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강 (사도행전 6:8-15, 요절 6:15)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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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히 무대 위에 등장했다가 홀연히 무대 위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집사 스데반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성경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6장 1-6절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있고 칭찬 듣는 집사 중 한 사람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집사지만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첫 순교자가 되어 무대 위에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아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하여지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헬라계 유대인입니다. 스데반은 스테파노스에서 온 말로 왕관, 면류관, crown을 의미합니다. 그의 부모가 그가 앞으로 왕관을 쓰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스테파노스’라고 지어주었던 같습니다. 그의 부모의 소원대로 그는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 면류관은 첫 순교자가 되는 영광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스데반, 그의 이름은 실로 승리자의 이름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일컬어 외모지상주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뻐보이기 위해 코를 세우고 쌍거풀 수술을 하고 턱을 깎고 비만도 아닌데 살을 뺍니다. 그리고 40대 이하의 사람들이 70%가 외모가 출세의 절대적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하루에 화장을 하는데 1시간 20분 소요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테틱이 21세기 유망업종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모는 우리의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체, 우리의 본질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닌 마음에 있고 속사람에 있고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속사람, 중심이 새롭게 되면 나의 겉모습도 달라집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어떻게 천사의 얼굴과 같았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스데반의 아름다운 모습을 배워서 우리의 모습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은혜의 반대말은 율법입니다. 율법의 세계는 완전한 행위를 요구합니다. 그러니 율법의 세계는 늘 부족합니다. 기쁨이 없고 늘 우거지상을 쓰게 됩니다.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면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자학하고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율법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라버립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얼굴이 검고 긴장되어 있습니다. 남의 눈치를 잘 봅니다. 입은 늘 나와 있습니다. 항상 남의 잘못을 끄집어 내는데 힘을 기울입니다.

스데반은 율법의 세계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혜의 세계에 살았습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영어로 grace, 현대어로 sweetness, 사랑스러움이란 뜻입니다. 은혜는 부드럽고 사랑스럽습니다. 말도 온유합니다. 겸손합니다. 이해와 사랑, 그리고 용서가 있습니다. 긍휼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영생과 의와 사랑과 평강이 있습니다. 남을 격려하고 다른 사람의 약점과 부족한 점을 돕고자 합니다. 얼굴은 천사의 표정과 같습니다.

스데반은 율법을 지키고 준수하는 것을 자랑하기보다 은혜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은혜에 감동받고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일꾼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쓰임 받으려면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나의 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은혜를 체험합니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원망이나 불평을 쏟아내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늘 감사와 찬양과 기쁨과 소망으로 넘칩니다. 얼굴이 팽팽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은혜로운 분입니다. 그 원천은 은혜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음으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시어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그 은혜가 너무나 놀라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3-15).”

스데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은 바로 은혜에서 나왔습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광채가 납니다. 해맑습니다. 은혜로운 사람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얼굴이 해같이 빛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전파하는, 또 은혜가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스데반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여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이 있었습니다. 권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입니다. 뒤나미스는 power입니다. 권능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펄펄 끓어오르는 힘이 있습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불굴의 용기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능을 받지 않으면 악령의 영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안 초조합니다. 심약합니다.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악몽을 꾸다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권능이 있고 권능이 있으니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빛나고 권능이 임하게 하는 방법 단 한 가지,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러면 능력이 임합니다. 그런 사람은 광채가 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능력이 임하고 광채가 납니다. 반면에 밤새 인터넷을 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광채가 나지 않습니다. 눈은 충혈 되어 있고 얼굴은 푸석푸석하여 마치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과 같이 됩니다.

사도행전 6장 4절에서 사도들이 결심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기도와 말씀입니다. 이게 권능 받는 원천입니다. 이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강단에서 말씀이 선포되고, 강단 아래에서는 성도들의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는 교회.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불이 활활 타오르는 교회. 성령의 불이 타오르지 않으면 지옥불이 타오르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지 않으니 지옥불이 타오릅니다. 그러니까 요즘 우리 교회 주위가 아주 음란합니다. 도로를 청소하다보면 예전에 없던 지전분한 것들이 발견됩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의 불이 붇고 말씀의 불이 붙어 성령의 불이 타올라 캠퍼스 주위의 지옥불이 소멸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기도와 말씀의 불이 붙어 우리 얼굴에서 광채가 나도록 합시다.

