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37강 (말씀, 11:1-11, 요절, 11:9)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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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가장 높고 영화로우신 주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사람들을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허리를 굽히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야심으로 똘똘 뭉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섬기어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섬기시느냐고 구약의 예언대로 그 모습이 마치 마른 넝쿨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요 왕의 왕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전혀 예수님은 만유의 주, 만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많은 무리들로부터 환호와 찬양을 받으시면서 왕으로서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 같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겸손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예수님을 열열이 찬양하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만유의 주 예수님(1-6)

11장 이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1주일간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사역의 마지막 1주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군림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고 인간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의 입성이라고도 부릅니다.

때는 유월절을 앞둔 시점입니다. 유월절은 우리나라의 광복절처럼,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민족을 생각하는 절기이고, 해방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 전체 인구가 100만-125만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의 인구는 적게는 25,000, 많게는 100,000명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되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모이기 때문에 적어도 200,000명의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자 친히 입성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1). 벳바게는 예루살렘 남쪽 1.6Km 지경에 있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은 해발 800m로,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이는 곳입니다. 감람산은 메시야의 도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슥14:4)”라고 하였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유대에 계실 때 예수님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습니다. 또한 베다니에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이곳에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남의 나귀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이것은 분명히 절도 행위입니다. 순진한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예수님은 “주가 쓰시겠다(The Lord needs it)”라고 말하면 두말하지 않고 허락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이때까지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서에 예언된 메시아의 칭호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기 위해 스스로 부르신 칭호입니다. 그러나 11장부터는 공공연히 자신을 ‘주(The Lord)’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왕으로서 입성하셨습니다. 또 성전을 깨끗케 하심으로 성전의 주인 행세를 하셨습니다. 12장을 보면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다윗의 주가 되심을 가르치셨습니다(12:37). 13장에서는 큰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3:26).

“주가 쓰시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만유의 주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머리 둘 곳이 없으실 만큼 가난하고 초라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이십니다. 주님은 그 뜻대로 세상을 주관하고 섭리하시는 만유의 주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으로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나귀의 진짜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나귀의 소유자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귀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 즉, 집이나 차, 옷 등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 자식까지도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잘 관리하라는 위임하셨습니다(창1:28,2:15).

청지기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주인의 소유를 잘 관리하여 주인에게 유익을 남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원할 때는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청지기는 소유에 대해서 자기 권리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청지기입니다. 자, 내 생명이 내 것이 아닌 것은 죽음을 우리가 내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습니까? 언제든지 주님이 오라고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하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정 기간 동안, 혹은 60년, 혹은 80년 동안 생명의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재능과 능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다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생명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왔다가 생명의 주인인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저것을 누리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빈손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에 불과함을 잘 말해 줍니다. 내게 있는 물질이나 시간, 생명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놓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시간이나 물질을 쓰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쓰면 손해 의식이 듭니다. 이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유나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쓰임 받을 때 가장 영광스럽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다 주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에 자신의 생명과 시간과 소유와 재능과 주님께 드린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귀 새끼는 나귀 역사상 가장 축복 받은 나귀입니다. 로마서 6장 13절을 보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병기’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도구는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칼은 의사 선생이 사용하면 생명을 살리는데 쓰임 받고, 강도가 사용하면 생명을 죽이는데 쓰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지체는 죄에게 드리게 되면 불의의 병기가 되고, 하나님께 드리면 의의 병기가 됩니다. 따라서 자신을 누구에게 드리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자기를 위해 쓴 것은 지내 놓고 보면 다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린 것은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복되고 영광스럽습니다. 주님께 드린 것만이 우리의 면류관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드릴뿐만 아니라 양들이나 자식도 주님께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두 제자는 이를 어떻게 수행했습니까?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짜증을 내고 반발합니다. 또 이 사명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제자들은 제자 경력 3년 만에 나귀 절도범이란 낙인이 찍혀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에 단순히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4-6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담대하게 그것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왜 남의 나귀 새끼를 허락도 없이 풀어 가는 거요?”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 그래요. 주께서 쓰시겠다니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어서 가져 가세요” 하며 기쁨으로 허락했습니다.
제자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씀에 단순히 순종했을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성이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단순하게 순종하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머리를 굴리고 돌리는 것만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단순히 순종할 때만이 믿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7-11)

7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안장 대신 그 위에 걸쳐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위에 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카펫 대신에 자기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겉옷을 펴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요, 종려나무 가지를 펴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9,10절을 보겠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루살렘성은 예수님을 찬양하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왜 이렇게 열렬히 환영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약속된 메시아란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란 다윗의 위를 물려받을 메시아 왕국을 말합니다(눅1:32).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 시대가 가장 강성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사랑과 평화로 다스렸습니다. 또한 공과 의를 행하여 정의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다윗 왕국은 장차 올 메시아 왕국의 표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수세기 동안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그들을 다스려 주기를 갈망했습니다. “오 왕 다윗의 열쇠여 이 고통의 길 그치고 저 하늘나라 문 열어 그 길로 인도합소서” ‘호산나’란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시118:25). 여기에는 구원자를 애타게 갈망하는 그들의 절규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압박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백성들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보다도 죄의 사슬로부터 풀어 주시고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영혼의 절규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인생 문제와 죄 문제로 인한 고통과 탄식과 울부짖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 문제로 고민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 관계성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애타게 갈망합니다. ‘호산나!’ 이는 죄로 인해 고통 하는 인생들의 영혼의 절규입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인생들을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입성하시되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일찍이 성경은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세상 왕들은 금 면류관을 쓰고 백마들이 끄는 쌍두마차를 타고 위엄 있게 입성합니다. 왕의 전후좌우에는 무장한 경호원들이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경호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므로 세상 왕들보다 더 위엄 있고 화려하게 입성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다니! 이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오늘날은 지위에 따라 차의 종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벤츠나 BMW와 같은 고급차를 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겸손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가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만인의 친구가 되시고 만민의 구주가 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평등으로, 수량으로 평가합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며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를 따집니다. 이런 사회의 분위기는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는 무시를 받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는 겸손하신 예수님, 가난하신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가치관은 세상 가치관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겸손의 예수님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전을 청소하신 예수님(12-19)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곧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심으로 영적 메시야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이튿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가 있는가를 살펴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하지 열매가 없었습니다. 무화과 열매는 3,4월에 열려 6,7월에 땁니다. 무화과나무의 특징은 잎사귀가 무성하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는 때가 아니더라도 열매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14).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배가 고파 홧김에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이 부패한 성전을 보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 그 곳에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 대신에 짐승 우는 소리와 장사치들의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자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 분노는 영적인 분노입니다. 그리고 기구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대청소하시고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17).”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속죄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죄 사함의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말씀과 찬송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죄 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성전은 세계 만민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말씀이 없고, 기도와 찬송이 없고 세속화될 때 준엄한 심판을 하십니다. 특히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심판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부패했다는 것은 곧 그들의 중심이 썩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 일뿐만 아니라 평화의 왕이 되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심을 말해 줍니다. 세상 왕은 군대의 힘과 법과 제도로 사람을 다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로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평화가 임합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겸손의 왕, 평화의 왕 예수님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청지기 자세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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