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1~3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순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겪은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금식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경건한 마음으로 지냈으면 합니다. 전쟁의 참화로 조국을 등지고 이웃 나라로 피난하여 고통을 겪는 우크라이나 피난민을 위해 온정의 손길을 베풀었으면 합니다.

본문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식은 죄와 죽음의 소식입니다. 반면에 가장 기쁜 소식은 죄 용서함과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역사 이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에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고 은혜로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의 고린도교회 개척 역사가 나옵니다. 당시 고린도는 거대한 신흥 항구 도시로 상업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경제가 번영한 만큼 방탕의 도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는데 1천명의 여사제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곳은 복음 전하기가 쉽지 않은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밤에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18:9~10)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1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이로써 고린도에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복음 위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고전 15:1~2).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육은 추하고 영은 선하다는 영지주의가 들어왔습니다. 이 사상은 예수님께서 육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과 몸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란 헬라어 원어로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과녁에는 여러 크기의 원으로 이루어진 점수가 있습니다.

양궁에서 중앙의 원을 맞추어야 명중이고 가장 높은 점수를 줍니다. 물론 사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과녁을 맞추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화살을 날립니다. 그런데 과녁에서 멀리 빗나갑니다. 사람들은 좀더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러면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성스러움과 속된 것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법과 하라는 법이 있습니다. 죄란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지 말라는 것을 행하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 남을 섬겨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등의 하나님의 계명을 적극 행하지 않는 것을 죄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하지 말라는 계명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는 것입니다(요일 3:3).

그리고 우리는 행동으로 옮긴 것에 대해서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옮기기 이전의 생각은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21~22절을 보면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죄는 십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은 우리의 건강과 명예와 가족 등,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2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계명은 우리가 자신의 부모의 존함을 함부로 말하지 않듯,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계명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심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날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순종하고 잘 섬겨야 합니다. 교육이 무엇입니까? +(등글원문)으로 를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근본 도리입니다. 5계명의 섬김의 대상은 직장 상사, 학교 선생님들, 교회의 목사님들과 교사들도 포함합니다. 반면에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돌아보아야 할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6계명은 나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7계명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순결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부에게만 성관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성윤리가 무너졌습니다. 간음을 사랑으로 정당화합니다. 이로써 한국의 사회 곳곳에 병리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8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불법으로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9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10계명은 자족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불만이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왜 지금 부동산 대란이 일어납니까? 왜 영끌이란 단어가 나옵니까? 아파트가 모자라서 그럴까요? 한국의 주택 보급률은 104%입니다(2021.11.22.). 반면 주택 소유율은 48.4%에 불과합니다(2021. 11.17). 사람들은 아파트를 많이 지으면 주택 소유율이 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식 투기, 땅 투기, 아파트 투기를 회개해야 합니다. 투기는 불법을 동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증식하는 행위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란 내가 정한 법이나, 다른 사람이 정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법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바르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2. 죄의 결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인간은 죄로 일생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을 보면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죄의 결과는 고통스럽고 무섭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짓는 순간에도 죄의식으로 뼈가 쇠하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로 멸망할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입니다(2:6).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영광의 면류관 대신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로 많은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당해야 할 조롱과 멸시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죄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야 하는데 대신 배척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사형 판결을 받고 채찍질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가시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조롱과 침 뱉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70Kg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에는 굵은 대못이 박혔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뒤틀리고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물과 피가 쏟아지면서 극심한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갔습니다(22:14~15).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저마다 비웃었습니다. ‘자기도 구원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남을 구원하겠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으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15:34) 누구에게나 소속감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게 결핍되면 자살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부터,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3.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

 

첫째, 나의 병과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53:4)

질고는 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병은 육신의 질병도 있지만 마음의 질병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은 모두 건강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특히 경쟁 사회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스트레스는 각종 병을 가져다 줍니다. 이로서 각종 마음이 병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사람들은 질병으로 마음의 고독과 슬픔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나의 질병에서 오는 모든 슬픔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질병을 모두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무지와 교만에서 오는 영혼의 질병을 담당하셨습니다. 교만(hubris)은 모든 질병의 원인입니다.

둘째, 나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허물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고, ‘죄악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이 저지르는 불법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허물과 죄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꽃병에 꽂힌 꽃과 같이 생명이 없습니다. 자라고 싶어도 자랄 수 없고, 열매를 맺고 싶어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길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국 우상 숭배자가 되어 정욕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1:21~23).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허물과 죄악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축복

첫째, 평화를 누립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53: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2:14~17)

인간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습니다. 인간 상호간에도 장벽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로 불신하고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상에서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원수된 것을 멸하셨습니다. 사람과 사이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도 화목하게 하는 화평의 십자가 입니다.

