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제 11 강(말씀, 4:1-12, 요절 :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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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왜 두 사도를 가두었습니까(1-4)? 사두개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2. 공회원들이 사도들에게 무엇을 따져 물었습니까(5-7)? 이들의 심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8-10)?

3. 하나님은 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어떻게 하셨습니까(11,12)? 건축자들의 머릿돌이 되시고,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님에 대해 말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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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성령 강림을 통해 교회는 날마다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경험한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기적을 체험하면서 초대 교회의 모든 교인들의 가슴 속에는 승리와 기쁨과 감격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감격과 기쁨과 환희 속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4장부터는 고난과 환난이 시작됩니다.

4:1~3절을 보면 사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므로 부활의 복음은 들불처럼 번져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사도들만 잡아가두면 될 줄로 알았습니다.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사람들인 제사장들은 성전을 맡은 자들이고,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 서기관, 헤롯당과 더불어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하는 종교 지도자들로 유대교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마 세력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는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교권을 잡은 세력으로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신학사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인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면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을 서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감옥에 갇힘으로 교회가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신자수가 자그마치 5,000명이었습니다(4).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25,000~85,000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인구 대비 20%~6%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바리새인의 숫자가 6,000이었는데 5,000명은 바리새인 숫자와 맞먹는 그런 숫자였습니다.

5,6절을 보겠습니다. 이튿날에 공회를 열었습니다. 공회는 70명으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가야바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심문하던 방식대로 사도들을 중앙에 세워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을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행했느냐? 물었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사건을 정치적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때도 신앙적인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각색하고 변질시켰습니다. 초대 교회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고난에 직면한 사도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은 5,000명의 신자들을 동원하여 대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전도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작전상 잠시 중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전도를 하다가 어려운 일에 봉착하게 되면, 복음을 전하다가 상대방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면, 복음을 외면당할 때, 눈총을 받던지, 험담을 듣던지, 조롱을 당하게 될 때 어떻게 합니까? 한 걸음 물러섭니까?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어? 때가 아닌 것 같아 하며 중단합니까? 회의적인 생각을 합니까? 아니면 내가 이런 고난을 받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할 것까지는 없지 않아? 하고 복음 전하는 것을 포기를 합니까? 사람이 인격이 무시당하는 것같고, 자존심이 상하는 듯싶으면 돌아설 수 있습니다. 제가 개척 초기에 인하대 도서관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수위에게 쫓겨나고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할 때 순간 회의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

8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 시각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가득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일반적인 역할은 중생과 성화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여 중생하게 합니다. 성령은 성화,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 더 나아가 성령은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성령 충만은 사명 충만, 전도 충만하게 합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은 정신이 몽롱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어떤 환상을 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했을 때 정신이 맑았습니다. 베드로가 엑스터시에 빠져 황홀경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성령 충만하다고 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방언을 연상합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아 병 고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사명 충만, 성령 충만은 권능 충만, 전도 충만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은 지혜 충만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소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7-20).” 공회에 끌려가 핍박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에 가서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 그 때에 네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이 충만하여 입을 열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사도들 자신들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입을 연 것입니다. 베드로의 입이 성령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의 입을 쓰시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담대하게 외치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되면 영적인 담대함을 갖게 됩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어떤 굴욕도 참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핍박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불사조와 같이 핍박과 환난 중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오뚜기 같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칠전팔기의 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두려워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다가 회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순교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곧 증거입니다. 성령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원수들 앞에서 담대하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9,1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인 가야바가 앉아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앞에 서 있습니다. 다른 제사장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앞에 두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다. 그 분은 절대로 죽으실 분이 아니다. 죽어서는 안 될 분이시고, 죽여서도 안될 분이다. 그런데 당신들이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 당신들은 엄청난 죄를 지었다. 회개하여야만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두려워서 도망갔던 겁 많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복음의 원수 앞에서 담대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가 살아났소” 얼마나 무서운 선언입니까? 대제사장을 정면으로 정죄합니다.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원수들 앞에서, 대적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예수 이야기, 부활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꼭 이 말을 해야지 하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이야기,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활의 승리를 노래하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사람이 강하게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백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경험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의 우선순위, 첫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부활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마음에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으면 그 가득 찬 것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욕으로 가득 찬 사람은 이야기했다 하면 돈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말만 했다 하면 남의 흉이나 보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기쁨과 소망이 가득 찬 사람은 기쁨을 노래하게 되고, 소망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말을 했다 하면 예수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말을 했다 하면 칭찬과 격려와 축복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그 사람의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밝은 자화상으로 조각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소망과 기쁨과 고마움과 감사로 가득 차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말이 나왔다하면 은혜와 사랑과 소망과 기쁨과 고마움과 감사가 나오고, 축보의 말이 나오는 그런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선포합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시고 무관심과 냉대가운데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고향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배반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동족들과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영문밖에 팽개쳐져서 흉악범들이 달리는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인간으로서는 참기 힘든 수모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셨으나 마치 건축자들이 집을 짓다가 필요 없다고 내어버린 돌처럼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을 기초석이 되게 하셨습니다(고전3:11).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명수의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전10:4). 예수님을 부딪치는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벧전2:8). 예수님을 심판의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단2:34).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마21:42). 이스라엘에서는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머릿돌입니다. 이 머릿돌을 기초로 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갑습니다. 그러므로 모퉁이 머릿돌이 삐딱하면 집 전체가 삐딱하게 되고, 머릿돌이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집이 붕괴됩니다. 그러므로 모퉁이 머릿돌은 기준석이요 방향을 잡아주는 돌입니다.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corner's Stone, 집을 견고하게 세우고 방향을 잡아주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를 세우고 구원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기초가 되시고 방향이 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22~24절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인용하신 말씀입니다(막12:10). 시편 118편 24절에서 이 날은 어떤 날입니까? 부활의 날입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날입니다. 죽었다가 일어나신, 부활하시어 우리의 부활이 된 날, 우리의 구원이 되신 날, 이 위대한 부활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성령께서 오셨고,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의 현장에 사도들은 이 말씀을 정확하게 또 한번 인용하고 있습니다. 모퉁이 머릿돌 되신 예수님, 교회의 기초가 되기 위해, 우리 인생의 기초가 되시기 위해 부활하신 그 분! 새로운 생명을 주고 사람들을 용서하고 인생을 다시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 부활하시고 찾아오신 놀라우신 예수 그리스도!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놀라우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이 날, 감격과 영광의 그날에 기쁘고 즐거워서 할렐루야 찬양을 부릅니다. 아멘.

