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1-14(요절 18:7)

포기치 않는 기도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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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지진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제일 먼저 개미와 쥐가 자기가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미나 쥐의 이동을 면밀하게 관찰하면 지진이 일어날 조짐을 미리 알아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중국 사천성의 지진 때에는 두꺼비가 대 이동을 하였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개미나 쥐, 그리고 두꺼비에게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스스로 감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나 자신의 신앙을 가늠해 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습니다.

문제는 이론적으로 기도의 필요성,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어느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성도들 가운데 100명 중 97명이 매일 성경을 읽지 못하며,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는 사람 가운데 100명 중 5명만이 방금 전에 들은 설교 본문을 기억하며 취침기도와 의례적인 식사기도 외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생활을 멈추게 되면 그때부터 영적으로 살아있지만 죽은 바와 다름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생기가 없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한 골짜기로 인도했습니다. 그 골짜기에는 뼈들이 하나같이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말랐다’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완전히 말라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말랐으니 성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영적으로 말랐으니 능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열적으로 메말랐으니 찬송을 해도 힘이 없습니다. 영적인 판단력이 무너져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했습니다.

영이 살아있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기도해야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기쁨이 생깁니다. 기도해야 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신분이 변하고 삶이 변합니다. 우리나라도 서구 사회와 같이 사회 계층이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태어난 자기의 신분을 바꾸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부도 가난도 대부분 대물림하게 됩니다. 전에는 요행이란 것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요행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주는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 줍니다. 기도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의 악순환을 끊고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자세로 기도하여야 하는가를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우리가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기도의 자세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1-5)

비유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 상황은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 상황입니다. 성도가 기도하지만 낙심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실이 너무 힘들면 낙심합니다. 그럴 때 흔히 나타나는 것이 기도를 쉬게 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낙망’은 영어로 give up,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낙망치 않고. 낙심치 않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여 주신다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한 도시에 사는 사람을 예로 듭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도시사회란 인심이 각박하고, 인간미가 없고, 개인주의가 넘치고 살아가기가 힘든 곳입니다. 그곳에는 악이 감추어지기 때문에 도둑들과 강도들이 활개치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가로채 자신의 노력 이상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입니다. 아니다 다를까 거기에 큰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재판관은 단순히 재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재판을 하기 때문에 대단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거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도 필요 없고, 사람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인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의롭게 재판을 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재판관과 대조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한 과부였습니다. 과부는 예나 지금이나 불쌍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약한 강자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미국에서 흑인을 가장 괴롭히는 것이 흑인이라고 합니다. 본문에는 이 과부를 괴롭힌 사람의 정체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과부에게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부는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습니다. 과부가 하소연할 수 있는 곳은 법과 공권력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인류 역사상 법이 완전하게 공평하게 행사된 시대는 없습니다. 약자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말이 회자되었습니다.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돈이 없습니다. 빽도 없습니다. 변호사를 살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에게 유일한 무기가 있는 데 그것은 관원에게 끈질기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재판관이 출근하는 관가 입구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요즘으로 말하면 피켓 들고 일인시위를 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피켓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3)!” 본문을 보면 ‘자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습관적으로, 계속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재판관이 좋은 재판관이라면 마땅히 들어주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나오는 재판관은 불의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과부의 한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불의한 재판관에게도 한 가지 변수가 생겼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과부는 끝까지, 끝장을 볼 때까지, 영원히, 목적을 이룰 때까지 부르짖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이를 보고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 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제 명에 죽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결국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했습니다. 과부의 포기치 않는 그 끈질긴 호소가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둘째, 비유의 뜻을 설명하시는 예수님(6-8)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6,7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도 낙망치 않고 호소했을 때 들어 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하물며’라는 말은 앞에 말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부사입니다. 세상에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너희 아버지가 되시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너희의 한 맺혀 하는 기도 들어주지 아니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에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우리의 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귀찮아 할 수 없이 들어주지만 하나님은 즐거이 속히 들어주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까이 나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호소해도 들어 준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100% 들어주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정한 시간에만 나아가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두려운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든지 영접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이 무엇인지 잘 아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첫째, 원한에 맺힌 기도를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원한’이란 단어가 4번 나옵니다. 원한이란 마음의 절실한 소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실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절실한 소원이 있어야 또한 절실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실한 기도를 기뻐하시고 들어 주십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 한 소경이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 때 그는 “보기를 원합니다!” 외쳤습니다. 그는 눈을 뜨고자 하는 분명하고도 절실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절실한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소원대로 보게 하셨습니다(눅18:35-43). 사무엘상 1장에 한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녀는 무자한 것 때문에, 한 남편의 다른 부인으로부터 한 맺힘을 당합니다. 그녀는 이 한을 주님께 들고 나아가 그야말로 한 맺힌 기도를 합니다. 오래 기도하고, 통곡하면서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이름의 사무엘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절실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절실한 원한이 무엇입니까? 풀지 아니하면 가슴에 응어리가 메칠 수밖에 없는 여러분의 원한이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는 것?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시집 잘 가고 장가 잘 가는 것?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 예, 이런 것도 한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고,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는 원수 마귀에 대한 원한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사탄의 궤계를 물리치고,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에게 또 한 가지 한이 맺힌 기도가 있다면 바로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두 가지 유언적인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입니다. 주님의 소원인 거룩한 계명과 위대한 사명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 한 맺힌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명은 놀랍게 발전하지만 인간의 내면은 점점 더 부패해 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장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임하도록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소원이 얼마나 절실하고 간절한 지 예수님은 어린 12제자들의 어깨 위에 맡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명을 위해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모든 부와 지위를 포기하고 이에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는 단 하나의 열망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분, 오직 예수님뿐이다.” SVM 운동은 “이 시대에 세계 복음화를”의 슬로건을 가지고 절박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20,500명이나 선교사를 파송케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캠퍼스가 주의 나라가 임하도록, 캠퍼스가 복음의 동산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과 민족과 열방에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한 맺힌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둘째, 낙망치 않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무슨 일을 하다가 안 되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학문하는 데도 많은 인내와 내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기업의 총수만 되더라도 피나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영적인 세계에서는 더 큰 인내와 투쟁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고자 기도했지만 길이 막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치 않고 기도했습니다. 이때에 로마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롬15:22,1:9). 낙망치 않는 것은 말 그대로 밤낮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3절의 보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낙망치 않는 기도는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외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밤낮이 있을 수 없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여기서 택하신 자란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이렇게 불굴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1장 5-8절을 보면 밤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도 같은 내용입니다. 한 친구가 여행 중에 먹을 것이 떨어져 한 밤 중에 친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사정을 했습니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렀습니다.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그가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렀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들어줄 수 없다는 소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계속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절박한 심정으로 계속 두드렸습니다. 그는 도저히 벨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로 인해 잠을 잘 수 없어 문을 열고 떡 덩어리를 내 주었습니다. 그는 떡을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떡을 주는 것은 벗됨(우정)을 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강청함 때문에 일어나 그 소용대로 준다고 했습니다(8b). ‘강청’이란 말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간곡하게, 물러설 줄을 모르는 태도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11:9,10).”

