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제31강첫째가되는길

조회 수 2204 추천 수 0 2012.07.12 07:33:56
마가복음 제 31 강(막 9:30-37, 요절, 9:35)

첫째가 되는 길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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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은 조선 시대의 학자입니다. 나이 열아홉에 장원 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군수 영감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젊은 맹사성은 한 나이 많은 선비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른께서는 군수가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는 일입니다.” 맹사성이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가 아닙니까? 먼 길을 걸어 찾아왔는데 제게 고작 그 말씀을 하시다니요?” 하며 거만하게 일어섰습니다. 선비는 차 한 잔을 빌미로 맹사성을 붙잡았습니다. 맹사성은 못 이기는 척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맹사성이 자리에 앉자 선비는 차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선비는 찻잔에 물이 넘치는데도 자꾸만 찻잔에 차를 따라 상이 넘치고 방바닥을 적셨습니다. 맹사성이 선비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어르신, 지금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고 있습니다.” 맹사성이 소리쳤지만 선비는 계속 찻물을 따랐습니다. 그러고는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수 영감,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면서도 어찌하여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모릅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람이 많이 안다고 해서 삶이 풍요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삶이 넉넉한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조금 안다고, 조금 자리가 높아졌다고, 조금 가졌다고, 조금 배웠다고 우월감에 젖어 있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은 실수를 계속 반복합니다. 행복은 뭣을 많이 가진데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겸손함에 있습니다.

세상은 뭣을 가졌다고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섬기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떠나도 붙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섬기고 겸손한 사람은 떠날 때 더 있어 달라고 소매 자락을 붙듭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섬김의 자리에 서는 그런 겸손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첫째, 십자가를 가르치신 예수님(30-32)

예수님은 벙어리 귀신 들린 어린 아이를 고쳐 주신 후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30).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하여 비장한 모습으로 이곳을 지나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31a).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31b절을 읽겠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리를 지금까지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막8:31, 9:9-13). 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실까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요, 구원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2절을 보면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였습니다. 마태복음17장 23절에 보면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상의 영광을 체험하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향하여 걸으시면서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걷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되실 터인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한 자리를 차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자주 말씀하시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1장 23절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신21:23). 그리고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다는 것을 상상하기 조차 싫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18,24). 세상에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환난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난을 받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던 베드로는 후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바울도 처음에는 율법의 눈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달라졌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인간도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알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십자가의 도는 쓸모없던 자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는 놀라운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미움을 사랑으로, 분열을 통합으로, 갈등을 화해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죤 뉴톤은 노예를 파는 선장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인신매매 두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의 도를 영접했을 때 변하여 생명을 살리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된 후에 너무나 그 은혜가 놀랍고 감격하여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A mazing grace……” 아무도, 그 어느 사상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를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십자가는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첫째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33-37)

33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이는 노중에서 ‘누가 크냐?’하는 문제로 쟁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노중에서까지 쟁론하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마자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눅19:11).

그들은 내각편성 때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가신 사건이 그들 간의 경쟁심을 더욱 유발시켰습니다. 제자들은 세 제자와 아홉 제자로 나누어 다투었고, 또 세 제자들 간에도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다 자기가 가장 높은 자, 위대한 자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둘째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누가 크냐?’ 하는 쟁론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권력다툼이 생깁니다. 요즘 한나라당이 두나라당이 되어 친박이니, 친이니 서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에서 “권력은 모든 사회제도와 모든 인간관계에 고유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합니다. 거지 사회에서도 거지 대장이 되고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집니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 때문에 항상 싸움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나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 하며 다투는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35절을 읽겠습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첫째가 되고자 하면’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첫째가 되는 것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든지(anyone)’라고 하신 것을 보면 누구든지 첫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첫째가 되는 거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는 정반대로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첫째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자, 첫째가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첫째가 되는 길은 섬기는 자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자리를 놓고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오른편에 누가 앉을 것이고, 왼편에는 누가 앉을 것이냐’ 하고 자리 다툼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당시 제자들만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나의 문제요, 가정의 문제요,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나 다툼을 들어가 보면 결국 자리다툼입니다. 계급구조와 권력구조 속에서 나온 것들이 태반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도전할 때 부모들이 왜 속상해 합니까? 자녀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네가 감히 아버지인 나에게, 어머니인 나에게! 감히 부모의 권위에 도전을 해! 못된 놈 같으니! 이런 갈등구조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사회는 어떻습니까? 감히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해, 아니 어른에게, 선배에게 이렇게 대해? 감히 교수에게? 갈등 구조 속에는 계급의식과 권력구조의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모든 자리는 철저하게 섬김과 봉사의 자리입니다.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교회의 자리조차도 명예와 계급화 되기 쉽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에 이런 현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문화적인 영향, 즉 유교문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유교문화는 한 마디로 출세주의입니다. 출세한다는 것은 남에게 섬김 받는 높은 한자리를 차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님이고, 우의정이고 좌의정이고, 장관이고, 총리고, 대통령이고, 모두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섬기고, 일하라고 주어진 자리입니다. 자리만 차지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왜곡된 유교문화에서는 오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현상입니다.

