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제42강주예수를믿으라

조회 수 2602 추천 수 0 2012.07.14 06:36:14
사도행전 제 42 강(말씀, 16:19-40, 요절,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 빌립보 개척사(2)

“이르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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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개척사를 보면 세 계층이 구원을 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돈이 많고 그 사회의 부유층이자 상류층인 루디아라는 여자와 그 가정의 구원입니다. 둘째는 귀신들리고 남의 집 노예에 속한 밑바닥의 천한 사람입니다. 셋째는 간수장과 그 가정의 구원입니다. 당시 간수장은 신분상으로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두를 구원하십니다. 여기에 복음의 보편성, 구원의 보편성이 있습니다.

첫째, 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19-24)

바울은 귀신들린 여인, 주인에게 묶여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바쳐야 하는 기구한 여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의 매임에서 풀어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본인은 물론 주인 또한 크게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귀신들린 사람을 이용하여 돈을 벌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에 넘겼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렸던 여종이 낳음을 입자 더 이상 그 여자를 통해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만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사람이 미치든, 죽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돈밖에 몰랐습니다. 그는 돈에 죽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은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남편도 아내도 안 보입니다. 오직 돈만 보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발광하여 선행을 베푼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에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죄명을 무엇으로 뒤집어 씌웠습니까? 20,21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에게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그들은 바울 일행이 풍속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풍속을 전했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풍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풍속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정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민족주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제국주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미친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굽은 것을 펴서 바르게 하는 복음입니다.

바울은 옷이 찢어지고 매질을 당한 채 옥에 갇혔습니다(22-23). 그 옥은 중죄인이 갇히는 옥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 발이 차꼬에 든든히 채워졌습니다. 바울이 당한 고난은 애매한 고난입니다. 오히려 관에서는 바울에게 표창장을 주어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을 재판도 생략된 채 중죄인으로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관에 항의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슨 죄목으로 이렇게 하는가를 재판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로마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마디의 변명이나 항의하지 않고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우리는 애매히 고난을 당하면 억울한 심정이 듭니다. 분한 생각이 듭니다. 특히 선한 일을 하고도 고난을 당하고 욕을 먹으면 더 그러합니다. 특히 입이 열 개라도 말을 못할 그런 사람이 비난을 할 때, 은혜를 원수로,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을 보면 더욱 더 참기 힘듭니다.

우리가 직장이나 학교에서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고 술, 담배를 안 하고 노래방이나 술집에 가지 않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상관에게 항의하고 권리 주장을 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된다고 했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은혜가 된다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게을러서 맡은 일에 충성하지 않아 상관에게 야단맞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는 크게 회개해야 됩니다.

반면에 맡은 바 일에 충성하고 열심히 섬기는 데도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참으면 이는 하나님께 큰 은혜가 됩니다. 그리할 때 결국에는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참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참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본받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아무 죄를 범치 아니하신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실 때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안하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반드시 선악 간에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을 때 하나님께 맡기고 참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선이 악을 반드시 이깁니다.

그리고 죄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보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

예수님은 친히 저주받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심으로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는 죄의 종노릇 하지 않고 의의 종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마음의 모든 상처가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황이 그치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주님께로 돌아와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은 생각할 때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할 때 우리의 내면에 예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새기게 됩니다.

둘째, 옥중에서 찬미하는 바울과 실라(25-29)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기절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한 밤중에 정신이 들어 깨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잡아넣은 사람들을 저주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깨어나자 곧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바울과 실라는 누구를 탓하거나 자신의 억울함을 아신 하나님께서 속히 석방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자신들을 고발한 사람과 매를 때린 사람들에게 몇 배의 손해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옥에 갇힌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조용히 따르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깊은 어두운 밤중에 옥중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있는데 찬송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어떤 찬송을 불렀을까요?

상처를 매만져주시는 주님을 찬양했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감사 찬송했습니다. 몇 번이라도 죽어 마땅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살려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우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바울은 하고 싶어서 하는 찬양이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찬양이었습니다.

바울의 찬송이 적막한 옥사에 울려 퍼졌습니다. 죄수들이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마 찬송 소리에 죄수들도 크게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하고 찬송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원망할 시간에 찬양하고 울어야 할 시간에 기뻐하며 절망의 시간에 찬양하고 저주와 정죄해야 할 때에 기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그 속에 주님의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찬양 속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을 찬양을 좋아 하십니다. 그래서 찬양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사울 앞에서 수금을 타면서 찬송을 불렀을 때 악신이 떠나고 사울의 병은 상쾌하게 나았습니다(삼상 16;23).

시편의 약 3분의 2가 다윗의 작품입니다. 다윗은 시편 103편에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시편 103편에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다윗은 내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송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장도, 위도, 창자도, 쓸개도 다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통하여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열심히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옥문이 열리면 바울은 서둘러 탈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탈옥하지 않았습니다. 간수는 자다가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간 줄로 알고 칼을 빼어 자결하고자 했습니다. 옥문이 열리면 죄수가 탈옥하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보고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28). 그러자 간수가 등불을 가져오게 하여 뛰어 들어가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했습니다. 이는 신령한 두려움입니다. 영적 두려움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의 결과만 찾습니다. 그러나 기적에는 반드시 과정이 있습니다. 기적은 요행이 아닙니다. 기도와 찬송 속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와 찬송은 능력입니다. 아멘.

셋째, 구원을 선포하는 바울(30-40)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나가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질문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보고, 바울과 실라의 영적 권위 앞에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였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큰 죄를 짓고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자기 고백입니다. 이에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거늘”

지금까지 간수는 누구를 믿었습니까? 그는 로마 황제를 주로 여겼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다 했습니다. 이제 주의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이냐, 아니면 하나님 밖에서의 믿음이냐 일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믿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의지하고 돈을 섬깁니다. 명예와 세상 권세를 믿고 섬깁니다. 사람들은 출신 배경과 학연과 지연을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미를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부모님을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남편을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아내를 의지합니다. 사람들은 강대국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은 결코 믿음(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이명박 권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돈을 준 사람이 돈을 주었다고 폭로합니다. 정권 초기에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권불 십년이란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50대가 되면 미가 평준화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결국에는 의지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섬기는 주는 돈신(맘몬)과 미의 여신 비너스입입니다. 돈신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설득력도 없습니다. 이 세대는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돈 가지고 안 되는 것이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성전환도 가능합니다.

돈은 귀신도 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돈입니다. 돈은 그만큼 파괴력이 있습니다. 돈신이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접근할 때 돈신이 ‘주’라고 고백하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그러나 물질은 결코 우리의 ‘주’가 될 수 없습니다. 물질은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할 대상이 아니라 필요의 대상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왕이십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의하고, 거룩치 못하고, 악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누구를 주로 섬겼습니까? 쾌락? 욕심? 야망? 권력? 명예? 돈? 우리는 이런 신들을 버려야 합니다. 쾌락과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철학도, 자기중심의 세계관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섬겨왔던 이런 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고 교회만 다닌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교인일 뿐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무엇을 담아두느냐, 마음에 누가 함께 하고 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한량없는 복을 주십니다.

바울은 옥에서 간수장에게 세례를 주고 그 가정 또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물론 그 가족 모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바울은 석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여 빌립보를 개척하게 하시고 굳게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으면 본인 자신은 물론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프리미엄(premium)의 하나님이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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