우리 민족은 한이 가슴에 응어리가 져 있습니다. 제2의 애국가로 불리어지는 아리랑을 보세요. 한이 담긴 노래입니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되고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 맺힌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60년대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하여 대학 졸업자들을 독일의 광부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꽃다운 어린 간호사들을 이역만리 땅인 독일로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서독으로 가서 지하 1,000미터가 넘는 막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했습니다. 어린 간호사들은 낮선 남의 땅에서 처음 시작한 일이 알코올 솜으로 시신을 닦는 일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에서 돈을 빌리러 갔습니다. 그때 독일을 방문한 박대통령은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젊은 청년들과 꽃다운 우리의 딸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연설을 하다가 도중에 너무나 슬퍼서 눈물을 흘리다가 연설이 중단되곤 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에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아픔은 곧 자신의 아픔이 되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돌아오면서도 차 속에서 계속 눈물을 흘리자 당시 70세였던 독일의 뤼브케 대통령이 손수건을 내밀며 “울지 마시오. 돌아가서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시오.”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때 박대통령은 입술을 깨물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다짐하며 돌아와 시작한 운동이 곧 새마을 운동입니다.

여러분의 한 맺힌 기도 제목이 있다면 절박하게 기도하십시오. 포기치 말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80년대 러시아 개척을 위해 한 맺힌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는 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12 가정을 위해 한 맺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로 이요셉 선교사 가정이 미국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영주권 문제가 생겨 이요셉 선교사 가정은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오기에는 너문 늦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와 사무엘이 한국말을 못하고 한국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요셉 선교사 가정은 미국을 통해 제 3세계, 다시 한 번 에디오피아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과 이 소원과 이 열망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를 놓고 5년간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낙망치 않고 절망치 않고 포기치 않고 기도했을 때에 드디어 문이 열렸습니다. 보스턴 총영사관 행정직 공무원으로 특차로 선발되어 영주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1995년부터 기도했던 보스턴, 하버드 개척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는 것입니다. 2005년에 김영주 자매님의 파송이 세례요한과 같이 길을 열었다면 이제 이요셉 선교사 가정과 한 바울 형제가 보스턴 칼리지 입학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방점을 찍어주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몇 번의 감동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동구권의 개척 교두보인 헝가리 개척할 때의 감격, 그리고 극적으로 러시아 개척의 감격, 그리고 교회 건축과 87,89,90 학번, 그리고 1999학번과 2000학번들의 제자양성입니다. 그런데 이번 이요셉 선교사의 보스턴 총영사관 합격을 통한 비자 문제 해결과 동시에 보스턴 개척은 이전과 또 다른 의미가 있고 저를 감동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개혁의 과정을 통한 많은 아픔과 상처를 다 녹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God is good. 이제 우리는 2010년에 북한 김일성대학 본관 광장에서 부활의 춤을 추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이를 이루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캠퍼스 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믿음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내리시고 나서 어떻게 보면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은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것이 본문에서 나오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원문에 보면 “말세에 이 땅에서 ‘그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믿음’이란 다름 아닌 기도하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중단 없이 불굴의 기도를 하는 믿음이 점차 사라져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서구 교회에, 그리고 오늘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믿음’이 있습니까? 불굴의 기도의 믿음 말입니다. 기도가 나를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직장을 변화시키고, 직장을 변화시키고, 민족을 변화시킨다는 믿음, 기도만이 살길이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내 인생이 새롭게 된다는 믿음 말입니다.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낙망치 않는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속히 들어 주십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도록 기도합시다. 북한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고 북한 동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믿음의 기도는 태산을 옮겨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기도를 할 때 불가능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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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말씀사,2012)

                                창세기에서 만난 복음
                                (생명의말씀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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