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제3강 전도서 4:1~16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4:9)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유전의 요인으로 보느냐, 아니면 환경의 요인으로 보느냐는 심리학에서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입니다. 정신분석 심리학에서는 모든 문제를 유전으로 봅니다.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행동심리학에서는 환경이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한다고 봅니다.

한편 긍정심리학에서는 환경이나 유전에 있지 않고, 환경과 상황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행복학에서는 성취감, 인간관계, 영성, 나눔이 중요한 요인으로 봅니다. 이 중에 인간관계가 중요한 요인 중의 요인입니다. 학교에서 인간관계가 좋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직장에서 인간관계가 불편하게 되면 이직하게 되고, 부부가 관계가 좋지 않으면 별거하거나 이혼하게 됩니다. 친구 관계가 깨지면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됩니다. 그래서 카네기는 인간관계에서 15%는 자기 실력, 85%는 인간관계라고 했고, 컬럼비아대학 MBA에서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95%까지 봅니다.

본문은 학대받는 사람과 가진 사람, 그리고 자리에서 내려옴으로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자신의 서글픔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주는 메시지는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모두가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으므로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에서 세상에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상처가 없는 사람 또한 한 명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위로를 받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싸매어 줄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상담학에서 치유되지 않은 상담가는 좋은 상담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우리가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1. 학대받는 자의 슬픔(4:1~3)

요즈음처럼 학대란 단어가 그렇게 많이 쓰일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학대받는 아동, 학대받는 외국인 노동자, 학대받는 남편, 학대받은 아내, 학대받는 노부모 등 학대가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학원 폭력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4:1)

학대받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권력이 없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힘도 없고,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것도 슬픈데 학대까지 받고 있으니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원통스럽겠습니까? 선교사님들이 알게 모르게 현지인으로부터 무시 받을 때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당할 때의 무력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만 유신과 전두환 군부 시절에는 노동자들이 입도 뻥끗하지 못했습니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젊은 청년 전태일씨는 분신자살까지 했습니다. 학대받는 사람은 위로자를 만나지 못해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도다 하였노라.”(4:1~3)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사람이 위로자가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위로자만 있으면 고통과 슬픔, 그리고 역경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위로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고, 죽는 것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과중한 격무와 힘든 학업으로 낙심하고 절망할 때 누구를 찾습니까?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기도 합니다. 노래방, 소주방을 찾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노래 부르고 술을 마시므로 스트레스를 풉니다. 바바라 톰슨이 쓴 한 잔의 술로 죽어간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술이 80%의 방화와 익사 사건, 60%의 폭력, 30%의 자살을 불러일으킨다고 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주방에 가서 술로 위로를 받지 마세요.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와서 맥주 한 잔씩 마셨다고 합니다. 홀짝홀짝 마신 술이 말년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더는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우울증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위로자가 없을까요? 위로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으로 오늘의 고통과 역경과 슬픔과 아픔에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말씀을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민답게 살았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선민답게 전리품을 거절하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까지 드렸습니다. 이렇게 산 그의 결과는 주위의 원수들뿐이었습니다. 자녀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두려웠습니다. 그는 피해의식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방패와 큰 상급이 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3~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위로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보통 위로하면 단순히 마음을 기쁘게 하는 감정의 차원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로하다’(παράκλησις)는 누군가 옆에 밀착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하여 그것을 수행케 하는 거룩한 독촉’(holy urging)이란 뜻입니다. 시제는 현재 분사형으로 역동적이고 계속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고난을 슬픔을 견딜 수 있도록 독촉하여 인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이길 수 있도록 독촉하여 소망을 굳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독촉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독촉으로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 모든 위로의 근원이십니다.

이사야 401절에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말씀은 헨델의 메시아 서곡에 나옵니다. 헨델은 이 말씀으로 큰 은혜를 받고 절망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났지만, 사회는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음악회를 열었지만, 누구 하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는 낙심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56세가 되어서는 몸 한쪽에 마비 증상까지 왔습니다. 빚쟁이들이 찾아와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가 절망에 빠져 낙심하고 있을 때 친구 찰스 제닌스(Charles Jennens)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헨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면서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작곡해 보게, 이 말씀의 주인이 자네를 다시 일으켜 줄 것일세,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빠르지 않은가?”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놀라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주제로 24일간 침식을 잊은 채 작곡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곡이 헨델의 메시아입니다. 메시아의 첫 부분의 너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은 절망 중에 빠져 있던 헨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이 위로로 불멸의 명작 헨델의 메시아가 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과 아픔이 있는 우리에게 쉼을 주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되 넘치도록 위로하여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서 오히려 환난 받는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2. 가진 자의 슬픔(4:4~16)

사람들은 무엇을 소유하면 슬픔이 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착같이 노력하여 모으고 얻고 취합니다. 이제 열심히 노력하여 무엇인가를 얻었습니다. 부도 얻고, 권세도 얻고, 학위도 얻고, 사랑도 얻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행복의 여신이 찾아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기 시작합니다(4:4). 가진 것이 없을 때 그렇게 친했던 친구와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러자 즐거움을 함께 누릴 친구가 없습니다(4:7~8). 그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유보다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4:9~12)

