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14강가족공동체

조회 수 2332 추천 수 0 2012.07.12 07:25:24
마가복음 제 14 강(3:20-35)

가족 공동체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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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참으로 소중한 일차집단입니다. 가정은 기쁨을 증폭시킵니다. 가정은 외로움과 아픔과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가정은 삭막한 사막 같은 인생의 삶에서 오아시스 같은 곳이기도 하고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교회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고전12장, 엡4장), 그리스도의 신부(엡5장), 새 이스라엘(롬9-11장) 등 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에 교회를 가정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적으로 교회가 가정이라는 말은 처음 교회가 생긴 이후 300년 동안은 예배당이 없던 시절인데, 이때 성도들은 가정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을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2)”라고 했고, 오순절 체험 후 성도들이 모인 것을 “집에서 떡을 떼며(행2:42)”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6장서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말하면서 바울은 “저의 교회(롬16: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4장 15절에는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했고, 빌레몬서 1장 2절에도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는 감히 쓰기 어려운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부를 때 가족의 호칭으로 썼습니다. 바울은 상대방을 부를 때 형제 혹은 자매로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을 가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성령을 훼방하는 죄(20-30)

2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신 후 산에서 내려오셔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셨습니다. 이 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가슴에 품고 그들의 병든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섬기시느라고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먹고 마시고 쉬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삶의 철학은 우선 먹고 쉬자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는 문제보다 사명을 우선하셨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21). ‘미쳤다’는 것은 정신이 제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데 있다는 뜻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족들까지도 예수님을 비정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는 무엇이 기준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가치로 볼 때에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미친 짓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나 가치관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광인과 연인과 시인은 다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정말 사랑하게 되면 미친 사람과 같이 되고 시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식사도 안 하며 열심히 일하시면 수입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돌보느냐고 장남으로서 가족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데리고 다니는 제자들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혁신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금만 앞서 가면 튄다며 견제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모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운동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락과 만화에 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화에 미쳐 있으며, 담배와 마약에 미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뭣에 미쳤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미친 분들입니다. 우리는 캠퍼스 선교에 미친 분들입니다. 우리는 일대일 성경 공부에 미친 분들입니다. 우리는 세계 선교에 미친 분들입니다. 우리는 미치기는 미쳤는데 옳게, 거룩하게 미친 분들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에 미쳐 밤거리를 헤매면 젊으니까 그렇다며 관대하게 대합니다. 명예와 권세에 미쳐 공부하는 사람을 보면 칭찬하고, 물질에 미쳐 돈을 버는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부모님들은 돈 벌기 위해 맞벌이를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아기를 봐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이해는커녕 미쳤다며 핍박합니다. 그런데 이는 내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이라 아니라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쇠사슬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문제에 빠지지 않고 로마 총독인 베스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26:24)”고 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행26:25).” 더 나아가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내가 결박한 것 외에는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행26:29).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에게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께 더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알면서도 예수님의 역사를 곡해하고 왜곡하여 흑색 선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붉게 색칠했습니다. 그들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한다,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비난했습니다(마12:24). 바알세불은 사단의 별명이요, 귀신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루신 역사는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을 사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비난하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23-27절을 보겠습니다.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슬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 비유에서 강한 자는 사단을 말하고, 집세간은 사단에게 고통을 받는 인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강한 자를 결박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볼 때 인간은 연약하고, 사단은 강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연약한 인간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 마음대로 지배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합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육신의 본능을 좇아 살도록 합니다. 사단은 인간을 죄의 노예로 만들어 행복과 자유를 앗아갑니다.

인간은 사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해도 힘이 없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성실로는 죄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사단이 인간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성경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죄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즉시 죄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단의 세력을 파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서기관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하셨습니다. 28,2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죄에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수없이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실로 죄 중에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로 인해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진실 되게 죄를 고백하면 예수님은 그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이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고의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진리를 왜곡합니다. 성경은 이런 죄를 이렇게 경고합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10:26,27).”

