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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 3 강 (1:12,13, 요절, 1:13)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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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거룩하시고 순결하시며 아무 죄가 없으신 주님이시지만 세례 요한에게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인침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 루시퍼입니다. 루시퍼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루시퍼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하나님께 대항하다가 쫓겨난 천사입니다. 마귀는 세상과 공중에 살면서 아래로는 인간을 유혹하고, 위로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도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는 고소자, 파괴자, 시험하는 자, 악한 자, 바알세불, 더러운 존재, 벨리알, 이 세상의 신, 귀신의 왕, 이 세상의 임금, 공중 권세 잡은 자,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용 혹은 옛 뱀 등으로 묘사합니다. ‘시험하다’란 헬라어로 ‘페이라제인’으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temptation, 즉 유혹이란 뜻과 또 하나는 test입니다. temptation은 마귀가 쓰는 단어요, test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받는 훈련이라면 마귀의 시험, 유혹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메시아로 출발하실 그 때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은혜의 때, 새롭게 출발하고자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광 뒤에는 고난이 있고, 승리 뒤에는 시련이 있고, 은혜 뒤에는 시험이 있습니다. 높음이 있으면 낮음이 있고, 영광의 탈출이 있으면 패배의 역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때, 축복의 때, 새롭게 출발하고자 할 때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했고,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습니다.
인간은 욕심에 이끌려 시험을 받습니다(약1:13,14).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down되었을 때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이는 첫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은 아무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고 넘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온 인류는 죄 중에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와 싸워서 이기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이들이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고전15:22). 또 시험을 받는 연약한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고자 함에 있습니다(히2:18,4:15).
우리는 굳게 결심하지만 연약하여 쉽게 절망하고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은혜로운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치 않고,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히4:16). 또 한 가지는 장차 우리의 싸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과 달리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환경과 상황을 탓합니다. 환경이 이러하고, 상황이 이러하여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것을 보면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서 유혹을 받고 넘어졌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이를 볼 때 성공과 실패는 환경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환경을 바꿉니다. 오히려 역경은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 속담 중에 전화위복, 새옹지마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환경이 사람을 타락시키지, 역경이 타락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시련과 고통의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고통과 환경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으로 인해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환경을 만듭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까? 예수님은 이를 유혹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첫째, 마귀는 물질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고 굶주리셨습니다. 광야는 기온차가 심해 낮에는 덥고 저녁에는 춥습니다. 사람이 가장 슬플 때는 춥고 배고플 때일 것입니다. 사람이 한 끼를 굶으면 힘이 없게 되고, 두 끼를 굶으면 슬픈 생각이 들고, 세 끼를 굶으면 눈이 노래지고, 네 끼를 굶으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사십 일 동안 굶으신 예수님은 아마 주위의 돌들이 모두 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 마귀가 조용히 다가와서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만일’은 마귀의 유혹의 수법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를 사용하여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주 기가 막히게 유혹합니다.
첫 사람 아담을 유혹할 때에도 마귀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유혹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서 고생하느냐? 네가 만일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그 꼴이 무슨 꼴이냐?’ 메시아로서의 사명도 좋지만 먼저 먹어야 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 부족하여 굶고 있느냐?” 유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약하고 물질에 약하고 육체에 약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현실 문제 앞에서는 벌벌 떱니다. 사실 배고픈 문제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무슨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고, 심지어 자녀들까지도 좋은 대학을 보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미래의 확실한 빵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입니다. 이럴 때에 “야,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해” 이렇게 유혹할 때에 그래 네 말이 맞아 하고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공명심을 자극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라” 조롱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는 사람이 왜 너를 구원하지 못하느냐?’ 유혹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내려와 그들을 불로 심판하시고 다시 십자가에 올라가셨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끝장, 막장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사람의 공명심을 자극하여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모든 말씀’이란 문장으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삶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원동력이 됩니다. 말씀은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말씀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있고, 사단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마귀의 궤계를 파하는 성령의 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란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빵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하는 기간을 제하고는 열심히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배고픔도 아시고 오병이어로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요6:12).
그러나 예수님은 빵을 위해서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예수님의 능력을 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도록 유혹합니다. 즉 사단은 영적인 메시아이기 전에 먼저 빵 문제를 해결하는 물질의 메시아가 되도록 유혹했습니다. 즉 빵 문제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빵 문제는 물질 문제, 곧 먹고 사는 문제, 현실 문제, 고상한 표현으로 경제 문제요, 장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철학을 논하고, 예술을 하고, 학문을 하고, 사명을 감당하더라도 배가 불러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미가 있고 값진 삶을 살려고 하다가도 빵 문제, 곧 장래가 불확실하다 싶으면 이를 포기합니다.
