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18강실전에 강하라

조회 수 2370 추천 수 0 2012.07.12 07:25:53
마가복음 제 18 강(4:35-41)

실전에 강하라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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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경 위의 등불,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 비유 등의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듣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가장 불행한 것은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모스서 8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삶의 현장으로 말씀을 들고 가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이론으로 끝나 버리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물질을 쓰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물질을 자기를 위해 쓰지 말고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쓰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물질을 씁니다.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지만 십일조 드리고 주님을 위해 드리고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그러다가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위해 드리는 사람들은 절대로 신용불량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삶의 현장으로 가시고자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자 하셨습니다.

본문은 갈릴리 항해 중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혹자는 인생의 여정을 항해로 비유합니다. 항해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사건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미풍도 만나고 큰 광풍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만날 때 거기에 대한 태도도 천차만별합니다. 어떤 사람은 광풍 앞에 운명적이 되어 체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나 처자식을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상황을 원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그 문제를 풀어갑니다.

항해 중에 갑자기 큰 광풍이 불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안 돌아보십니까? 왜 잠만 자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울부짖는 음성을 듣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요,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 고백의 기초가 됩니다. 사도 신경의 첫 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목적이 되십니다. 우리가 삶의 여정 중에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믿어 역경을 이기고 믿음의 용사, 믿음의 거목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첫째, 심히 두려워하는 제자들(35-38)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배를 준비하여 예수님을 태우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붉게 물든 저녁노을은 장관이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갈매기가 나르고, 물새들이 노래하며 산들바람까지 불었습니다. 그 광경은 실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믿음의 거목이 될 소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이 나서 힘차게 노를 저었습니다. 배는 잔잔한 호수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절로 찬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로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큰 광풍으로 인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호수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잔잔한 물결이 갑자기 큰 광풍으로 돌변하여 파도가 일어 배를 삼킬 것만 같았습니다. ‘큰 광풍’이란 헬라어로 메가톤급의 광풍을 말합니다. 1메가톤은 TNT 100 만 톤의 에너지의 크기입니다.

제자들은 어부 생활을 통해 광풍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광풍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옛 전공과 경험을 의지하여 큰 광풍으로 삼킬 듯 밀려오는 세찬 파도와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풍 앞에 자신들의 상식과 경험, 전공과 노력, 힘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배가 금새 뒤집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광풍으로 인해 제자들의 내면에 두려움의 광풍, 의심의 광풍, 절망의 광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죽음의 공포로 사색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위기 중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너무 피곤하셔서 배가 출발하자 곧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습니다(38a). 이 안식은 열심히 일한 후에 맛볼 수 있는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안식입니다.

생존경쟁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이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열심히 일대일 성경을 공부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맡은 사명을 힘을 다해 감당할 때 드러눕는 순간 코를 골게 됩니다. 사람이 눕자마자 단잠을 잔다는 것은 행복 중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을 자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시127:2).

이 때 제자들은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b)?”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는 돈벌이가 좋은 세리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으로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원망의 소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탄 배에 큰 광풍이 이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예수님이 탄 배에 큰 광풍이 이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끝까지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아프지도 않고, 성적도 좋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직장도 구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승진도 잘 되고, 어떤 사고도 없이 잘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병마와 죽음, 화재, 아버지의 사업 실패, 불의 사고, 성적의 저공비행과 미사일 맞는 등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광풍을 만날 때 죄를 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인과응보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죄에 대한 징계로 인한 광풍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광풍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은 아닙니다. 욥을 보면 욥이 죄를 져서 큰 시련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욥의 신앙을 시기하여 그를 넘어뜨리고자 시련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광풍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순수케 하시고 성숙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헛된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풍을 통해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시고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온실의 화초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풍상을 겪으며 자란 나무는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광풍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9).” 다윗도 광풍의 의미를 깨닫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리고 광풍을 만날 때 예수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광풍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광풍을 왜 빨리 잔잔케 하지 않으셨는가, 제자들을 죽도록 고생시키시다가 도와주시는 잔인하신 분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잔인하신 분이 아니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광풍을 빨리 잔잔케 하시고 안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더 염려해야 옳습니다. 그들은 두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 안 되면 배에서 뛰어 내려 헤엄을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속된 말로 예수님은 앉아서 당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을 더 걱정해야 옳습니다. 아니 주무시는 분을 깨워 위기를 모면토록 해야 옳습니다. “예수님, 지금 이렇게 주무시면 위험합니다.” 이렇게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무시는 분에게 원망합니다. 그리고 36절을 보면 다른 배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목자라면 다른 배들의 사람들을 걱정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죽게 되었다고 원망합니다.