둘째, 나음을 입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저렇게 받은 상처로 남모르는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상처는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바뀐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뇌는 뇌간, 대뇌변연계, 대뇌피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변연계는 희로애락을 관장하고 감정을 인식합니다. 변연계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변연계가 각종 스트레스로 위축됩니다. 그리고 변연계의 편도에는 부정적인 것들을 죽을 때까지 기억합니다. 슬픔과 상처가 무의식과 의식 세계에 남아 있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특히 죄로부터 온 상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며 돌아가신 예수님께 나아가 고백하면 모든 상처가 깨끗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곪아터진 상처까지 깨끗하게 치료하여 주십니다.

셋째,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큰 문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으므로 국가 간의 분쟁, 남북 간의 냉전, 빈부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이 생깁니다. 서로 용서하지 못하여 정신 질환을 앓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저명한 내과의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병원의 환자의 50%를 퇴원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약을 투약에 있지 않고 환자의 마음에 용서의 마음을 주입하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에 불행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폴틸리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용서로 치유 받는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이다.” 우리가 용서할 때 마음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32절을 보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게 상처와 아픔을 준사람, 모함하고 배신한 사람, 인격적으로 모독한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둬들이지 않는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갖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는 나의 힘과 의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원수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내 마음에 미움이 사라지고 남을 용서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간 그 사람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이때 미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얼어붙은 차가운 마음이 녹아 사랑의 시내가 될 것입니다. 용서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의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벤허는 친구의 배신으로 분노와 증오와 복수로 살아옵니다. 그는 드디어 마차 경기에서 메살라를 이깁니다. 그의 복수는 끝난거 같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환라는 사실을 알고 또 다시 메살라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됩니다. 그런 그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마음에 참된 용서와 사랑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평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허물과 죄악을 단번에 대속하셨습니다. 이 예수님께 무거운 죄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속하신 예수님께 나의 슬픔과 아픈 마음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모든 상처와 미움을 주님의 십자가로 옮겨 놓으십시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 내 안에 있는 상차와 미움을 치료해 주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나의 상처가 치료되었으므로 주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고린도전서 15:4~11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4)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고정되어 있는 것,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힘으로도 죽음을 변경하거나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류는 다 죽었습니다. 세기의 미모의 여왕 엘리사벳 테일러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수은을 먹으면 오래 살 줄로 알고 수은을 먹고 불로초를 찾아나셨던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도 죽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아침 이슬을 받아먹었던 한 무제도 죽었고, 장을 비우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며 매일 강력한 설사약을 먹고 설사하던 루이 14세도 죽었습니다.

철학자 헤겔의 말대로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났고, 죽기 위해 살고 있으며, 죽음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로마의 개선장군이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승리 퍼레이드를 벌일 때 한 노예가 메멘토 모리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당신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싸움에서 이겼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날마다 코로나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죽음의 소식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죽음은 어디서 왔습니까? 성경은 죽음이 죄에서 왔다고 선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9:27). 심판 후에는 제 2의 심판인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21:8). 악한 일을 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납니다(5:29).

죄는 변하지 않는 죽음의 법칙에다 사람들을 묶어놓았습니다. 죽음에 묶인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 원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 권세를 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1 1:25~26).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역동적인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성경대로 살아나신 예수님(고전 15:4)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도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법아래 평등하다고 하지만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주고 유명한 변호사를 사면 죽을 자도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 인간을 평등하게 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왕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10대 독자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새신랑, 새 신부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죽음을 경험했다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죽음과 결부되면 기쁘다가도 슬퍼집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다스렸던 알렉산더 대제도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의 절대 권력만큼이나 비례해서 그에게 죽음은 슬픈 사건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이 죽음이 지배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4)

20세기 들어와서 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으며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사람들은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겪었습니다. 이제는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now and here’,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이 순간 행복이 중요하다’, ‘내가 존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실존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21세기에 들어와서 느낌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이즘이 등장했습니다. 포스트모던이즘의 명제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입니다.

이런 사조가 교회에 들어와 과거의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 지옥,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무엇인가 강하게 느끼는 것만을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혼자 느끼고 혼자 즐깁니다. 거기에다가 코로나19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지고, 자기 세계에 갇히는 자폐증 환자와 가나안 신자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런 껍질 속에 갇혀있는 사람을 꺼내어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도록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객관적이고 역사에 나타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 성경대로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구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떠나서 부활을 말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2413~35절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처절한 모습을 목격하고 시골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곁에서 동행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때 마음이 뜨거워져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24:32)