12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모퉁이의 머릿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입니다.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했네! 해방 되었네, 해방 되었네, 죄와 사망에서 해방 되었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냉대하고 조소하고 짓밟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거절한 그리스도는 당신들의 생명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구원이십니다. 당신들이 핍박하는 그리스도만이 당신들의 소망이십니다. 당신이 저주하는 그리스도가 바로 당신의 생명이십니다. 그 분은 유일한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절대적이고 유일합니다. 절대성과 유일성, 여기에 힘이 있습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요즘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사회 곳곳에 파고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가 절대라는 단어입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절대성, 구원의 절대성 하면 반발합니다. 복음이 상대화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힘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상대적인 데에는 힘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절대성, 유일성, 여기에 power가 있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생각, 저것보다는 복음이 좀 낫다는 상대적인 생각, 이 종교도 좋고, 저 종교도 좋다는 그런 곳에 파워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기에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복음입니다. 구원입니다. 진리입니다. 생명입니다. 여기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자 만이 구원이 있습니다. 로마서 10:12,13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부요하게 되고 구원을 얻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찬송과 기도를 뜻합니다. 주님은 기도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유일한 대상이요 절대적인 대상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응답이 있습니다. 주님께 찬양할 때 영광이 나타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한량없는 복이 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만 영생이 있고, 행복이 있고, 영화롭게 됩니다.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명예와 권세가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 명성이 있는 분이 자살을 하였고, 한국의 최고의 재벌의 딸이 자살했습니다. 그녀는 2,000억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살했습니다. 행복은 돈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유일하시고 절대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데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주여, 영광을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시고, 존귀를 받으시옵소서!” 여기에 신령한 복이 임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절대적인 구원의 길이라고 하면 그런 독선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발합니다. 많은 철학과 종교가 동일한 목표와 목적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가? 왜 당신만이 그런 말을 하는가? 기독교를 독선적인 종교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절대성과 유일성은 독선이 아니라 은혜와 은총입니다. 지금 여객선이 파선되었습니다. 선장은 외칩니다. 구명복을 입고 구조선을 기다라! 이것만이 살길이다! 자, 선장의 말이 독선입니까? 이것은 놀라운 구원의 은혜입니다. 자, 지금 죄로 죽어갑니다. 마귀가 공격합니다. 정욕과 쾌락과 불신과 미움의 세력이 공격합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 구원의 유일한 길이 있다면 이게 독선입니까? 그 구원의 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면 그게 독선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달리 구원을 받을 수 없던, 달리 용서를 받을 수 없던, 달리 새로워질 수 없는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독선입니까? 아니면 사랑이요 은총입니까? 놀라운 사랑이요 은총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의 길입니다. 악의 길은 굽은 길이요(잠1:15,16, 10:9), 허무한 길이요(욥6:18), 어둠의 길이요, 죄의 길입니다(욥24:13, 호2:6). 이 길은 황폐케 되는 길이요 사망의 길입니다.(사59:7,잠14:12) 그러나 의의 길은 진리의 길이요 거룩한 길이요(사35:8), 평탄한 길입니다(시23:3, 25:10, 27:11). 부요한 길이요 정직한 길입니다(시65:11 잠2:13). 생명의 길이요 평강의 길입니다(잠2:19, 3:17).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 길은 빈손으로 가지만, 이 길은 천국의 보화를 한 아름 안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놓고 예수님의 길, 구원의 길을 가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1:7,8).”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됩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A new way and living way)입니다(히10:20). 예수님유일한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진리이십니다.

제자들은 핍박하는 그들을 향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그대들이여 나를 핍박하시오. 나는 더욱 더 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대들이여 나를 이 감옥 속에서 짓밟으십시오, 내 목소리는 더욱 더 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길입니다. 빛입니다. 구원입니다. 여러분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첨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복음으로 가득 차서 어떤 고난 중에도 복음의 이야기, 예수님의 이야기, 부활의 승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복음의 사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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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중서신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감성,2016)

                      행복과 긍정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성심리
                        (시그마 프레스,2015)

                          마가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킹덤북스,2014)

                            사도행전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3)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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