 것은 체구를 더 크게 보이고 위엄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사울은 골리앗을 볼 때마다 겁에 질려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골리앗 앞에서 어떠했습니까? 다윗은 군에 갈 수 없는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형들이 군에 입대하자 집에서 아버지의 양을 치다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면회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마침 골리앗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위협하고 모욕했습니다. ‘야, 사울의 쫄개들아, 대장을 보내어 한판 붙어보자!’ 그러자 사울과 백성들은 기가 죽어 아무 소리도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24). 다윗은 이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은 그를 할례 없는 자로 보았습니다. ‘할례 없다’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사신 하나님의 군대로 보았습니다. ‘사신 군대’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사신 하나님의 군대로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에 블레셋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떤 눈으로,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는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됩니다.

민수기 13:33절을 보면 가나안을 정탐한 12두령 중에 10두령은 가나안 사람들을 보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에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이를 일컬어 메뚜기 자아상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메뚜기 자아상을 가졌을 때에 새 역사를 창조하는 대열에 설 수 없었습니다. 본래 그들이 메뚜기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파를 대표하는 두령,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메뚜기 자아상을 가졌을 때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땅을 악평했습니다(민13:32). 사람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면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12명이 똑같이 가나안 땅을 보았습니다. 10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거민이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했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았습니다. 10명은 그들의 거민은 강하고 대장부들로 보았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을 밥으로 보았습니다.

무엇이 똑같은 땅,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아상을 따라 보았고 자아상을 따라 느꼈고 자아상을 따라 반응했고 자아상을 따라 말했고 자아상을 따라 행동했고 자아상을 따라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자아상이란 자신에 대한 생각, 자신에 대한 의견, 자신에 대한 가치, 자신에 대한 능력을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가의 의견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각자 자아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잡초 같은 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봅니다. 반면에 자신을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봅니다. 이 자아상은 우리의 외모보다 우리의 내면에 형성됩니다. 외모가 자아상을 형성하는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입니다. 우리의 자아상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위기에 처할 때, 어떤 임무가 주어질 때, 갑작스러운 사건에 직면했을 때 드러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좋은 면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잘 나온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잘 나오지 않은 사진은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20년 만에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딸 조은이가 잘 나오지 않았다고 사진을 걸어놓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자기 얼굴이 잘 나온 사진을 걸어놓고자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면의 자아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부정적인 자아상, 열등의식의 자아상, 어두운 자아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추억 집착형으로 주로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가지고 비판하고 원망합니다. 민수기 14장을 계속 보세요. 우리가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과거 역사를 회상하며 계속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부추기어 사람들을 규합하여 당을 짓는데 아주 탁월합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악평하는데 특출합니다(민14:2). 그들의 선동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눈으로 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일뿐입니다. 우리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도 잘 아시고 우리의 가능성도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열등감에 빠지거나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특출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사람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긍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고 좋게 평가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악평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자신감이 있었고 용기가 있었습니다. 자신감과 용기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능력과 용기의 원천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고자 할 때 큰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말을 듣던 엘리압은 다윗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 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 형은 양을 돌보지 않고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형은 다윗의 믿음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형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형의 책망 앞에 조금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당히 말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29)?” 그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제 사울은 다윗의 외모를 보고 무시했습니다(33). 이쯤 되면 다윗은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무시를 당하면서 굳이 전쟁터에 나갈 필요가 없다며 “잘 들 해 보세요” 하고 전쟁터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사울에게 자기의 과거의 무용담을 들어 자기도 용사임을 밝혔습니다. ‘어느날 목장에 사자와 곰이 침입했습니다. 다윗은 사자나 곰이 새끼를 움키면 그를 따라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자신을 해치려 하면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서 죽였습니다.’ 대개 목동들은 사자나 곰이 나타나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쫓아가서 양을 구했습니다. 이는 목자의 심정과 양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심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덧입게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또 그가 사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믿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다윗의 전 인생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믿음을 현재화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골리앗의 손에서도 건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믿음으로 골리앗에 도전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군복을 입히고 머리에 놋투구를 씌우고 갑옷을 입혀서 보냈습니다. 다윗은 군복을 입고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시험적으로 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걷다가 거추장스러워 벗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막대기와 시내에서 가져 온 매끄러운 돌 다섯 개와 물매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겨 보려고 했습니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많은 재물과 병역을 면제하고 딸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모든 것을 내 팽개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막대기와 물매만을 들고 나갔습니다. 다윗이 가지고 간 매끄러운 돌과 물매는 사울이 준 것에 비해 시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과 물매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군복을 입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즐겨하고, 자기 몸에 맞는 것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물매는 무엇입니까? 물매란 목동들이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필수 제구입니다. 다윗이 물매로 골리앗의 이마를 꿰뚫은 것을 볼 때 다윗이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물매 던지는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물매를 던졌을 것입니다. 그는 수백 번, 수천 번 물매 연습을 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손은 물매를 하도 던졌기 때문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야구 선수 이승엽이 오늘의 이승엽이 되기까지는 우연히 저절로 되었겠어요? 다윗의 물매가 골리앗의 이마를 뚫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는 피나는 투쟁의 결과입니다. 이 물매는 그에게 비장의 무기였습니다. 이런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골리앗을 바라보니 골리앗의 허점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마였습니다. 사단은 사단입니다. 그러나 사단도 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사상과 이즘도 완전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6:17,18절은 보겠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우리는 날카로운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49:2a절은 말씀합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날카로운 말씀의 사람이 되려면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이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여야 합니다. 그 때 어떤 누구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사상과 이즘과 이데올로기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4,5절을 보면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했습니다.