반면에 빵 문제만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면 뭣이든지 하겠다고 합니다. 마귀는 첫 사람 아담을 빵 문제로 유혹하여 넘어뜨린 후부터는 재미가 붙어, 빵 문제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마귀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돈 맛을 보면 돌게 됩니다. 북한의 주체사상도 빵 문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 신봉자였던 등소평은 黑猫든 白猫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지식인들도 돈 때문에 양심을 팝니다. 마귀는 지금까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인류를 모두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공산주의가 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은 극한 상황에서도 먹는 것 때문에 메시아의 길을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현실이 이런 데 어쩔 수 없지 않나? 없는 데 어쩌란 말인가?’ 현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육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경제제일주의를 부르짖어 영의 양식보다 육의 양식을 더 귀히 여깁니다.
오늘날 윤리와 도덕이 타락하고 부정부패가 심화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명인과 생활인의 차이점은 어려운 상황에서 물질을 의지하느냐, 아니면 말씀을 의지하느냐에 있습니다. 사명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주님의 길을 택합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잘 먹고 죽은 사람이나, 잘 못 먹고 죽은 사람이나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좀 부족하게 살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다운 삶,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을 보면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이 버는 것을 기초로 성공 유무를 평가합니다. 그러다보니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작아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쁘게 살아갑니다. 대학은 빵 공장 알선업소로 전락한지 오래되었습니다. 모두가 물질로 평가하고 모두가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행복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福이란 한자어로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드릴 때에 주어지는 복을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이란 내적인 복과 외적인 복의 합산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에 내 인생을 all in하고 투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을 물질에 all in한다면 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거룩하고 영적인 존재로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영적인 존재요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명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앞세우고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때 환경을 초월하여 궁궐이나 초막이나 모두가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와 목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 40년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는 아무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무려 40년간 매일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광야 중에도 먹여주십니다. 사장이나 부모님이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를 입혀주시고 먹여주십니다.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이 2월 19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다음날 교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분은 교장이 되기 위해 힘든 석박사를 받았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교장 사령장도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처럼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물질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가졌던 돈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명예도 권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가 부르실 때에 말씀하지 않고, 배가 고프실 때에 말씀하심으로 영적인 가치관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풍요로운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둘째, 마귀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여지없이 패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거룩한 산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즉시 시편 91:11,12절을 인용하여 뛰어 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지키시고 받들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당시에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에게 챔피언 벨트를 주는 시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멋진 폼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립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쳐다봅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거의 닿을 지경에 천사들이 나타나 사뿐히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땅에 내립니다. 예수님은 손을 흔들며 답례하며 무개차를 타고 행진을 합니다. 이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 뛰어 내림으로 단번에 메시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유혹입니다. 이 말은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인생을 맡겼다가 그 말씀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말씀이 과연 그대로 이루어지는가, 아닌가를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시험해 보고 그 말씀이 확실하다는 경험을 해 본 후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여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불신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불신이 생긴다면 함께 일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불신이 생기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께 맡길 수 없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의심하여 땅에 떨어지게 되면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험하여 땅에 뛰어 내릴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받쳐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귀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7).”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 말씀으로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험을 받으실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단이 노리는 것은 불신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중에 하나는 불신을 뽑고, 믿음을 심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불신입니다. 반면에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적은 불신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힘을 줍니다. 반면에 불신은 절망과 슬픔을 주고, 무력하게 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사단은 시시각각으로 불신을 심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사람 사이에도 불신을 심으려고 여러 모양으로 미혹합니다. 마귀는 목자와 양들 사이에 불신을 심습니다. 동역자들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가까운 사이에 불신을 심습니다. 마귀가 역사하여 불신을 심으면 그 때부터 불행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신의 대상이 아닌 믿고 신뢰해야 할 믿음의 대상입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 불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이루신 줄로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정말 나를 사랑하는가 불신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고 신뢰하여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셋째, 마귀는 예수님을 세상 권세와 영광으로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여지없이 패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천하만국 중에는 로마 황제의 보좌도 포함될 것입니다. 순식간에 보여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정신이 얼떨떨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보암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9절을 보겠습니다.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 세상 권세와 영광은 매력적입니다. 세상 권세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이 권세를 잡게 되면 그 누리는 특권과 권세가 대단합니다.