우리가 산에 가서 묵상하고, 수도원에 가서 수도를 해도 부활을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말씀으로만 이해가 되고 믿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14절을 보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용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구원은 미완성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는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란 하나님, 통치자를 말합니다. 과거에는 죄가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죄가 주인이 되어 우리를 이리저리로 끌고 다녔습니다. 죄가 슬픔과 절망을 심었습니다. 죄가 우를 어둠으로 몰아넣습니다. 죄가 슬픈 운명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나는 안 된다 생각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절망을 박차고 일어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어두움과 운명과 할 수 없다는 생각, 해도 안된다는 생각에서 밝고 희망이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사 죄와 사망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고전 15:57).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고, 주님이 부활하실 때 나도 함께 부활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으므로 죄가 나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죄는 항상 살아있는 매개체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었습니다. 이로써 다시는 죄가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할 때 나 또한 부활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대가로 모두 죽어야 했고, 언젠가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는 매우 중요합니다. 첫 열매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음 열매가 결정됩니다. 첫 열매가 사과이면 다음에도 반드시 사과가 열립니다. 첫 열매가 배이면 그 다음의 열매 또한 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나 또한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다 같이 따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해같이 빛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럽고 찬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어둠과 절망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슬픔과 근심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요 소망이요 빛입니다.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소망과 생명과 빛과 생명이 찬란하게 됩니다. 우리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 15:42~44).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

인간은 소망, 희망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뭔가 소망을 붙들고 삽니다. 70년대 한국의 소망은 국민소득 2만 달러였습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만 되면 행복의 여신이 찾아오리라 했습니다. 지금 한국은 국민소득 35000달러, 주택보급률 104%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이 행복한 나라입니까?

우리나라 행복지수가 146개국에 59번째입니다. 국민소득과 기대수명 수치는 높아졌지만 부정부패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관용은 낮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행복은 GDP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성장이 진전될수록 불만이 증대됩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허쉬의 성장의 사회적 한계 이론에서 성장 초반에는 만족감이 있지만 성장이 진전될수록 불만이 증대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소망 없는 절망스러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베드로전서 124절 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1~3절을 보면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좁게는 내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요, 넓게는 장차 우리가 가야할 본향입니다. 내 마음에 잔잔히 흐르는 평화와 화평, 이 기쁨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값지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산 소망은 재림하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천사장의 호위를 받으며 만유의 주요, 영광과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십니다.

이때 불신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상급이 되사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고,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순수하고, 진실하고, 확신에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2. 부활의 증인들(고전 15:5~1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 부활의 증인들을 소개합니다. 부활은 의학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경험입니다. “내가 봤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만큼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원수들 앞에서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떡과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그후 오백여 형제에게 동시에 보이셨습니다.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250명 이상의 증인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동생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출세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기도했던지 그의 무릎은 낙타 무릎같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부활이 아니고서는 바울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성도를 박해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성도들을 죽이기 위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가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찬란한 빛에 그는 그만 꼬꾸라졌습니다. 이 때 바울에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4~5)

예수님은 교회를 박해하고 주님을 박해하던 바울을 불러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은혜가 너무나 놀라워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전에 바울은 자신이 최고인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얼마나 덜 된 자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9~11)고 했습니다.

요즈음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이 아프면 혹시 코로나19가 아닌가? 누군가가 기침만 하면 혹시 코로나19에 오염되는 것이 아닌가? 마스크를 안쓴 사람이 옆에 있으면 불안합니다. 2030세대들은 아파트 문제로 불안합니다. 졸업생들은 졸업하고 취업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4050세대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두렵습니다. 6070세대는 노후 문제로 걱정합니다. 전세대가 모두가 두렵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심리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실체입니다. 죽음은 두려움이란 무기로 우리를 슬프게 하고 불안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두려움에 더 이상 시달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박살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두려움과 절망을 박살내셨습니다. 이제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과 죽음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변호사 시절에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했습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그는 좌절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그를 염려했습니다.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친구들은 링컨이 목숨이라도 끊을까봐 자기들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링컨이 어떻게 재기하여 미국의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에게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슬픈 운명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고, 인생역전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주시고,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도 달리 보이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좁은 시야를 넓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캠퍼스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방을 향하게 하시고, 열방을 품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대한 일을 시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역사의 주역이 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5:12~34

믿는 사람들의 부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강물은 흘러 어디로 가나. 구름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과연 우리는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인류 역사는 어디를 향해 가고, 나의 궁극적인 삶은 어떻게 되는가?” “죽은 이후의 세계는 어떠하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 사람이 자본주의 생존경쟁 체제에 살다 보니 이런 것들에 대해 별로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대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과목은 재테크와 부동산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철학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사상은 내일에 대한 삶을 말해 주며, 종교는 미래의 삶,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철학도 없고, 사상도 없으며 종교도 없으니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있을리 없습니다.

