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제19강 광야교회

조회 수 2414 추천 수 0 2012.07.12 07:18:10
사도행전 제 19 강(말씀, 7:37-50, 요절 7:49,50)

광야 교회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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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교회들의 이름이 여럿 나옵니다.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 로마교회,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빌립보교회, 골로새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등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은 대개 그 교회가 있는 지역의 이름을 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거의 유일하게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이름을 가진 교회가 하나 등장합니다. 그 교회가 본문에 나오는 광야교회입니다. 광야교회는 본문에 딱 한번 나옵니다. 광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광야 안에 있는 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칭합니다. 그리고 광야교회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 입성 직전까지의 40년간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무서운 곳입니다. 광야는 무서운 짐승들이 들끓는 곳입니다. 광야는 전갈과 뱀들만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한번 나갔다가는 잘못하면 돌아올 수 없는 곳입니다. 광야는 황무한 사막지역, 바위투성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히 물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광야에 풀이 있기는 하지만 빈약한 모습의 풀이 조금씩 나 있을 뿐입니다. 광야는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광야가 고통스러운 곳이라 할지라도 애굽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당한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고역으로 인한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보셨습니다(출2:23,24a,3:9).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구원자로 세워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고통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모세를 수없이 배척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와 광야교회를 열거하면서 광야교회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고도 모자라서 그의 제자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와 같이 그들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거슬렀고, 말씀을 거슬렀고, 계시의 역사를 거슬렀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슬렀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였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우리는 현재 광야교회에 있습니다. 광야교회는 그리스도인의 훈련의 현장입니다. 광야교회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광야교회에서 그들의 죄를 보면서 우리의 모습 속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37-39).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시고자 약속하신 그 선지자입니다(37). 모세는 광야교회에서 생명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38). 그런데 그들은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3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그들은 모세에게 복종치 않고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애굽이 어떤 곳입니까? 애굽은 그들이 노예 생활했던 곳입니다. 자유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마음은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성경에서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가나안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고, 광야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고전10:1). ‘세례’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례는 율법으로 죽고 은혜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과거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단강은 광야와 가나안의 중간으로 하늘나라로 가는 또 하나의 과정을 뜻합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옮겨지는 것’은 일차적인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요, 과거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요단을 건넌다’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다는 말이고, ‘구원을 얻으리라’는 요단을 건너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구원을 위하여 힘쓰라’는 현시점에서 시험에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날마다 당하는 시험에서 우리를 구원해달라는 현재적인 기도입니다. 이와 같이 홍해를 건넌 것이 과거의 구원이이요, 광야교회에서 모든 여정은 현재의 구원이요, 요단을 건넌다는 것은 미래의 구원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넌 이상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분명히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몸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정작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있습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저기에 있습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뽕밭에 있습니다. 그들은 몸의 구원을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노예근성과 거지근성으로 젖어 있습니다. 사람이 습관화되고 행동화되게 되면 그게 인격이 됩니다. 인격이란 쉽게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한 나라의 문화는 쉽게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심리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한 문화가 바꾸어지기까지는 4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36년간 일제가 우리민족에게 심어준 신민지사관이 쉽게 바꾸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려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광야교회에 있지만 마음은 애굽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already, but not yet. 바로 이것이 광야 교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것은 극적입니다. 모세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넌 그때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믿음으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이제 그들은 모세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모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론을 통해 말씀하지 않고, 오직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틈만 있으면 모세에게 대적하고 말씀에 순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꼭 모세만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되지 꼭 모세의 말만 들어야 하는가? 그들은 상대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상대적인 생각을 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41절을 보겠습니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사건은 출애굽기 32장 1-6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 여호수아를 데리고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40일간 시내 산 수양회를 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40일간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반면에 백성들에게 있어서 40일간은 너무나 길고 지루했습니다. 모세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총회를 열었습니다. 비상총회 의결사항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신’은 gods로 잡신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 마네킹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송아지 마네킹을 붙들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32:4b).” 이튿날 그들은 거기에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백성들이 각종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흉내를 냈습니다. 여기에서 ‘뛰놀았다’란 옷을 벗고 난잡한 성적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먹고 마시며 음란하고 죄악 된 행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배척하고 말씀에 불순종한 그들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 42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의 별들, 피조물을 섬기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심판 중에 가장 무서운 심판은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것을 섬기는 그들에게 ‘너희들, 잘들 해봐’ 하시면서 내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 gave up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을 70년간 바벨론에 붙여 바벨론으로 옮기셨습니다(43).

이들이 말씀을 믿지 못하였을 때에 불안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불안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직은 괜찮은데 장래는 어떻게 되지?” “결혼할 나이는 되었는데 대상이 보이지 아니하니 어떻게 하지?” 사람들이 불안하게 되면 물질 마네킹, 형제 마네킹, 자매 마네킹을 만들어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마네킹을 섬기면 섬길수록 더욱 더 불안하게 되고 장래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탐식하며 성적인 쾌락에 빠져들어 망하게 됩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 손으로 만든 조직과 제도와 부, 그리고 쾌락을 섬기다가 결국 자기 손으로 만든 것으로 망하게 됩니다.