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권세와 세상 영광을 얻고자 밤을 새워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엎드려 경배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예수님도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기 위해 오셨는데, 이는 둘도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경배하라’는 worship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헌신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경배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경배하느냐에 따라 그의 종이 됩니다(롬6:16). 예수님이 마귀에게 경배하게 되면 예수님은 마귀의 종이 됩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떠나 마귀를 경배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이는 파멸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처럼 속삭입니다. 세상 권세와 영광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유혹합니다. 그러나 세상 영광과 권세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모든 영광을 얻었던 솔로몬은 ‘모든 영광과 권세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행복과 자유를 주는 것 같이 말을 하지만 실은 사단의 종으로 만들어 죄와 사망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경배합니다. 사람을 경배합니다. 자기 자신을 경배합니다. 권력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의 어떤 것도, 위대한 사람이나 형상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섬기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섬겨야지, 중용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짝하는 것은 혼합주의로 영적인 간음 행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우리 하나님만이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쉬운 방법으로 예수님께 영광을 얻으라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스럽고 외롭습니다. 이런 십자가를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렇게 힘들게 할 것이 아니라 쉽게 이를 성취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는 쉽게 살고자 하는, easy going입니다. 세상에 누구도 어렵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쉽게 제자양성을 할 수 없을까? 쉽게 신앙 생활할 수는 없을까? 쉽게 좋은 학점을 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을까? 쉽게 목자 박사가 될 수 없을까?’ 마귀는 우리에게 십자가 없이 쉽게 살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영광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생들이 다단계 판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이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접근하여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두 마귀의 속삭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한 영광, No cross, No crown을 가르치십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의 영광은 결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경배합니다. 사람을 경배합니다. 자기 자신을 경배합니다. 권력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겸해서 세상을 섬겨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짝하는 것은 혼합주의로 영적인 간음 행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우리 하나님만이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누가복음 4장 13절을 보면 마귀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패하자 얼마 동안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틈만 있으면 찾아와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이기자 천사가 수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말씀으로 이를 물리쳤습니다. 말씀은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말씀으로만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단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마귀의 궤계를 파하는 성령의 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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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거룩하시고 순결하시며 아무 죄가 없으신 주님이시지만 세례 요한에게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인침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 루시퍼입니다. 루시퍼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루시퍼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하나님께 대항하다가 쫓겨난 천사입니다. 마귀는 세상과 공중에 살면서 아래로는 인간을 유혹하고, 위로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도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는 고소자, 파괴자, 시험하는 자, 악한 자, 바알세불, 더러운 존재, 벨리알, 이 세상의 신, 귀신의 왕, 이 세상의 임금, 공중 권세 잡은 자,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용 혹은 옛 뱀 등으로 묘사합니다. ‘시험하다’란 헬라어로 ‘페이라제인’으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temptation, 즉 유혹이란 뜻과 또 하나는 test입니다. temptation은 마귀가 쓰는 단어요, test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받는 훈련이라면 마귀의 시험, 유혹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메시아로 출발하실 그 때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은혜의 때, 새롭게 출발하고자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광 뒤에는 고난이 있고, 승리 뒤에는 시련이 있고, 은혜 뒤에는 시험이 있습니다. 높음이 있으면 낮음이 있고, 영광의 탈출이 있으면 패배의 역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때, 축복의 때, 새롭게 출발하고자 할 때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했고,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습니다.
인간은 욕심에 이끌려 시험을 받습니다(약1:13,14).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down되었을 때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이는 첫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은 아무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고 넘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온 인류는 죄 중에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와 싸워서 이기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이들이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고전15:22). 또 시험을 받는 연약한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고자 함에 있습니다(히2:18,4:15).
우리는 굳게 결심하지만 연약하여 쉽게 절망하고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은혜로운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치 않고,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히4:16). 또 한 가지는 장차 우리의 싸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과 달리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환경과 상황을 탓합니다. 환경이 이러하고, 상황이 이러하여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것을 보면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서 유혹을 받고 넘어졌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이를 볼 때 성공과 실패는 환경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환경을 바꿉니다. 오히려 역경은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 속담 중에 전화위복, 새옹지마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환경이 사람을 타락시키지, 역경이 타락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시련과 고통의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고통과 환경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경으로 인해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뻐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환경을 만듭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까? 예수님은 이를 유혹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첫째, 마귀는 물질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고 굶주리셨습니다. 광야는 기온차가 심해 낮에는 덥고 저녁에는 춥습니다. 사람이 가장 슬플 때는 춥고 배고플 때일 것입니다. 사람이 한 끼를 굶으면 힘이 없게 되고, 두 끼를 굶으면 슬픈 생각이 들고, 세 끼를 굶으면 눈이 노래지고, 네 끼를 굶으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사십 일 동안 굶으신 예수님은 아마 주위의 돌들이 모두 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 마귀가 조용히 다가와서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만일’은 마귀의 유혹의 수법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를 사용하여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주 기가 막히게 유혹합니다.