오직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가 멈추는 순간 관성법칙에 따라 넘어지고 깨지고 터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21세기에는 세계가 심장병 다음으로 우울증 환자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21세기에 들어와서 우울증이 점점 심화될까요? 이는 모든 판단 기준을 가치 중심이 아니라 물질 중심,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고 판단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물량으로 판단될 존재입니까? 인간이 과연 가치와 의미가 아니라 수량으로 판단될 존재입니까? 인간이 과연 지금’, ‘현재’, ‘여기에서최대한 즐기다가 한줌의 흙으로 끝나는 존재입니까? 성경은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한 이치이나,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고, 심판 이후에는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5:29).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이제 우리는 절망의 자리, 낙심의 자리, 의심의 자리에서 일어나 부활의 소망이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 부활의 필연성(고전 15:12~19)

고린도 성도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은 믿겠는데, 자신의 부활은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이 나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고린도교회 성도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책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

그러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지금까지 죽은 자가 부활한 예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부패의 과정을 거쳐 썩고 뼈와 해골만 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썩은 육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죽은 자가 산다는 것은 의학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으로 믿을 수 있는 것만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을 넘어서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을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해되지 않는 것을 다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다 받아들여지고, 다 믿어지고, 다 이해가 되는 순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지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 무릎을 꿇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한 후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가정법을 써서 죽은 자의 부활을 변증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첫째, 예수님의 부활도 없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

바울은 사람이 다시 살지 못하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지 못하셨다고 천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목마르셨고 배고프셨습니다. 주님은 육의 몸을 가진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다시 사는 일이 없다면 육신을 가진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실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또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삶의 지평을 하나님 나라에까지 넓히셨습니다.

둘째, 우리의 전하는 것이 헛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고전 15:14~15)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감사하고 구원받은 은혜를 증언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거짓말이 됩니다. 성경 공부는 헛것이 됩니다. 우리는 거짓 증인이요, 가짜를 전하는 사기꾼,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국제 사기꾼들로 모두 인터폴에 수배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무능한 자가 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5)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일이 없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시는 무능한 자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으면 무능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넷째,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6~17)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지 못했다면,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됩니다. 죄와 사망이 우리를 여전히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죽음이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다섯째,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망하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8~19)

수많은 믿음의 성도가 부활을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 생명을 초개 같이 버렸습니다. 초대 교회 순교자들은 사자 밥이 되고, 야간 투우장 경기의 조명이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며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부활의 믿음이 있을 때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부활이 없고 이생으로 끝나게 된다면 주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은 다 헛것이 됩니다. 주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이 아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이생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이생의 허영을 쫓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이 세상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쉽게 허영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생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죽음이 끝이라는 허무주의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이 주는 절망의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생으로 끝난다는 불신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생으로 끝난다는 한계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생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게 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장송곡을 부르는 죽음의 슬픔에서 부활의 기쁨과 환희와 생명을 노래하는 부활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기독교는 장송곡의 종교가 아니라 환희의 종교입니다.

2.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28)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성도들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첫 열매란 열매의 대표요, 장차 맺힐 열매의 sign입니다. 사과나무의 첫 열매가 사과면 다음 열매도 사과가 맺힙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부활하게 됩니다. 아멘.

그리고 첫 열매란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첫 열매는 하나님께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첫 열매를 받으시면 나머지 것도 다 받으신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첫 열매로 받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의롭게 해 주셨다는 확실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한 사람이 부활했다고 해서 어떻게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할 수 있습니까?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아담 한 사람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이 땅에 죄와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동일한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나의 옛사람, 자아, 육신, 아담의 속성이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할 때 나도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앉으셨습니다. 나도 주님과 함께 승천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육의 몸이 죽고 부활의 몸,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이를 대표 원리, 대신 원리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3~25절을 보면 부활의 차례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믿는 자들, 곧 성도들에게는 영광의 부활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개인의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장차 우주에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6~28절을 보면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을 대적하던 마귀 권세와 사망 권세를 멸하시고 영원히 왕노릇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 최고의 원수였던 사망이 멸망하게 됩니다.

