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 20 강(5:21-24,35-43)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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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에 따르면 공포란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살면서 공포를 경험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담이 센 사람이라도 거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공포의 특징은 전염병과 같아서 한 사람이 공포에 떨면 순식간에 그 공포는 창궐을 하게 됩니다. 이 공포와 두려움은 우리의 의지로 물리친 적이 없습니다. 이 두려움과 저항하게 되면 할수록 더 두렵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공포가 지금까지 수많은 형태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해보지난 끈질기게 우리를 공격합니다.

두려움의 실체는 단절 이후에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한 염려입니다. 어떤 상황과 상황의 단절, 관계와 관계의 단절, 그 후에 있을 두려움, 죽음, 군 입대, 이별, 수술, 사업실패 등, 그 단절의 다음에 어떤 것이 올지 모르는 염려가 공포와 두려움의 실체입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는 것이 왜 두려운가요? 그와 헤어진 후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죽음 앞에 두려워합니까? 이는 사람들이 죽음의 후에 어떤 것이 올지, 그 후에 전혀 정보가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타나토노트’를 보면, 사후 세계를 인지하게 된 후 인류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절 이후의 실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죽음 이후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부활로, 믿는 자들에는 영생의 부활로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a).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인데 그러나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히9:27). 그 심판은 제 2의 죽음으로 유황불에 타는 못에 영원히 참여하게 된다(계21:8)”고 하셨습니다. 이게 믿지 않는 자들의 죽은 이후의 실체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6:23b).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다(벧전1:3,4).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한다(엡2:6). 이곳은 슬픔도 죽음도 애통도 아픈 것도 어둠도 없습니다(계21:1-4). 그러니까 두려움의 원인은 영적인 무지에서 옵니다. 유명한 영화 ‘올드 보이’에서 “15년이라는 것만 알려줬어도…”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의 차이는 이렇게 큰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죽은 이후의 실체를 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알게 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요한1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 때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보내주신 사랑을 알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로마서 8장 32-36절을 보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고 했습니다. ‘넉넉히 이긴다(more than conquerors)’는 것은 압도적인 승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바울은 찬양합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에게는 우리를 대적하는 여러 세력들이 있습니다. 불신 세상이 나를 대적하고 사망권세가 나를 대적합니다.

그러나 사망이나 생명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이간시키기를 좋아하는 악한 천사와 권세 잡은 자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환난이 그리스도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환난 앞에서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장래 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래 일로 두려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능력이나 표적도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운명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시공간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아멘.

본문에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나옵니다. 죽음은 사람들을 슬프게 합니다. 죽음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역동적인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께 간구하는 회당장 야이로(21-24)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돕기 위해 바닷가에 계셨을 때 무리 가운데서 황급히 달려 나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유대 사회는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마다 예배를 섬기고 모든 행정적인 업무를 맡아 감당하는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명예로운 직분이었습니다. 야이로는 그 시대에 엘리트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12살 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예쁜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가 고된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딸이 ‘아빠!’하고 부르며 뛰어나올 때의 그 행복함이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 순간 격무에 시달렸던 모든 피로가 싹 가시고 무한한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딸은 그에게 기쁨이요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딸이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시름시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용하다는 의사를 다 불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시시각각 어린 딸에게 다가올 때 그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소문을 듣자마자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많이 간구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예수님, 제발 와 주세요, 와 주세요?”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회당장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신과 체면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그들에게 미움을 사서, 그 사회에서 매장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는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체면과 자의식과 모든 어려움을 뛰어 넘어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게 했습니다.

