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제3강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조회 수 3898 추천 수 0 2012.07.14 06:33:07
야고보서 제 3 강 (2:1-13)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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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호감이 가는 사람들과는 더욱 좋은 관계를 갖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호감과 비 호감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들의 외모나 외적인 조건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대개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차별대우를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베이글녀, 차도남, 까도남, 얼짱, 몸짱 등의 신조어가 이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주님은 중심, 내면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따녀’ 마음이 따뜻한 여자, ‘봉조녀’ 봉사활동을 좋아하는 여자, ‘맘짱’, 마음이 짱인 사람이란 신조어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좋아합니까? 베이글녀, 차도남, 까도남, 얼짱, 몸짱, 아니면 마따녀, 봉조녀, 맘짱? 본문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차별대우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말고 중심, 내면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 성숙한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7)

1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의 곳곳에서 ‘내 형제들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부르고 있습니다(1:2,16,19, 2:1,5,14, 3:1,12, 4:11, 5:7,9,10,12,19). 이를 볼 때 야고보서의 수신자인 우리는 영광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오는 모두는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슨 덕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영광의 주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인간들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왕을 만나는 자리에서 개인이 갖고 있는 지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교회에서 형제들을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형제들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차별대우했습니다. ‘차별’은 영어로 favoritism, 편파적, 편애, 정실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역 성경을 보면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빈부귀천에 따라 차별대우하고 편애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이 가난했고 노예나 과부나 고아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유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요란을 떨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에 가난한 사람보다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호감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차별대우한지 아십니까? 2-4절을 보겠습니다.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낀 사람이 오면 허리를 굽히며 ‘오서 오세요’ 하며 제일 좋은 상석에 앉혔습니다. 반면에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저기 뒤쪽에 가서 서 있어요’ 하거나, 아니면 내 발등상에 앉으라며 푸대접했습니다. ‘발등상’은 의자의 발걸이를 말합니다. 당시 손에 금가락지를 끼었다는 것은 단지 부의 상징만이 아니라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람을 차별대우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렇게 사람들을 차별대우했으니 일반 사회에서는 어떠했겠습니까? 돈이 많이 있는 사람, 옷을 잘 입고 다니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대우받고,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신분 상승을 위해 물불가리지 않았으며, 할 수만 있으면 비싼 옷을 사 입고, 할 수만 있으면 큰 마차를 타고, 할 수만 있으면 넓은 집에서 살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혈연, 지연, 학연 등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TK, PK, 고소영, 영포라인 등의 용어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지역감정으로 차별대우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도 지역감정이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심하지 않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지역 편중의 인사를 하여 항상 도마에 오릅니다.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대형 고급 승용차가 거리를 누비고 다닙니다. 이는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면 사람들이 아저씨, 아주머니라 부르고, 큰 차를 타고 다니면 사장님, 사모님이라 부르기 때문에 사자 소리를 듣고 싶어 큰 차를 타고 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강남의 모 교회에서는 그레인저 아니면 교회 주차장에 주차시킬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독일이나 네델란드를 가보면 거의가 작은 차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들을 취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넓은 아파트에서 삽니다. 외모를 보고 취하기 때문에 허영에 들뜬 여인들이 몇 천 만 원짜리 루이뷔똥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진품이 비싸서 갖고 다닐 수 없으면 짝퉁이라도 들고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짝퉁의 천국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교회의 직분도 마찬 가지입니다. 혹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계급으로 알고 있습니다. 침례교회는 장로 제도가 없습니다. 대신 안주 집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침례교회에도 안수 집사를 장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안수 집사라고 하면 장로 교단에서 아직도 장로가 되지 못하고 집사냐고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섬김의 직임이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목사만 성직자이고, 일반 성도는 평범한 평직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성직자입니다. 목사나 성도나 모두가 성직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는 full time minister, 전임 사역자이고, 장로나 권사나 집사, 그리고 성도는 self-support minister일 뿐입니다. 따라서 주어진 직분을 귀히 여기며 서로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외모를 보고 취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을 때 돈 많은 사장이나 사장 부인이 교회에 등록하면 월척을 낚았다고 좋아하는 현상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사장이나 사장 부인이 월척이면 일반 사원이나 사원 부인은 피라미입니까? 성경은 차별대우를 하지 말도록 곳곳에서 말씀하십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 34-36).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9).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3:25).