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제40강 산자의 하나님

조회 수 2340 추천 수 0 2012.07.12 07:36:17
마가복음 제 40 강(12:13-27)

산 자의 하나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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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회개와 희생과 헌신 등의 복음의 메시지보다 치유, 축복의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와 같은 복음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복음이 내게 거슬릴지라도 십자가를 사랑해야 됩니다.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는 한국에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그게 뭐냐면 ‘예수 결핍 장애(JDD: Jesus Deficit Disorder)’이다. 예수교회에 예수가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 이외의 것으로 너무 변질됐다. 미국 교회의 집회나 회의에 참석해보면 주로 리더십 강좌나 교회의 새로운 전략 프로그램 이야기다. 교회가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한다. 교회에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기독교는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님 대신 그 동안의 성공, 그 자체를 예배하기 시작했다. 어느 세대나 축복이 있고, 저주가 있다.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저주는 바로 ‘예수 결핍 장애’다. 예수의 결핍 치유책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는 것이다. 내가 만든 예수가 아니라 이미 있는 예수를 찾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보는 것이다. 그건 비참하고 참혹한 거다. 그런데 거기서 미(뷰티)를 보게 된다. 그 뷰티 안에 진리와 선함이 함께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은 동전 하나를 들고 나와서 세금 문제를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아주 해괴한 질문을 합니다. 그들은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릴 것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사람을 죽일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정교분리의 대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산 자가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5월의 실록과 같이 푸르고 푸른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12-17)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자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가장 지모가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충실한 유대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반로마 입장을 취하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결사반대하였습니다. 반면 헤롯 당원들은 로마의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 친 로마파입니다. 그들은 세속적이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이들은 평소 서로를 혐오하고 경멸하여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데에는 마음을 같이하여 연합전선을 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은 둘 다 복음의 적대 세력입니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둘 다 인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손을 잡고 복음을 대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의도를 숨기고 예수님께 듣기 좋은 아첨의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아는데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들의 말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참되십니다. 또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메시지나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식민통치에 대해서 비판적인 말을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의인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인 부도덕한 헤롯 정권과 맞서 투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한껏 추켜세운 뒤 아주 민감한 정치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불가합니까? 우리가 바쳐야 합니까? 아니면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14b,15a)?”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이에 대해 늘 반항적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백성들은 로마의 앞잡이, 매국노 등으로 매도당하게 됩니다. 반면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반역을 선동하는 죄로 헤롯당에 의해 즉시 체포당합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바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알아서 하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제야 말로 예수님이 덫에 걸려들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그들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그 외식함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5b)?” 그리고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작은 은화로 제국의 세금 납부를 위해 사용하던 화폐였습니다. 이 동전의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가이사의 형상이 있고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이사 디베료, 신성한 아구스도의 아들, 만민의 주” 예수님은 이 동전을 가리키며, 그 화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질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듣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대원칙을 천명하신 말씀입니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삽니다. 한편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근로의무, 병역의무, 납세의무, 교육의무인 4대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각종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행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무를 이행해야 할 이유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소득의 십일조가 있습니다(신12:11).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말3:8,9). 또 첫 열매도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출23:19, 신26:2,10). 그리고 주일은 주님의 날(Lord's day)이기 때문에 이 날 만큼은 다른 날과 거룩하게 구별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천국 시민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 몸은 안일과 쾌락을 즐기는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써야 할 거룩한 몸입니다.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 있듯이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 있습니다(창1:26,27).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화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데에는 자발적인 열심히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과태료가 붙지 않습니다. 주일예배를 보지 않는다고 어떤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릴 때 영적 질서가 생기고 삶에 승리하게 됩니다.

둘째, 산 자의 하나님(18-27)

바리새인들이 1라운드에서 KO패를 당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도전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기초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땅에서의 축복과 영광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부활을 통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길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고 할 때 인생을 사는 것만큼 허무하게 됩니다. ‘죽으면 그만인데’ 생각하면 힘이 빠지고 의욕이 사라집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할 때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이 됩니다. 현재 상황에서 최대한 즐기는 쾌락주의자가 됩니다. 불신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이면서도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의 삶은 불신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을 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여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쾌락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부활을 믿을 경우 심판도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죄를 마음 놓고 지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모순성을 지적하기 위해 신명기 25장 5-10절을 기초로 기상천외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19-23절을 보면 이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형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곱 명이 모두 건강하게 성장하여 그 중 장남이 먼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남은 나머지 6명의 형제들의 축하를 받으며 웨딩마치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갈릴리 해변으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신혼여행지에서 신랑이 준비운동을 안 하고 해수욕을 하다가 그만 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할 수 없이 율법에 따라 둘째 아들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백화점에 반지 사러 갔다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슬픔을 딛고 셋째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더니 아들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때부터 이 여인에게는 남편 잡아먹는 귀신이 붙었다고 소문이 퍼졌습니다. 넷째는 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첫 날 밤에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고, 마침내 여인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이들이 머리를 짜서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참으로 슬픈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일 이들이 모두 부활한다면 여인은 칠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먼저 결혼한 장남입니까? 아니면 제일 나중에 결혼한 막내입니까? 아니면 제비를 뽑고 결투를 벌어야 합니까? 이 얼마나 비극이요, 모순입니까? 이렇게 볼 때 부활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24,2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들의 문제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아는 것 같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모두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같이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모두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무지하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이 세상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 시에 현재의 모습으로 부활하지 않습니다. 만일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부활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활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 시에 불멸의 영적인 존재가 되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우리는 부활 시에 지금과 같은 이런 욕되고 추하고 연약한 몸으로 부활하지 않고 신령하고 영화롭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 때는 더 이상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으로 부활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출애굽기 3장 6절을 기초로 부활의 진리를 심어 주셨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은 시제가 모두 현재형입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I am the God of Isaac, I am the God of Jacob.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셔서 현재 그들도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초로 역사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두개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이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역동적인 분이시요, 약속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모세의 하나님이요,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의 년 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으로서 때가 되면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십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죽은 자’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육신 그대로인 사람을 말합니다. 죽은 자들은 날마다 복 받기를 빕니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이것도 잘 되게 해주시고, 저것도 잘 되게 해주시고, 빌고 또 빌며 세상적인 풍요와 육적인 풍요를 갈급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사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인 줄도 모르고 마구 구합니다. 그들은 결국 부를 추구하다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은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을 보세요. “부하려는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죽은 자는 마음이 차갑고 딱딱합니다. 죽은 자는 생각이 늘 부정적이고 운명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도 죽어 있고, 생각도 죽어 있고, 표정도 죽어 있고, 행동도 죽어 있습니다. 죽은 자는 ‘안 된다, 힘들다, 불가능하다, 허무하다, 해도 소용없다, 무의미하다, 절망적이다, 될 대로 되라’는 등의 부정적인 단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결코 그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반면 산 자는 육신의 옷을 벗고 영의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즉, 산 자는 육신에서 영으로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요, 겉 사람에서 속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산 사람은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가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분명하게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거룩한 길을 갑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부활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위로부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과 생명을 덧입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산 자는 말도 살아 있고, 생각도 살아 있고, 행동도 살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에는 죽음의 요소가 없습니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며 희망찹니다.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생명력이 넘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은 자가 산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5장 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성경 말씀을 듣고 영접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말씀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생기가 있어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늘 푸르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과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가 산 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거듭나 성령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5월의 실록과 같이 푸르고 푸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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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