죽음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인간을 가장 처절하게 지배해 왔습니다. 이 사망 권세는 젊은이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노인들을 처량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세상을 온갖 죄악의 온상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최후에는 죽음 자체도 영원히 없어집니다. 이때 만유가 하나님의 천지창조 질서대로 회복되고 예수님의 중보 사역도 끝나게 됩니다. 그후에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어 길이길이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그리던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만의 소원이 아닙니다. 로마서 822절을 보면 피조물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만유의 회복을 기다립니다. 목련도, 개나리도 기다립니다. 사슴도 울며 그날을 기다립니다. 헨델은 일찍이 이 만유회복을 소망하며 메시아 곡을 작곡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주, 왕의 왕 또 주가 길이 다스리시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이때는 사자가 풀을 뜯고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습니다. 전쟁의 공포도 없습니다. 이곳은 영원히 참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희락과 화평의 생명수 강처럼 흘러내립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소망합니다. 주님이 속히 오셔서 만유를 회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 깨어 의를 행하라(고전 15:29~34)

당시에 죽은 자들의 구원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고전 15:29).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 받는 행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절망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때마다 날마다 죽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바울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바울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건축학의 용어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의 믿음이 있으면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고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한제임스 선교사의 미국 생활은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초기에 심방을 갔는데 침대가 없어서 스치로플을 구해 침대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교회 가정과 학생들을 위해 일일이 선물을 싸서 제게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가정만 20가정이 넘었으니 적지 않은 선물입니다. 미시시피대학에서 중국계 여자 지도교수를 만나 학위를 받지 못하고 매디슨으로 옮겼습니다. 매디슨에서 디펜스를 통과하지 못해 다시 미시시피로 가서 어렵게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를 받고 시골에 직장을 잡았지만 조이가 고등학생이라 전학할 수 없어 3년 동안 혼자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정을 축복하여 조이가 아이비리그 U Penn의 장학생이 되었고, 외부 장학금을 받을 것을 믿고 감사헌금을 미리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정의 믿음을 받으시고 조이에게 155,000, 4222,000, 27천만 원의 좋은 장학금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믿음으로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먹고 마시고 즐기게 됩니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미래의 희망이 없으면 삶의 의욕을 잃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좇아 살게 됩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원형 경기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으면 쾌락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허무주의자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극한 시련에 처하게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무망에 빠집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3~34)

악한 동무들은 부활의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인생을 즐깁니다. 본성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우리 또한 알게 모르게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말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하고 순결하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으면 고난 앞에 쉽게 무너지게 됩니다. 허무주의로 쾌락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 신앙이 있을 때 한계를 극복하고 힘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을 움직이는 동력입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35~49

부활의 영광

기록 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는 별개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임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이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제가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질문해 보세요.” 그러자 그는 바울에게 세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님, 첫째는 죽은 몸이 어떻게 다시 살고, 둘째는 어떤 몸으로 다시 살게 되며, 셋째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초대교회에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가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육체와 영의 부활에 참예합니다. 그런데 죽어서 땅에 묻힌 사람의 육체는 어떻게 부활하게 되느냐? 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부활을 힌두교나 불교의 환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생의 이론 중에 축귀환생이 있습니다. ‘축귀환생이란 사람이 가축이나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짐승 중에는 전생에 우리들의 가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을 살생하거나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생의 이론 중에 전생에 죄로 이렇게 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한 예로 징그럽게 싸우는 부부가 있다면, 그 부부는 전생에 한 마을에 원수지간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연을 맺어 원수처럼 싸운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생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선행을 베풀면 언젠가 좋은 모습으로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종교든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만일 사후의 새로운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요 도덕이요 사상입니다. 제가 지난주 설교에서 철학은 오늘을, 사상은 내일의 삶을 말하고, 종교는 미래의 삶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불교는 환생과 윤회를 믿고, 헬라 사람들은 영혼불멸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힌두교나 불교의 환생이나 윤회와 다릅니다. 헬라의 영혼 불멸과도 다릅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여 영광의 부활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우리 몸이 어떻게 부활하고,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사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부활의 비밀을 영접하여 썩어질 육체를 위해 살지 말고 장차 부활의 몸을 소망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1.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사는가(고전 15:35~41)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힙니다. 그리고 육신이 썩게 됩니다. 나중에는 뼈와 해골만 남습니다. 또 최근에는 화장이 유행합니다. 국토는 좁고, 죽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나기에 그 대안이 화장입니다. 사람이 화장하면 한 줌의 재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은 자들이 부활할 수 있는가? 의문이 생깁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죽은 사람, 화장으로 한 줌의 재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 바울은 씨앗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36)

바울은 어리석다고 책망합니다. 바울의 책망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바울의 책망은 지금 우리 육체가 완성된 몸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씨, 종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리의 몸은 완성된 몸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완성되었다면 왜 죽습니까? 우리의 몸이 완성된 몸이라면 왜 아픕니까? 왜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굽어집니까? 우리 몸은 완전한 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연약하고 불안전합니다.