셋째,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9-13).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9절을 보겠습니다.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여기에 리버디노란 말과 길리기아란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리버디노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본래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B.C. 53년 폼페이가 시리아전쟁을 하면서 유대 땅을 토벌할 때 로마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 후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후 19년에 로마에서 추방당하자 그중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그 회당이 해방된 자의 회당(Synagogue of Libertine)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본토 유대인들로부터 늘 멸시 천대를 받는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구레뇨,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지역들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각 지방 별로 회당을 만들어 각기 예배와 교육을 했습니다. 로마에서 온 사람들은 로마사람들끼리, 헬라에서 온 사람들은 헬라사람끼리, 길리기아에서 온 사람들은 길리기아 사람들끼리 모였습니다. 이는 언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각기 각처로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잘 못했습니다. 대신에 세계 언어인 헬라어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기 회당을 지어 예배도 보고 교육도 했던 것입니다. 길리기아는 사도 바울의 고향입니다. 사도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태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헬라계 회당인 길리기아 회당의 회원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스데반이 그들과 변론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데반을 능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지혜란 지식과 대별됩니다. 지식은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헬라어로 소피아입니다. 지혜는 이론이 아닌 아는 지식을 적용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힘입니다. 지식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쓸 수 있는 힘입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몸과 시간, 그리고 물질과 재능을 씁니다. 미련한 자일수록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족과 허물과 약함을 압니다. 연구하면 할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잠언 12장 15절을 보겠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그리고 잠언 18장 2절을 보면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입니다. 세상 지혜는 야고보서 3장 15-1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세상의 지혜는 세상적입니다. 정욕적이며, 마귀적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요란합니다. 악한 일을 도모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머리를 굴려서 요령껏 사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를 떠나서 하늘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늘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하늘의 지혜는 성결합니다. 하늘의 지혜는 화평합니다. 하늘의 지혜는 관용이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양순합니다. 하늘의 지혜는 긍휼함이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선한 열매가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편벽함이 없습니다. 하늘의 지혜는 거짓이 없습니다.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지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가지고 살되 세상 지혜인 지옥의 지혜가 아닌 하늘의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열매와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멘.

스데반과의 변론을 당하지 못하자 그들은 스데반을 시기하고 모함을 했습니다. 11-14절을 보면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자, 그들은 성전과 율법 문제를 가지고 모함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이 문제를 들고 일어난 것은 신성모독은 합법적으로 죽여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과 장로 그리고 서기관들을 충동질하여 스데반을 끌어다가 산헤드린 공회 재판정에 세웠습니다.

백성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분개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분개한 것은 깊은 신앙양심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사는 남자들은 일 년에 의무적으로 세 번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참배하고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예루살렘 성전 순례는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따라서 매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 그곳에 머물면서,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지출하는 경비는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헐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백성들의 수입원이 없어지니 들고 일어날 법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유익 때문에 무지한 백성을 선도하고 또 무지한 백성들은 그들의 선도에 선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민감한 것은 돈 문제입니다.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돈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지 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와 성령의 사람이 되어 담대하게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와 성령의 사람들은 언제나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넷째, 스데반의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공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놀라운 일이 법정 안에 일어났습니다. 분노를 떨어야 하고, 창백해져야 하고, 겁에 질린 얼굴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스데반은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자기가 억울하다고 법정 소란을 피우고 오리발을 내밀며 악을 씁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변화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모함을 당하고 거짓 증인들이 득세를 하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상상할 수 없는 천사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잠언 15장13절을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얼굴이 변화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눈은 마음의 창이고 얼굴은 속사람의 표정입니다. 얼굴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속사람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얼굴이 빛이 났다는 것은 우리 속사람이 빛이 났다는 말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제이니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비춘 그 교수님은 매일 천국에 갔다 오는 줄 알 정도로 늘 행복한 얼굴빛을 한 매우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날마다 행복해 보이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하나의 깃발이라고 생각한다. 성에 깃발이 나부낄 때는 왕이 성에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쁨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시이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속인다 할지라도 표정만은 못 속입니다. 우리가 표정을 속이려고 해도 표정 속에 있는 칼라와 영감을 속일 수 없습니다. 표정 속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링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40살 이상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찡그린 얼굴을 하는 사람은 그 속에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얼굴의 주름짐을 통해 그 삶을 알 수 있습니다. 환한 얼굴 속에서 그 속에 즐거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뻣뻣한 얼굴 속에서 그 사람의 긴장과 교만이 볼 수 있습니다. 울그락 불르락하는 얼굴에서 그 안의 분노와 어려운 원망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얼굴이 하루에도 수십 번 변화됩니다. 우리 마음의 상태가 변화되듯이 얼굴도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얼굴관리를 한다는 것은 우리 속사람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얼굴에는 항상 평온함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온함과 기쁨은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온함과 기쁨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넘치는 천상의 평온함과 기쁨이 있다는 표징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얼굴이 어둡고 짜증스럽고 피곤해보이고 늘 우거지상을 쓰고 다니면 누가 주님을 믿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깃발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고 평온함과 기쁨을 소유한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얼굴 표정이 주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소서. 우리의 얼굴 표정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복된 삶을 살게 하소서.

그러면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왜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했을까요? 천사의 얼굴이 모델이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 사람들 보기에 천사의 얼굴과 같아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주석함으로써 스데반의 평온함과 담대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스데반의 장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얼굴이 되게 하소서! 평온함과 담대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내적 자질과 외적 능력을 갖춘 일군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합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합니다. 그는 성령, 지혜, 믿음, 은혜, 권능, 5가지가 충만한 신앙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면서 헬라파 유대인 앞에서도 당당하게 변론할 수 있는 지성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내적 자실과 외적인 능력을 갖춘 주님의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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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마을교회

                                    Tiananmen Square protests, China Democracy, 天安門 天安门 法輪功 李洪志 Free Tibet 劉曉波, 热比娅·卡德尔, 熱比婭·卡德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