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자녀와 같이 행하라

조회 수 2624 추천 수 0 2012.07.11 02:25:50
에베소서 5:1-21, 요절 5:8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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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사랑과 빛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행하고, 빛의 자녀들같이 행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앙이란 이론으로 그쳐서는 되지 않고 삶의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라 했습니다(약2:17). 우리는 과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두움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특히 우리는 지난 주 수양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강한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1)

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1380년에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고전중의 고전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집니다. 이 책을 쓰던 시대적 배경은 백년 전쟁과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무서운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절망과 좌절의 암흑기였습니다. 그는 이런 절망과 좌절의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밖에 없다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자고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 시대를 향하여 외친 메시지들을 모아 엮은 것이 그 유명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입니다. 이 책은 후에 홀란드에 복음주의를 견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고 절망과 좌절한 백성들의 영혼을 일깨웠고, 도덕적 회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요구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영광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여 더럽고 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인데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을 만큼 고귀하고 높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 요구는 인간이 이 땅위에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엄청난 책임과 의무를 지고 살아야 할 것을 보여준 말씀이요, 인간이 가져야 할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목표를 보여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닮을 수 없는, 공유할 수 없는, 영원성, 전지전능성, 절대성, 유일성은 인간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독특한 품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공의, 지혜, 진실함, 거룩한 품성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품성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말 속담 중에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게 모르게 본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딸은 어머니를 닮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같이 걷고, 아버지같이 말합니다. 아버지를 알게 모르게 흉내 냅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자녀들이 아버지같이 됩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자식은 크면 절대로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크면 아버지와 같이 술주정뱅이가 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실한 크리스천의 부모를 둔 자녀는 나중에 커서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요? 늘 부모님과 함께 거하면서 듣고 보고 가르침을 받다보니 본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31,3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바다에 닻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악의 파도로 흉흉합니다. 정욕의 파도, 물질주의의 파도, 인본주의의 파도, 그릇된 가치관과 죄악된 사상의 파도가 삼각파도를 형성하여 무섭게 엄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에는 이 세상의 죄를 이길 수 있는 믿음으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교회 문만 나서면 그 파도가 얼마나 큰지 그 조류에 나도 모르게 떠내려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히2:1).”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말씀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굳게 붙들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제자란 헬라어로 ‘μαθητηs(마세테스)’로 배우는 자란 뜻입니다. 말씀 안에 거할 때에 예수님을 배우게 되어 믿음의 거장이 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성의 향기가 나게 됩니다. little Jesus, 작은 예수가 되어 하나님의 품성,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스펠송을 잘 부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랑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노래를 계속하는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랑을 충만히 받았는데 또 무슨 사랑을 받겠다는 것입니까? 이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닮고 배워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고대 희랍의 연무장에는 뛰어난 무사들의 경기 모습을 그린 커다란 그림 아래에 “주목하라! 모방하라! 반복하라!”는 문귀가 씌어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닮아야 합니다. 반복해서 닮아야 합니다. 나의 무의식의 세계가 달라질 때까지 닮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이게 성화입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으로 나타낼 때까지 예수님을 주목하고 예수님을 본받으십시오. 아멘.

둘째, 사랑을 행하여야 합니다(2-7)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사랑가운데 행하라 했습니다. 사랑을 행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2a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만 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소유를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리와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영광을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부요하신 분이시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자체를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다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왜 자녀를 위해 희생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양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간을 희생하고 물질을 희생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녁이나 주말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양들을 사랑한다면, 정망 우리가 자녀를 사랑한다면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자녀들과 양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믿음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Gospel song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 사랑은 다 주는 것, 사랑은 버리는 것.” 맞습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이고, 사랑은 다 주는 것이고, 사랑은 버리는 것입니다. 다같이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 사랑은 다 주는 것, 사랑은 버리는 것♪