우리는 씨앗에 불과합니다. 씨앗은 반드시 죽어야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2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씨는 땅에 떨어져 묻히고 죽어야 살아납니다. 99% 죽어서도 안 되고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껍질이 다 벗겨지고 완전히 분해되어야 살아납니다. 다시 말하여 죽어야 생명이 탄생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이 죽어야 됩니다. 사람이 부활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씨앗에 불과한 몸을 완전한 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몸은 종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몸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씨앗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어 분해될 씨앗을 우리 자신의 참모습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죽을 씨앗을 위해 발버둥 칩니다. 죽어 없어질 씨앗에 목숨을 겁니다.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죽어 없어질 씨를 자랑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제 썩어질 씨앗에 목숨을 걸지 마십시오. 썩어질 씨앗에 물질과 시간을 과도하게 투자하지 마십시오. 썩어질 외모에 마음 뺏기지 마십시오. 장차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날 부활에 목숨을 걸고 거기에 자신을 투자하십시오.

둘째, 바울은 씨를 뿌릴 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맹이를 뿌립니다. 우리가 알맹이를 뿌리면 각기 형체로 나타납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7~38)

우리가 해바라기 씨를 뿌리면 그 씨와는 전혀 다른, 반 고흐가 즐겨 그렸던 강렬한 생명력을 가진 아름다운 해바라기로 태어납니다. 우리가 심은 것은 반 고흐가 그렸던 그 강렬한 해바라기를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해바라기 씨를 심었는데 아름다운 해바라기가 된 것입니다. 토마토 씨를 심었더니 토마토가 열립니다. 해바라기 씨는 해바라기로 나타나고, 토마토 씨는 토마토로 나타납니다. 그 개성 자체가 바뀌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몸도 마찬 가지입니다.

나란 존재는 부활한 후에도 이지 결코 다른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으로 환생하지 않습니다. 동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물고기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나로 태어납니다.

셋째, 바울은 육체의 여러 종류가 있음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자연계의 몸이 각기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539절을 보면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곤충의 육체가 각기 다릅니다.

짐승은 땅에서 다닐 수 있도록 네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축 중에는 두 발로 다니는 동물도 있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털로 덮여 있습니다. 새는 공중에 잘 날 수 있도록 날개와 가벼운 깃털로 덮여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 수 있도록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있습니다. 곤충은 머리 가슴 배 세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직립, 머리를 위로 하고 걸어 다니도록 되어 있고, 두 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유추해 볼 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새로운 제 4의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습니다. 어느 곳에 일곱 형제가 있는데 맏이가 한 여자와 결혼했다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유대 법에 따라 여자는 둘째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없이 둘째가 또 죽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곱 동생에 이르기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후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지만 부활의 모순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한다면 지금과 똑같은 몸으로 부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기는 아기의 모습으로, 할머니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부활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29~30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로운 몸을 주십니다. 그것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몸입니다. 지금 보다 말할 수 없는 새로운 영광의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넷째, 바울은 각기 영광이 다르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늘에 속한 육체도 있고 땅에 속한 육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0~41)

부활할 때에 영광이 각기 다릅니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또 별 중의 별들도 각기 영광이 다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부활의 영광도 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했는데 해같이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부시게 빛나서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영광 면에서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 시에도 비교가 되어 문제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각기 사람들이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불평하지 않는 것처럼, 영광의 차이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해하고, 그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가장 큰 영광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 가까운 순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이 가장 영광스럽게 나타납니다.

다니엘서 123절을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해같이 빛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희미한 영광으로 부활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은 사람은 거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참예한 사람들은 모두가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은 가장 큰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그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가장 많이 헌신하고 희생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몸으로 부활할까요?

2. 우리 몸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고전 15:42~44)

첫째,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고전 15:42)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고 썩어지고 쇠해집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좀 덜 변하고, 좀 덜 썩는 것을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썩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썩을 몸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몸은 이러한 신비함이 있습니다. 늙거나 병들지 않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없습니다. 과학이나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둘째,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고전 15:43)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바 된 인간의 형체를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인간이란 어찌 이다지도 기막힌 걸작인가! 슬기롭고 고귀한 이성, 무한한 재능, 적절하고 훌륭한 형체와 동작, 행동은 천사와 같고 이해력은 신과 같으며 이는 세계적인 미요 만물의 영장이니라고 외쳤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39:13~14)

흙으로 빚어진 존재도 이럴진대 우리가 장차 변화될 부활의 몸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지금 우리의 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비스럽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것을 알 수있는 방법은 첫 열매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그 옷이 광체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9:3)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영화롭게 되는 순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셋째, 강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고린도전서 1543하절을 보면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몸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연약합니다. 인간은 바이러스 하나 이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능력 면에서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장차 부활하게 될 몸은 강합니다. 어떤 질병도 넘보지 못합니다.