기쁨을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그 슬픔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하여 줄 수 있는 친구, 기쁠 때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슬플 때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신앙의 침체 속으로 빠져들 때 바로 잡아주는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함께 길을 가며 서로 격려할 수 있다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나누고, 같이 아픔을 나누고, 어려울 때 함께하는 급난지붕, 이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서 말씀의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비전을 공유하여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사귐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런 말이 일이 있습니다. 퇴직한 사람들에게 4대 필수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친구입니다. 저녁을 먹고 슬리퍼를 끌고 양파 먹어 입에서 양파 냄새가 진동하고, 청국장을 끓여 먹어 옷에는 청국장 냄새로 진동한 채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일할 일, 사명, 셋째는 건강, 넷째는 돈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친구와 삼겹살 정도는 함께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무엇보다도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아름다운 사랑이 나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인간적으로 보면 왕권을 놓고 경쟁하는 경쟁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만난 그 순간 이후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승리가 곧 자기의 승리요, 다윗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의 시련과 고통이 자기 고통이 되어 다윗과 생사고락을 같이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승한 기이한 사랑이었습니다.

다윗은 시련의 날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여 못쓰게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변치 않는 사랑이 다윗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다윗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며 힘을 주었습니다. 세상이 다 다윗을 버릴지라도 다윗에게 요나단이 있기에 그는 행복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사랑의 꽃이 피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죄인들을 무조건 사랑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증거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15:13)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친구 삼아 예수님과 동행하며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이는 타인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를 떠나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혼자 살게 되면 정서와 심리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점점 공동체 생활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에 살면서 앞집과 앞집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삽니다.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입니다. 공동주택에 살면서 공동체 생활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외부와 소통이 단절되는 은둔형 외톨이가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인터넷이 유일한 공간이 됩니다. 인터넷은 개인을 고립시키는 속성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코로나로 학교나 직장에서 비대면 접촉이 늘면서 은둔형 외톨이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가 점점 심화되면 외로운 늑대라는 병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이란 이란 한자로 서로 의지하는 상형문자입니다. 인간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성경 또한 성도의 교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회란 가르칠 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사귈 자로서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헬라어도 교회란 코이노니아인데 이는 사귐이란 뜻입니다. 교회는 네 가지 요인이 갖추어야 합니다. 케리그마(κρυγμα, 복음 선포),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교제),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봉사), 유카리스티아(εχαριστία, 성찬)가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 코이노니아는 매우 중요합니다. 교제는 하나님의 가족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교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요일 3:1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됩니다. 성도는 믿음뿐만 아니라 소속이 중요합니다. 혈육은 세상으로 끝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족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영원합니다.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 것은 첫째로 인간은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홀로 살아가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함께 동행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함으로 안전하고 더 멀리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지루합니다. 혼자는 멀리 걷지 못합니다. 그러나 둘이 여행하면 피곤한 줄 모릅니다. 둘이 걸으면 더 멀리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여정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여정은 길고 깁니다. 혼자는 걸을 수 없습니다. 이 여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하며 걸어야 하는 순례의 길입니다. 셋째로 교제는 synergy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합심은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의 눈송이는 무력하나 많은 눈송이가 뭉쳐지면 교통이 마비됩니다.

말 한 마리는 통상 2톤의 무게를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산술적으로 말 두 마리가 끌면 4톤의 무게를 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가 같은 방향으로 끌면 무려 24톤의 무게를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둘이서 마음을 모아 합심하면 그 힘이 기하급수로 커집니다. 초대 교회는 많은 환난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때 서로 돕고 돕는 코이노니아는 초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이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33:1)라고 노래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께 가는 길은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둘이 모이면 거기에는 다툼이 있습니다. 한 집안에도 형제자매끼리도 사이가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어릴 때는 많이 싸웁니다. 특히 나이 차가 별로 차이가 없을 때 다툼이 많습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다가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 버리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갈등합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다투기도 합니다. 그 원인을 보면 영적으로 어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두 가지 구경거리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불구경, 다른 하나는 싸움하는 것을 보는 구경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서로 다투면 세상 사람들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복은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진실한 친구를 만나 서로 격려하며 감싸 안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그것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녹이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있었으면 합니다.

3. 잊힌 자의 슬픔(4:13-16)

가난한 자, 옥에 갇힌 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 왕은 인기가 있어서 여론 조사를 하면 인기가 99%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때 그 누구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때 무대에 섰을 때의 우레 같은 박수 소리, 그러나 무대 뒤로 사라졌을 때 그 누구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그 슬픔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4:16)

 

 

예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고 그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좋은 친구가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친구의 소중함을 알고 좋은 사귐, 서로 돕고 돕는 코이노니아가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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