첫 사람 아담을 유혹할 때에도 마귀는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유혹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곳에서 고생하느냐? 네가 만일 하나님이 아들이라면 그 꼴이 무슨 꼴이냐?’ 메시아로서의 사명도 좋지만 먼저 먹어야 되지 않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 부족하여 굶고 있느냐?” 유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약하고 물질에 약하고 육체에 약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현실 문제 앞에서는 벌벌 떱니다. 사실 배고픈 문제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무슨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고, 심지어 자녀들까지도 좋은 대학을 보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미래의 확실한 빵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입니다. 이럴 때에 “야, 식후경이란 말이 있지.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해” 이렇게 유혹할 때에 그래 네 말이 맞아 하고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공명심을 자극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라” 조롱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는 사람이 왜 너를 구원하지 못하느냐?’ 유혹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내려와 그들을 불로 심판하시고 다시 십자가에 올라가셨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끝장, 막장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사람의 공명심을 자극하여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모든 말씀’이란 문장으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삶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원동력이 됩니다. 말씀은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말씀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있고, 사단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마귀의 궤계를 파하는 성령의 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란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빵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하는 기간을 제하고는 열심히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배고픔도 아시고 오병이어로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요6:12).
그러나 예수님은 빵을 위해서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예수님의 능력을 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도록 유혹합니다. 즉 사단은 영적인 메시아이기 전에 먼저 빵 문제를 해결하는 물질의 메시아가 되도록 유혹했습니다. 즉 빵 문제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빵 문제는 물질 문제, 곧 먹고 사는 문제, 현실 문제, 고상한 표현으로 경제 문제요, 장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철학을 논하고, 예술을 하고, 학문을 하고, 사명을 감당하더라도 배가 불러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미가 있고 값진 삶을 살려고 하다가도 빵 문제, 곧 장래가 불확실하다 싶으면 이를 포기합니다.
반면에 빵 문제만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면 뭣이든지 하겠다고 합니다. 마귀는 첫 사람 아담을 빵 문제로 유혹하여 넘어뜨린 후부터는 재미가 붙어, 빵 문제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마귀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돈 맛을 보면 돌게 됩니다. 북한의 주체사상도 빵 문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 신봉자였던 등소평은 黑猫든 白猫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지식인들도 돈 때문에 양심을 팝니다. 마귀는 지금까지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인류를 모두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공산주의가 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은 극한 상황에서도 먹는 것 때문에 메시아의 길을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현실이 이런 데 어쩔 수 없지 않나? 없는 데 어쩌란 말인가?’ 현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육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경제제일주의를 부르짖어 영의 양식보다 육의 양식을 더 귀히 여깁니다.