이처럼 원망은 자신만을 생각할 때 생깁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또 제자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끝장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돌보지 않고 주무시는 것이 말이 되느냐 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빠져 죽어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들의 형편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중단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광풍중에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광풍중에서도 예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원망 섞인 기도를 하거나 또 남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그 사람의 신앙 척도입니다. 절망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합시다. 이는 쉽지 않지만 이게 성도의 성숙입니다.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도움과 피난처가 되심을 믿고 감사 기도합시다.

둘째,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39-41)

예수님은 제자들의 원망의 절규를 들으시고 눈을 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39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명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메카톤급의 광풍이 잔잔해졌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권능자이십니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다 할지라도 태풍의 발생 지점과 시간, 경로 등만을 알 수 있을 뿐 태풍을 잔잔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온 땅을 뒤덮여있을 때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순식간에 흑암의 세력이 물러가고 온 세상을 밝히는 빛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기치 않은 광풍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어야 합니다.

이한나 선교사의 편지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요셉 선교사의 주인은 경기가 좋지 않다며 몇 주 만에 해고시켰습니다. 다시 새 직장을 구해서, 노동비자와 취업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변호사 비용을 다시 지불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남편을 원망하며 어둠의 세력에 묻혀 지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도대체 그 풍성하고 값싸고, 살기 좋은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이 늦은 나이에 일자리, 비자 문제 가지고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정말 기도해야 될 때,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감사해야 될 때 저는 현실만을 바라보고 남편만을 원망했습니다.

이때 오늘 아침에 요셉선교사가 사무엘을 학교 보내고 기도모임 갖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우리는 요한이와 함께 세 명이 무릎을 꿇고 일용할양식을 보았습니다. 9월 3일자 양식말씀을 펴니 마가복음 9장 14-29절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믿음이 없음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어 저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음날 일자리를 주시는 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일수록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은 사단의 세력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는 말씀은 귀신을 내어 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단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함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끝장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결코 예수님이 타신 배를 파선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파하신 부활의 권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틈만 있으면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합니다. 그러나 사망 권세를 파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계속하여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8).” 아멘.

예수님은 성난 광풍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을 위로하셔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40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광풍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풍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광풍 앞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는 맑은 날씨에는 태양이 있지만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칠 때에는 태양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명한 날씨에도 태양은 떠 있고,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 태양은 구름 위에 항상 존재합니다. 다만 구름에 가려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계시고 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십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독생자를 주신 그 크신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마28:19,20).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은 제자 1년 만에 물고기 밥이 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려움 앞에 지금까지 체험한 믿음을 광풍에 다 날려 보냈습니다. 낮에 들었던 은혜로운 말씀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믿음이란 실전에 강해야 됩니다. 말씀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야 합니다. 청명한 날씨에 믿는다면 폭풍우 치는 칠흑 같은 밤에도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 앞에 불신자처럼 되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말씀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여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마음이 오그라들고, 손발이 마비되고, 생각이 부정적으로 됩니다. 원망하고 완악해집니다.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지고, 말과 행동이 거칠어집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능히 할 수 있는 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 두려움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해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자녀들에 대한 두려움, 직장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물질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성격으로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치열한 생존경쟁 사회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의학과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고, 다만 그 증상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나의 내면에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 생애에 많은 죽을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내면의 두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힘 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의 내면에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예수님은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근원이 되십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능력을 갖도록 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말씀은 믿음의 능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는 미풍 앞에서도 짠물을 마시고 익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어떤 인생의 광풍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항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 태산을 옮길 수 있고 역경을 이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영웅들이 나옵니다. 믿음의 용사들은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악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모든 연약함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불가능을 극복하고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간 노예 생활로 인하여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육신적이었습니다. 내일의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때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노예 백성에서 강한 하나님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건강하지 못한 생각, 사상, 습관 등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모습과 한국의 현실을 볼 때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강한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론적인 믿음을 실제적인 삶속에서 산 믿음을 갖도록 제자들을 광풍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 훈련을 통해서 광풍이 많은 시대에 요동치 않고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자가 백수의 왕자가 되고, 독수리가 하늘의 왕자가 되는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로 우리가 광풍을 만나 고통하고 있을 때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기이히 여기고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41).” ‘심히 두려웠다’는 것은 메카톤급의 경외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의 인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는 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까지도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닥칠 무서운 풍랑 속에서도 요동치 않는 믿음의 용사로 키우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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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과감성,2019)

                  야고보서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7)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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