유대인은 12살이면 성년취급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대학 1,2학년 때 성년식을 합니다. 이 시기의 대학생들은 본문에 나오는 딸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청순한 젊은이들이 시름시름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깊은 열등감과 관계성 문제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인생의 방향을 몰라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육신의 쾌락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깊은 시기심과 운명으로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성 문제로 하루 종일 컴퓨터와 놉니다. 젊은이들은 각기 많은 문제를 안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믿음을 심으시는 예수님(35,36)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을 만나 고쳐 주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에 회당장의 집으로부터 사람들이 와서 절망적인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회당장님! 죽었어요, 이젠 끝났어요!” 그들은 딸이 이미 죽었으니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빨리 가서 장례식을 준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은 살릴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일말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조금이라도 살아 있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이제 희망이 없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소리에 야이로의 온 몸은 힘이 쫙 빠져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영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는 한없는 슬픔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처럼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곱게 키운 딸을 시집보낼 때 눈물을 흘립니다. 이제 매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훔칩니다. 그러나 매일은 만나지 못하지만 가끔 만날 수 있기에 눈물을 얼른 닦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앞이 캄캄했습니다. 죽음은 그의 소망을 송두리째 앗아갔습니다. 죽음은 그에게 무기력을 심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은 야이로의 마음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었습니다. 36절에서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신 것을 보면 야이로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두려움이 생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은 그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사단이 심어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죽었다는 말을 통해 야이로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마음속에 불신과 두려움이 자리 잡기 전에 재빨리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두려움, 공포가 있습니다. 고공공포증, 공간공포증, 홍안공포증, 독거공포증, 통증공포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취직과 건강에 대한 두려움, 학점에 대한 두려움, 결혼에 대한 두려움, 자녀에 대한 두려움, 세상 아내들은 남편들이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매사에 소심해지고 확신이 없습니다.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겁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눈이 커지고, 신경이 예민해져 신경질을 부립니다. 입만 열면 원망과 불평이 쏟아집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인간의 내면을 어둡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가장 큰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두려움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행 제 1 호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힘과 능력을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1:7).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두려움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러면 두려움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그 곳에서 축복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죄를 범함으로 인간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은 자들은 그 내면이 담대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들은 두려워합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12지파 두령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0두령들은 장대한 아낙 자손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가보니 그 곳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그 곳에 사는 백성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아낙 자손은 대장부로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더이다(민13:27-33).” 불신에 찬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절망에 빠져 밤새도록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어느 때까지 이들이 나를 멸시하겠느냐고 무섭게 진노하셨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셔서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용사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동요하는 백성들을 안돈시키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상황과 조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기만 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야이로는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불신의 소리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소유했던 믿음을 계속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지를 주관하시는 권능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어떤 두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 나의 방패가 되십니다.

셋째,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37-43)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집으로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갔을 때 분위기가 어떠했습니까? 야이로의 집에는 훤화하는 소리와 울며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 절망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아이의 어머니를 위로하며 같이 울어 주었습니다. ‘실컷 울으세요!’ 초상집에서는 같이 울어 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아이의 아버지인 야이로가 도착한 것을 보자 사람들은 더욱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는 부활의 소망이 없는 현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 ‘어찌하여 우느냐?’ 이 말씀은 울고 있는 그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안타까워하시는 음성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울 필요가 없습니다. 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남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깨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틈만 있으면 잠을 잡니다. 지금 이 예배 시간에도 틈틈이 자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없는 곳과 예수님이 계신 곳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없는 곳은 절망과 허무와 슬픔과 체념이 지배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은 잠시 이별하는 슬픔은 있지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때문에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믿음이 좋으신 4자녀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임종을 앞두고 4 자녀 앞에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3 자녀에게는 ‘good-night’하고 인사했는데 한 자녀에게만 ‘good-bye’하고 인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는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저에게만 good-bye하고 인사하십니까?’ 그 때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네 형과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 나라에서 만날 수 있지만 너는 예수님을 안 믿으니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어서 good-bye라고 인사해야 되겠구나!’ 이 때 그 자녀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의 죽음은 다시 만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슬프지 않습니다. 깨어 보니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불신하는 자들을 다 내어 보내시고 세 제자들과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때 소녀는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 죽은 아이는 생명의 주의 음성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죽은 영혼이 소생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기호에 맞는 말만 듣고자 합니다. 먹는 이야기나 결혼 이야기는 은밀히 이야기해도 잘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를 기울인다, 경청한다, 순종한다, 관심을 갖는다, 겸허하게 배운다’는 뜻으로, 말씀에 대한 자세를 말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말씀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어렵고 힘들어서 못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자세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습니다.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할 수 있습니다(히4:12).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듣고 순종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한 말씀이라도 듣고 순종하면 살아납니다. 한 말씀이라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상한 마음이 치료됩니다. 패인 마음이 메꾸어집니다. 열등감이 치료됩니다. 소녀가 생명의 수여자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격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두려움의 세력을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물리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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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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