넷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고린도전서 1544절을 보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두 종류의 몸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의 몸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몸은 천차만별합니다. 재능도 각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몸은 아담 안에 있는 몸입니다. 이 몸은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죄를 짓고, 죄의 소욕에 시달립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때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므로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신령한 몸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령한 몸은 예수님처럼 구름을 타고 승천합니다.

 

   3. 우리 몸이 어떻게 이같이 될 수 있는가(고전 15:45~49)

이는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지금 몸은 최초의 사람 아담의 몸입니다. 지금 몸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넣은 몸입니다. 이 몸은 스스로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을 살려주시는 영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누구도 스스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살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죄는 죽이는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리는 영(a life giving spirit)입니다.

인간은 육의 존재로 태어났지만, 그 다음에 신령한 자가 됩니다(고전 15:46).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고전 15:47). 첫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났고, 우리도 그 후손으로 땅에서 났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기에 약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려주시는 영으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갖게 됩니다(고전 15:49). 이 형상은 하늘에 속한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신령한 형상을 덧입고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때는 불완전한 것은 다 사라지고, 또 부분적으로 알던 것도 사라지고,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온전히 주님을 알게 됩니다. 부활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새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육의 몸에 지나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썩어질 씨에 투자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썩어질 육체에 많은 것을 투자할 때 잠시는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 쓸데없는 투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좇지 말고, 앞으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할 것을 사모하며 아름답고 지혜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5:50~58

부활의 승리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스는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는 저 세상이 무섭다.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이 어둠 속으로 덥석 뛰어 들어가는 것 같다.” 이렇게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로 살아갑니다.

태연한 척 살아가지만 모두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모두가 죽음 앞에 절망합니다. 모두가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다가도 죽음을 생각하면 힘이 빠지고 의욕이 상실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망을 sting, 찌르고 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쯤은 경험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시나 바늘에 찔려 상처가 덧났을 때 열이 나고 꾹꾹 쑤실 때 참기 힘들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죽음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바울이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여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망과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14~15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불교를 비롯하여 다른 종교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 아닙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죄요 사탄 마귀가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체념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잊어버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기고 멸망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라고 했습니다(고전 15:26).

본문은 부활신앙에 대한 climax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승리에 감격하여 부활의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부활의 승리를 확신하고 찬가를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혈과 육이란 혈육, 부모나 형제나 친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혈과 육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말합니다. 혈과 육은 우리의 의, 도덕적인 선행, 우리의 선한 의지 등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과 자선을 베풀어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내 의지로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찬송가 가사대로 울어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됩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당시 최고의 지성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는 자타가 구원의 1순위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마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아무리 선하고 자선을 많이 베풀고 훌륭해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3:6).

어떤 사람은 양심을 따라 바르게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과 술수와 쾌락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가 육은 육입니다. 육이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걸레를 아무리 빨아도 걸레가 행주가 될 수 없고, 검은 숯을 아무리 빨아도 흰 숯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첫 사람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태어난 인류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입니다. 자기가 왕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자기애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자기중심은 죄입니다. 이게 아담 생명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23).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9:27). 아담 생명으로 죽은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고, 심판 후에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습니다(9:48). 아담 안에 있는 인류는 그런 곳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있습니까?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은 나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안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죄 사함이 있고, 부활이 있으며, 거듭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 예수 생명입니다. 거듭난 예수 생명은 영원합니다. 이 생명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3:20).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권세를 주셨다는 뜻은 헬라어로 부정과거로 단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단번에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단번에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벧전 1:3~4).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영접하는 곧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어떤 종교가 한번 믿음으로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모든 종교는 선행을 쌓아야 합니다. 쌓은 만큼 구원이 질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래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 은혜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복음을 헛되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고전 15:51~56)?

많은 사람이 인류 역사는 점점 개선되고 변화되거나 퇴보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진화론적인 사고 방법입니다. 그래서 산을 보게 되면 35억 년 되었다. 이 바위가 45억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비밀을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고전 15:51)

그 비밀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Grand Canyon 박물관에 가면 Grand Canyon의 골짜기에 조개껍데기와 물고기화석이 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산꼭대기에 조개껍데기와 물고기화석 같은 것들이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히말라야 정상에 소금 암반이 있다고 합니다. 루마니아에도 높은 산의 소금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이는 그곳이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몇 억 년 전에는 바다였는데 천천히 침식되어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천히 변화되었다면 어떻게 산꼭대기에 물고기화석과 조개껍데기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북극과 남극에 만년 빙하가 있는데 그 얼음 속에 200만 마리의 매머드 화석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매머드의 배를 갈라보면 그 속에 열대식물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매머드가 열대 지방에서 식물을 먹고 북극이나 남극으로 가서 죽었겠습니까? 순식간에 바다가 그랜드 canyon 되었고, 순식간에 열대가 빙하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 후쿠시마 도시가 순식간에 지진과 해일로 change,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순식간에 뒤집어졌습니다. 화산이 터지면 없던 섬이 생기고, 생겼던 섬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산도 바다로 빠져 버리고, 땅에서 섬이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모든 변화는 갑자기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의 몸이 순식간에 변화됩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2)

나팔 소리가 나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말합니다.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십니까? 주님이 순식간에 홀연히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이 재림하십니다. 순식간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순식간에 변화됩니다.