지금 보세요. 뉴욕의 월1가에 자본주의 상징인 황소 마네킹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황소 마네킹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뉴욕의 월가는 panic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1776년에 윤리학인 도덕감성론을 기술하고 자본주의 원전인 국부론을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91년 후인 1867년에 칼 맑스가 자본론을 기술함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상과 이론은 각기 장단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최고의 가치인 줄로 알고 무조건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담스미가 국부론을 쓰기전에 윤리학인 도덕감성론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윤리가 없는 자본주의는 천민자본주의가 됩니다. 지금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는 것은 바로 경제 윤리의 상실입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이는 칼 맑스가 자본론을 쓴지 122년 만에 공산주의가 해체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지 232년, 공산주의 해체의 수순을 밟은 지 20년 후에 자본주의가 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거듭난 새사람이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로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죽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물질을 의지하고 살온 물질의 노예였다. 이제 옛 생각과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말씀을 의지하며 살겠다. 말씀을 믿고 사는 것만이 사는 진정으로 복된 길이다. 아멘.”

둘째, 원망보다 감사를 해야 합니다(고전10:7-1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40일만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접경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요단강 하나만 건너면 그토록 사모하고 사모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12 두령을 뽑아 가나안을 정탐토록 했습니다. 정탐한 12 두령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은 탐지한 땅을 악평했습니다. 도저히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곧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14:2-4)” 그들은 다른 지도자를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보시고 진노하사 return시키어 그들을 광야로 후퇴시키셨습니다. 이로써 광야훈련 4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들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합당치 않은 백성들이었습니다. 20세 이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훈련을 통해 그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노예근성과 거지근성 등의 애굽적인 것들을 청소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노예의 특징 중 하나는 원망과 불평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아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죄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전염병과 같아서 순식간에 공동체를 전염시킵니다. 그래서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게 되면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우리 모두가 죽고 공동체가 파멸되게 됩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은 습관성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함정입니다. 원망하고 불평 할수록 깊은 함정에 빠집니다. 원망과 불평은 어둠입니다. 원만하고 불평 할수록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원망과 불평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사탄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의 종들을 불평하고 원망하도록 합니다.

반면에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원망하고 불평은 지상의 언어요, 감사와 칭찬은 하늘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천국백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해야 합니다. 감사는 빛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길이 보입니다. 사단은 욥에게 온갖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도록 했습니다. 욥은 소떼와 양떼를 다 잃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주식이 다 깡통이 되고 아파트는 반 토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입술로 범죄치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1).” 이때에 이전보다 더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감사하고, 내일도 감사하는 새사람이 되십시오. 앞날을 기대하며 미리 감사하는 새사람이 되십시오. 감사하며 일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새사람이 되십시오. 징계와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새사람이 되십시오. 어려운 환경 속에도 원망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살전5:18).

셋째, 우리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44-50).

스데반은 또한 성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본래 성전의 기원은 성막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죄인과 만나는 곳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곳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죄인과 함께 거하시는 곳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용서하시는 곳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죄인에게서 예배를 받으시는 곳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에 텐트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든 하나님의 처소였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에는 성전을 지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성막은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나타낸 구원의 계획이요 구원의 길입니다.

성막은 크게 성소(the Holy place)와 지성소(the Most Holy Place)로 나뉩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 안에 십계명의 증거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의 항아리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속죄소가 있는데 이 속죄소는 언약궤의 뚜껑입니다. 속죄소 위에는 천사 모양의 두 그룹을 만들어 날개를 펴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씩 속죄소에 피를 뿌리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속죄소의 피를 보고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룹 사이에서 죄인과 만나시고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법궤가 하나님의 공의라면 속죄소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소에는 진설병이 있고, 등대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향단이 있고, 성막에는 성막 뜰이 있고, 성막 뜰에는 물두멍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자 고정된 성전의 필요성에 의하여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에 거하시지 않으십니다. 스데반은 그 증거로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49,50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스데반의 메시지는 성전을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상당히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중죄에 속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예수님이 성전 되심에 대한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할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세가 중요하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막15:38).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The new and living way)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어느 때든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10:19,20).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 문제를 해결함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죄사함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고 참된 화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입니다(고전6:19).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주로 모셔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음란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증오심과 세상 욕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면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남들이 알지 못하는 광야를 통과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미움의 광야, 분노의 광야, 갈등의 광야, 고통의 광야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교회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있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기도합니다. 광야 통과의 기간이 내 생애에 가장 값진 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광야를 통과하여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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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예배 안내

  • 주일 오전 예배 - 오전 11:00
  • 주일 오후 예배 - 오후 3:30
  • 어린이 예배 - 오전 11:00

대학마을교회 개척교회

우남식 목사님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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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플,2023)

      요한복음에서 만난 예수님
      (퍼플,2022)

        요한계시록에서 만난 복음
        (지식과 감성,2021)

          예레미야에서 만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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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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