이 세상은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미친 자가 되어 사람을 살리는 거룩한 삶, 역사에 길이 남는 그런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31-35)

예수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자에 대해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고 계실 때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데려 가고자 온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밖에서 찾고 있음을 알렸습니다(32). 무리들은 예수님이 당연히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가족들을 맞이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무리들은 부모와 형제는 어떤 것보다도 우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가족관은 혈연 중심이었습니다. 혈연중심은 피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피는 이데올로기보다 진합니다. 피는 돈보다 더 강합니다. 피가 이끄는 힘은 추석이나 구정 때 그 지옥 같은 교통 불편을 마다하고 귀향하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찰과 대치하는 인질범을 누가 설득할 수 있습니까? 직장 상사입니까? 동료직원입니까? 고향친구입니까? 경찰당국입니까? 아닙니다. 오로지 그를 길러주었던 엄마의 처절한 절규 “엄마야. 이리 나오너라. 아니면 엄마 죽을 거야” 하는 엄마의 애절한 호소에 인질범은 마침내 항복하고 맙니다. 이만큼 피의 힘은 큽니다. 그런 가족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4,35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태복음에서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9)”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찾아오셨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혈연중심의 사회에서는 불효자 중의 불효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이 가정 제도를 부인하기 위해, 또 불효의 행위로서 이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친족들은 미쳤다고 하는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오려고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친족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금 육신의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새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가정으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으로서의 교회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혈연 중심이 아닌 신앙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35)” 이게 교회로서의 가정입니다. 즉 교회는 신앙에 의해서 맺어진 공동체입니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크고, 가정 안에서의 관계가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중요합니다. 인관 관계는 가정에서 출발해서 밖으로 확대해 나갑니다. 가족에게 잘하지 못하면서 밖의 사람에게만 잘하는 사람은 온전한 인격체가 아닙니다.

한편 가족 이기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족이 소중하고, 부모님이 아무리 커도 거기에도 이기심과 사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고 남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지상의 최고의 관계인 가족도 달콤한 면은 있지만 사실 완벽한 공동체는 못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이 가정의 절대화를 경계하십니다. 그리고 가정이 아무리 소중해도 하나님 나라 가치에 앞설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가정인 아담과 하와는 잘못된 의기투합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또 자녀는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피로 맺어진 가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도 가족이고, 소위 ‘웬수’도 가족 중 하나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상의 가족 공동체는 너무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 공동체, 교회 공동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지상의 교회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가정에서 보는 악이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는 완벽한 교회가 됩니다.

둘째로,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원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원 밖에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원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 새 가족으로서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목사를 포함해 모두 예수님을 중심한 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지 않는 무리는 결국 다 흩어집니다. 건물을 중심으로 모였던 서구 교회가 쇠퇴하고, 사람 중심으로 모인 이단 무리는 그 이단의 두목이 없어지면 사라졌습니다. 당을 지어 모이는 무리 또한 다 흩어졌습니다. 교회는 예수 중심한 가정입니다. 예수 중심으로 모이는 가정으로서의 교회만이 영원합니다.

셋째로, 교회는 의리 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을 묶는 것은 의리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교회는 말씀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정당이나 사교 단체를 포함한 이 세상의 단체는 대개 이익 중심으로 뭉치고 흩어집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면 늘어나고, 이익이 안 되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이고, 말씀을 같이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일까를 항상 궁금해 하는 태도가 올바른 태도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말씀이 아닌 뭔가 유익을 얻기 위해 나온다면 그것은 크리스천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나온다면 이 또한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 이것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가정으로서의 교회입니다.

넷째로, 교회는 신분과 계층 간의 갈등을 초월합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계층과 종족과 나라를 초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남녀노소, 신분 고하, 계층, 종족, 민족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갈3:28-29). 교회는 영남과 호남, 남과 북과 같은 지역감정이나 민족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정으로서의 교회는 지역감정과 민족 분쟁을 타파할 수 있고 편협한 마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은 영원합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은 언젠가는 죽음으로 헤어집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인해 남보다 더 좋지 않은 관계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가족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영적인 가족들을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새 가족으로 삼으시고 귀히 여기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와 형제들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관계성을 끊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님의 장래를 생각하셨고, 가정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요19:26,27).

이로 인해 예수님의 생전에는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동생 야고보가 후에는 변화되어 초대교회 예루살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요7:5,행15:13). 우리는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도와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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