2b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이 되셨습니다. 제물과 생축은 제사장이 제단에 드린 것을 말하는데,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생축은 전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드려진 생축의 머리에 안수하여 상징적으로 백성들의 죄를 다 짐승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 다음에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생명이 취함을 입고 피는 흘리어졌습니다. 이 피는 주발에 담겨져 대제사장에 의해 지성소의 법궤 앞에 뿌려졌습니다. 그런 다음에 짐승의 몸은 성전 바깥뜰에 있는 제단에 옮겨 불태워졌습니다. 향기롭다는 것은 태울 때 나는 냄새를 말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다, 만족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족하셨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음에 대한 예표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생축은 죽은 짐승이 아닌 살아있는 제물이었습니다. 죽은 짐승은 말이 없습니다. 죽은 짐승은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축은 살아있는 짐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랑이 아닌 산사랑(living love)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사랑이 아닌 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거미같이 어두운 곳에 숨었다가 낚아채는 죽은 사랑이 아닌 살리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개미 같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여치와 같이 가무를 즐기는 사랑이 아닌 생산성 있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실제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힘을 주는 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요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대조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3,4절을 보겠습니다. 음행이 나옵니다. 온갖 더러운 것이 나옵니다. 탐욕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이교도 세계에서는 아주 보편적이었습니다. 신상 앞에서 매춘 행위는 하나의 종교 의식이었습니다. 신전을 섬기는 여사제는 매춘부였으며 여기서 얻어지는 돈으로 신전을 유지했습니다. 음행은 이방종교의 사교의 상징이었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은 음행을 포함한 모든 성적인 악풍의 총칭입니다. 탐욕은 끝없는 성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당시 사회에서 보통으로 행해졌던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철인, 정치인 등 저명한 인물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요즘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세상은 사랑을 빙자하여 부부 외에 음행을 일삼습니다. 요즘 러브호텔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호텔이나 모텔은 나그네가 묵어가는 곳입니다. 이런 장소가 불륜의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의 대화는 음담패설이 주를 이룹니다. 낯 뜨거운 광고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공영매체를 타고 안방을 침투합니다. 음란 인터넷이 청소년들뿐만 모든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엄히 명령합니다. “너희 중에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부르지 말라는 말은 영어로 hint로, 암시도 하지 말라, 가까이 가지 말 것은 물론이고 입 밖에조차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면 왕따가 되고 또 분위기가 썰렁하기 때문에 과장하여 입에 침을 튀기며 앞 다투어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악행을 가볍게 취급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런 죄악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4절을 보면 ‘누추함’이 나옵니다. 이는 방탕하고 격에 맞지 않는 몸가짐을 말합니다. ‘어리석은 말’이 나옵니다. 이는 음탕하고 음란한 이야기로, 듣는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희롱’은 즐겁게 하기 위해 추잡한 내용이 담긴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4:29을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더러운 죄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하는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우리가 기업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두 헛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식의 헛된 말로 누구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1: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우리를 위해 향기로운 제물이요 생축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죽은 사랑이 아닌 산사랑,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닌 주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아멘.

셋째,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8-14)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부도덕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 다음 에베소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이유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과 빛은 대조가 됩니다. 어두움은 무지와 악을 상징합니다. 죄를 범한 상태를 말합니다. 빛은 진리와 의를 상징합니다. 어두운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행하면서도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세상을 ‘패역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패역한 세대란 방향감각을 상실한 세대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가운데 사는 사람은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고, 절망과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의 희망이 없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이 임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골1:13, 요8: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우리는 이미 빛이기 때문에 ‘빛을 비추소서’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제 주 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첫째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두움의 자식인지 아니면 빛의 자식인지 알려면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열매, 착한 열매, 진실한 열매를 맺으면 빛의 자녀들이고, 악한 열매, 불의의 열매, 거짓의 열매를 맺으면 어두움의 자식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착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의로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진실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IMF의 원인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기업이 투명하지 못한데서 왔습니다. 투명하지 못하니 대외신임도가 떨어졌습니다. 이중장부, 분식회계를 하고 비자금을 조성하니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누구를 믿고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누가 이 땅에 사업하러 오겠습니까? 투명은 모든 윤리와 경제와 신학과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기초가 무너지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도 미국이 강대국으로 건재하는 것은 정직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직에 대해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직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나옵니다. 그의 문제는 헌금을 반밖에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절반을 감추고 다 드렸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그에게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고 엄히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거룩한 사귐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게 되면, 투명하지 못하면 서로 신뢰할 수 없게 되고,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 사귐이 깨지게 되고, 사귐이 깨지면 공동체가 깨집니다. 정직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요 투명한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둘째는 어두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11절을 보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책망은 드러낸다, 폭로한다는 뜻입니다. 빛이 어두운 곳에 비춰지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도망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드러난 것들을 새로이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빛이 비춰지면 어떤 사람은 도피합니다. 빛으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갑니다. 변화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은 빛 앞에 노출된 자신의 추한 모습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가 드러날 때에 묻어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악행과 거짓이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도와야 합니다(13,14).

넷째,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야 합니다(15-21)

그런즉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먼저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영어성경에 보면 ‘redeeming the time(KJV)’으로 시간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이 귀한 시간을 죄악을 즐기는데 사용해야 합니까? 청년의 때에 시간을 헛되이 보내야 합니까?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시간을 아껴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알게 됩니다. 바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이 바로 시간을 아끼는 지름길이 됩니다.

문제는 주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우리에게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내가 스스로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체가 됩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지배입니다. 하나님은 성령께서 지배하기를 원하고 계신데 문제는 내가 지배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비워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뜻을 부인하고, 나의 죄악을 회개하고 비울 때 성령께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충만히 받으라는 말은 계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한번 충만했다가 그만 두는 것이 아닌 계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시와 찬미와 노래로 서로 화답하게 됩니다. 항상 감사하게 되고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빛의 자녀같이 행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변해야 합니다. 시간을 아끼며 살아갑시다.삶의 열매가 달라져야 하고, 윤리의 표준이 달라져야 하고, 삶의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캠퍼스에서, 내가 처한 환경에서 진실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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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저서 구입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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