골리앗은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점점 다윗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골리앗은 사방을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는 기가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완전무장을 하고, 방패 든 자를 앞세우고 나왔는데, 한 소년이 막대기를 들고 자기와 싸우겠다고 나오니 말입니다. 막대기는 들개나 들짐승들을 쫓을 때 사용합니다. 골리앗은 몹시 불쾌하여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로 왔느냐(43)?”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이 감히 나와 싸우겠다고 나와!’ 화를 내며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골리앗은 신경질을 부리며 거대한 몸짓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 왔습니다. 이 때 다윗은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 한 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빙빙 돌려서 물매로 골리앗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골리앗은 썩은 고목이 쓰러지듯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달려가서 그의 목을 밟고, 골리앗의 칼을 빼어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사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던 그의 교만한 머리를 들고 사울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57). 블레셋 군대들은 골리앗의 죽음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망갔습니다. 지금까지 숨어서 두려워 떨고만 있었던 이스라엘 군대들은 일어나서 함성을 지르며 도망가는 블레셋을 추격하여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무찔렀습니다. 그리하여 사아라임에서 가드와 에그론에 이르는 길에는 상한 블레셋의 군대가 다 뒹굴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골리앗은 칼과 창과 방패로 무장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주는 무기를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데 있음을 알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승리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개 한 마디 때려잡기도 힘든 막대기와 물매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어떤 대적도 이길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수에 있는 것이 아님을 믿었습니다(삼상14:7).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온전히 믿는 자들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12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는 치유의 희망을 가지고 지나가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깃을 스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군가가 전혀 다른 의미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고 있는 것을 아시고 물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때 여인이 “저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내가 이 분의 옷깃을 만지는 순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터치는 믿음의 터치였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는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앎이로다(눅8:46).” 믿음은 능력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승리와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군의 여호와를 믿으십시오. 십자가의 놀라운 능력과 용서와 사랑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자신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자신의 눈으로 보면 거대한 물질과 권세 앞에 우리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또 장대한 외국 학생들에 비친 우리 선교사님들의 모습은 왜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보호자가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의 방패가 되시고, 나의 생명의 구주가 되십니다. 항상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할 때에 거기에 능력이 있고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고 밝고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이때 매사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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