우리나라의 무서운 병중에 하나가 서열 병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죄송하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입니다. 일가친척을 만나면 “항렬이 어떻게 되십니까?” 묻습니다. 젊은이들도 어른들을 닮아서 만나면 “몇 학번 입니까?” 묻습니다. 특히 해병대 출신들은 만나면 즉시 “몇 기”입니까? 묻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젊고 아래면 그 때부터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직분이 하나의 계급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봉사와 섬김의 직분입니다. 교회에서는 섬김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먼저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자리 맨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섬김의 자리 선두에 서시기 바랍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맨 앞에 섬김의 위치에 서시기 바랍니다.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도 그러셨잖아요? 섬기는데 남자가 어디 있고,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섬기는데 체면이 어디 있습니까? 섬기는데 직분이 왜 필요하고, 서열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직분에 관계없이 섬김의 자리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무슨 파괴! 무슨 파괴! 하면서 ‘파괴’라는 용어를 많이들 씁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신분파괴를 하셨습니다. 주님이 직접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므로 체면파괴, 서열파괴, 자리 파괴를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 우월의식, 계급의식을 버리고 섬김의 자리에 서십시오. 신앙생활 오래 하셨어도 섬김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주님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분으로 겸손의 표본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겸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이 거할 곳이 못되는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겸손하게 섬겨 주셨습니다. 부담스러운 비천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고, 고뇌하는 지성인 니고데모에게 밤이 맞도록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함께 하심으로 그의 깊은 내면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위대성이란 그의 직책이나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섬김의 내면성에 있습니다.

요셉은 어딜 가든지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있을 때나, 감옥의 죄수로 있을 때나, 애굽의 총리가 되어 모든 국정을 다스릴 때에도 섬겼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출옥할 때 죄수들이 우리와 더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떠날 때 그 사람이 평가됩니다. 잘 갔다. 시원하다. 그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더 있어 달라고 소매 자락을 붙드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소매 자락을 붙드는 사람의 삶은 겸손과 섬김의 사람입니다.

한 사가랴 선교사가 귀국합니다. 메디슨 선교사들이 모두 울었다고 합니다. 헤어지는 슬픔 때문에 운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한 사가랴 선교사가 음으로 양으로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뭇 사람들을 섬겨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필요로 하는, 더 있어 달라고 붙드는, 그런 섬김의 사람,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이기심을 극복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순수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큰 장애물은 이기심입니다. 자기 과시, 은근히 대접받고 싶은 생각,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진짜 섬김은 궂은 일, 힘든 일,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일을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욕먹는 것, 그게 진짜 봉사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섬기셨고 봉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욕먹으셨습니다. 우리가 욕 안 먹으려하고, 무시당하지 않으려 하면 그것은 진정한 봉사, 진정한 섬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실 때는 완전하고 확실하게 섬기셨습니다. 마음도 섬김의 마음이요, 복장도 섬김의 복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그렇게 하셨습니다. 만일 위치나 생각하고, 자존심이나 찾고, 자리나 생각하셨다면 어떻게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섬김에는 반드시 자기 부인, 자기 포기, 자기 죽음,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십자가에 철저하게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밑에서 조롱하는 무리들, 창 들고 설치는 자들을 보시고 저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들 대접 안 해 준다고 기분 나빠서 “저것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저래! 이 인간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너희들 맛 좀 봐라”그렇게 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끝까지 철저하게 온전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기심을 깨고 끝까지 섬기셨습니다. 섬김에는 이기심을 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그들 중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둔지 내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여러분이 어린아이 하나를 잘 대접한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당장 돌아오는 이익이 있습니까? 마음은 기쁠지 모르지만 당장 돌아오는 이익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색도 못 냅니다. 자랑도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유명 인사를 대접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기도 올라가는 것 같고, 자랑거리로 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보다는 유명인사 대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대접을 하면서도 그런 이기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요즘 노인정은 많은 성금과 물품이 쏟아진답니다. 반면에 유아원과 어린이집에는 찬바람이 분다고 합니다. 왠지 아세요. 노인정은 표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반면에 유아원은 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따라 섬깁니다. 그러나 이런 섬김은 섬김이 아닙니다. 이름 모르는 소자 한 사람을 하는 대접하는 것, 그게 진짜 봉사요 섬김입니다. 그것이 순수한 봉사입니다. 조건 없는 섬김, 남이 나를 잘 대해주거나 알아주는 것에 상관없이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봉사요 섬김입니다. 인기 없고,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손길을 뻗치는 그런 섬김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그 때 나의 이기심이 극복되고 인생이 변합니다.

내 안에 뿌리박고 있는 우월의식과 이기심을 뛰어넘어 섬기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봉사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서기를 바랍니다. 우월주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섬김의 자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처럼 섬김의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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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