주님이 순식간에 오시는 그날,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됩니다. 욕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됩니다.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그때 나도 변화합니다. 헨델의 메시야의 곡의 3부 부활과 영생을 들어보면 한 10분 동안 똑같은 가사를 부릅니다. 홀연히 변화하리라. 우리도 변화하리라. 홀연히 변화하리라. 우리가 변화하리라. 나도 변화하리라

둘째, 우리의 신분이 순식간에 변화됩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입는다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사람의 몸이 좀 깨끗하지 못하더라도 깨끗한 옷을 입는 순간에 모든 것이 가리어집니다. 특별히 옷 입는다는 말은 신분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노예를 양자로 삼아 왕자의 옷을 입히는 순간 왕자가 됩니다. 순식간에 신분이 변합니다. 과거 노예이었지만 순식간에 왕자가 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왕이 됩니다. 여기에는 과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 신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왕자의 옷을 입는 순간, 신분이 확 변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홀연히 어떻게 변화됩니까? 우리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게 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4)

순간에 죽음이 주는 절망과 슬픔과 낙심과 두려움이 흔적도 없어집니다.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이 있을 때, 그 기쁨이 극대화되는 순간, 그동안 슬펐던 것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부활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이기는 몸으로 변화시킵니다. 베드로후서 310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진노의 큰 날입니다. 그 날에는 끝까지 회개치 않고 범죄 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스러운 날입니다(6:17). 그날에 그들이 죄악된 삶을 회개하고자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고자 고난받은 거룩한 성도, 예수그리스도께 충성하고자 희생했던 성도는 최후에 승리와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지키고, 주의 날을 기다려 온 그들에게 의의 집,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재림은 영광스럽고 복된 것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고전 15:55~58)?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 주님의 다시 오시는 날에 사망이나 죄는 모두 다 삼키고 이기는 몸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승리의 찬가를 부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Where, o death, is your victory? Where, o death, is your sting?”(고전 15:55)

지금까지 사망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모두가 죽음의 세력에 굴복당하여 죽었습니다. 사는 날 동안 허무, 무의미, 두려움, 절망, 무기력, 무능력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망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찌르고 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56). 죽음이 사람의 육체를 빼앗아갔습니다. 사람이 육체를 빼앗긴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율법을 지키지 못함에 있습니다. 죄에 육체를 빼앗긴 인간은 완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져야 완전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면 죄 없는 몸으로 물려받게 됩니다. 이 육체는 죽음을 이기는 완전한 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전 15:57). 재림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의 승리를 노래하며 현재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견실하다는 내적인 것이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도록 여러 가지로 유혹합니다. 회의와 의심을 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 신앙을 굳게 하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일이란 예수님을 믿는 일이요,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분명한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왜 살며,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위대한 삶을 산다는 것은 보냄을 받은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일생을 걸고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밤낮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만 걱정하며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일생은 거는 삶, 믿음에 목숨 거는 삶, 주님의 뜻이라면 죽을 수 있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에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을 끌고 가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가정과 직장에서 축복의 주인공,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평생을 바친 리빙스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달성할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 사명인은 그 일을 끝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헌신한 것을 결코 헛되이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과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이 세상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을 대비하여 깨어 의를 행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거룩이란 단어가 각인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 순간에 사라질 것들에게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예배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423절을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내가 찾는 것이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위와 명예를 내놓으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빈손도 좋으니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의 시간 관리 전문가 마이클 포티노가 미국 사람들이 평균 72세를 산다고 가정하고 일생 소모한 시간을 계산해보니 잠자는데 23, 직장에서 일하는 데 20, 쉬면서 즐기는 데 7, 먹고 마시는데 6, 줄 서거나 신호등을 기다리는 데 5,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는 데 3, 물건을 찾는데 남자 말고 여성들이 핸드백 뒤지는데 3, 가사 일에 4,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데 1년을 보낸다고 합니다. 아마 요즈음 전화 거는 시간이 10년은 될 것입니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까?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시간은 일평생 다 합쳐서 16개월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만남이 소원하고 대화가 뜸하면 친밀감이 떨어집니다. 이게 사랑의 법칙입니다. 72년 생애에 16개월 남짓 예배 시간을 드리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넉넉히 감당할만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앞날도 주께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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