오늘날 윤리와 도덕이 타락하고 부정부패가 심화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먼저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명인과 생활인의 차이점은 어려운 상황에서 물질을 의지하느냐, 아니면 말씀을 의지하느냐에 있습니다. 사명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주님의 길을 택합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잘 먹고 죽은 사람이나, 잘 못 먹고 죽은 사람이나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좀 부족하게 살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다운 삶,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을 보면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이 버는 것을 기초로 성공 유무를 평가합니다. 그러다보니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작아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쁘게 살아갑니다. 대학은 빵 공장 알선업소로 전락한지 오래되었습니다. 모두가 물질로 평가하고 모두가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행복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福이란 한자어로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드릴 때에 주어지는 복을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이란 내적인 복과 외적인 복의 합산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에 내 인생을 all in하고 투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을 물질에 all in한다면 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거룩하고 영적인 존재로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영적인 존재요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명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앞세우고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때 환경을 초월하여 궁궐이나 초막이나 모두가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와 목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 40년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는 아무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무려 40년간 매일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광야 중에도 먹여주십니다. 사장이나 부모님이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를 입혀주시고 먹여주십니다.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이 2월 19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다음날 교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분은 교장이 되기 위해 힘든 석박사를 받았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교장 사령장도 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처럼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물질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가졌던 돈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명예도 권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가 부르실 때에 말씀하지 않고, 배가 고프실 때에 말씀하심으로 영적인 가치관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풍요로운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둘째, 마귀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여지없이 패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거룩한 산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즉시 시편 91:11,12절을 인용하여 뛰어 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지키시고 받들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당시에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에게 챔피언 벨트를 주는 시합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멋진 폼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립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쳐다봅니다. 예수님이 땅바닥에 거의 닿을 지경에 천사들이 나타나 사뿐히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땅에 내립니다. 예수님은 손을 흔들며 답례하며 무개차를 타고 행진을 합니다. 이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 뛰어 내림으로 단번에 메시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유혹입니다. 이 말은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인생을 맡겼다가 그 말씀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말씀이 과연 그대로 이루어지는가, 아닌가를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시험해 보고 그 말씀이 확실하다는 경험을 해 본 후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여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불신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불신이 생긴다면 함께 일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불신이 생기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께 맡길 수 없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의심하여 땅에 떨어지게 되면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험하여 땅에 뛰어 내릴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받쳐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귀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7).”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 말씀으로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험을 받으실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경배하고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단이 노리는 것은 불신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중에 하나는 불신을 뽑고, 믿음을 심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불신입니다. 반면에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적은 불신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힘을 줍니다. 반면에 불신은 절망과 슬픔을 주고, 무력하게 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사단은 시시각각으로 불신을 심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마귀는 사람 사이에도 불신을 심으려고 여러 모양으로 미혹합니다. 마귀는 목자와 양들 사이에 불신을 심습니다. 동역자들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가까운 사이에 불신을 심습니다. 마귀가 역사하여 불신을 심으면 그 때부터 불행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신의 대상이 아닌 믿고 신뢰해야 할 믿음의 대상입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 불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이루신 줄로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정말 나를 사랑하는가 불신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고 신뢰하여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셋째, 마귀는 예수님을 세상 권세와 영광으로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여지없이 패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천하만국 중에는 로마 황제의 보좌도 포함될 것입니다. 순식간에 보여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정신이 얼떨떨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보암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9절을 보겠습니다.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 세상 권세와 영광은 매력적입니다. 세상 권세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이 권세를 잡게 되면 그 누리는 특권과 권세가 대단합니다.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권세와 세상 영광을 얻고자 밤을 새워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엎드려 경배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예수님도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기 위해 오셨는데, 이는 둘도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경배하라’는 worship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헌신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경배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경배하느냐에 따라 그의 종이 됩니다(롬6:16). 예수님이 마귀에게 경배하게 되면 예수님은 마귀의 종이 됩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떠나 마귀를 경배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이는 파멸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처럼 속삭입니다. 세상 권세와 영광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유혹합니다. 그러나 세상 영광과 권세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모든 영광을 얻었던 솔로몬은 ‘모든 영광과 권세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행복과 자유를 주는 것 같이 말을 하지만 실은 사단의 종으로 만들어 죄와 사망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경배합니다. 사람을 경배합니다. 자기 자신을 경배합니다. 권력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의 어떤 것도, 위대한 사람이나 형상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섬기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섬겨야지, 중용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짝하는 것은 혼합주의로 영적인 간음 행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우리 하나님만이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쉬운 방법으로 예수님께 영광을 얻으라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스럽고 외롭습니다. 이런 십자가를 좋아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렇게 힘들게 할 것이 아니라 쉽게 이를 성취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는 쉽게 살고자 하는, easy going입니다. 세상에 누구도 어렵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쉽게 제자양성을 할 수 없을까? 쉽게 신앙 생활할 수는 없을까? 쉽게 좋은 학점을 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을까? 쉽게 목자 박사가 될 수 없을까?’ 마귀는 우리에게 십자가 없이 쉽게 살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영광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대학생들이 다단계 판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이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접근하여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두 마귀의 속삭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한 영광, No cross, No crown을 가르치십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의 영광은 결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물질을 경배합니다. 사람을 경배합니다. 자기 자신을 경배합니다. 권력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겸해서 세상을 섬겨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짝하는 것은 혼합주의로 영적인 간음 행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우리 하나님만이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누가복음 4장 13절을 보면 마귀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패하자 얼마 동안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틈만 있으면 찾아와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이기자 천사가 수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말씀으로 이를 물리쳤습니다. 말씀은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말씀으로만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단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마귀의 궤계를 파하는 성령의 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