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그런데도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고 차별합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는 순간 기름을 붓고자 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세우고자 한 것은 키도 크고 용모도 빼어났고 흠 잡을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그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하나님은 엘리압을 취하지 않고 들에서 양을 치던 이새의 말째인 다윗을 취하여 기름을 부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1-4절을 보면 부자와 과부가 각기 연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부자들은 지갑에서 잉크 냄새가 나는 수표 한 장을 사람들에게 보라는 듯이 꺼내어 기침을 하며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반면에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과부는 동전 두 렙돈을 조심조심 넣었지만 넣는 순간 땡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21:3).” 예수님은 행위보다 중심, 동기를 보시고 양보다 질을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평가할 때 현재의 모습을 보고 평가하지 않고 가능성을 보고 취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보실 때 그는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모래알처럼 의지가 약했습니다. 그는 큰 소리를 잘 치는 big mouth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반석다운 면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는 순간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습니다(요1:42).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던 그 때까지도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할 만큼 반석다운 내면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반석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조차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그것도 부도덕한 여인에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점심식사도 잊은 채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하여 사마리아 동네로 달려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죄인, 창기와 더불어 3대 죄인 중의 하나인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취하였습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산상수훈을 기록한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외모를 보고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십니다. 이는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도록 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서 53잘 2절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외모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과 존귀함과 신성이 충만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빈부귀천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동등한 인격체이며,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풍조와 인심을 따라 힘 있고 부요한 사람을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보이는 것보다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외모로 판단하고 이해타산 관계로 대하지 말고 공의로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6,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가난한 자를 무시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억압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법정에 고발하여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비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부자인 것 같지만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부자는 누구입니까?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을 보면 진정한 부자는 가난한 자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불쌍한 자를 동정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부를 자랑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자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1장 10,11절을 보겠습니다.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같이 쇠잔하리라.”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물질의 축복만이 진정한 축복인 줄 알고 물질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축복도 축복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는 진정한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을 얻기 위하여 신앙생활하지 마십시오. 이런 신앙생활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면 부자는 구원 못 받고 가난한 자들만 구원을 받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두루 섭렵한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대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1세기의 위대한 스승이요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을 보면 흑인도 있고 또 헤롯의 젖동생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부자를 귀히 여기거나, 그렇다고 부자를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부와 가난함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믿음에 부요한가에 있습니다. 믿음에 부요한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합니다. 믿음에 부한 이는 물질이 많으면 가난한 이를 돕고, 높은 관직에 있으면 낮은 이를 섬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인색하고, 이웃에 대해 풍성합니다. 물질을 싸두는 것이 아니라 주와 복음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의 신분보다 한 단계 낮춰서 사는 삶입니다.

둘째, 긍휼은 심판을 이기느니라(8-13)

8,9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우리가 계명을 잘 지켜도 사람을 차별 대우하면 범법죄자가 됩니다. 10,11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십계명 중 한 계명이라도 어기면 율법을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차별하지 말고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보통 감정, 황홀, 떨리는 감격 등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사랑은 그런 감정만이 아닌 의지의 순종을 말합니다. 원수를 감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감정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배고픈 북한 동포들에게 쌀을 주지 못합니다. 이는 감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단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고,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나눌 때 하나가 되며 이로써 세상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사람은 세상의 기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율법, 즉 복음에 기초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13절을 보겠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는 모든 이를 긍휼로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대하실 때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을 모르는 이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람을 외모로 차별대우하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긍휼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긍휼은 애간장이 끊는 아픔을 뜻합니다.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그들의 고독이 내 고독이 되고, 그들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는 일체감이 되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입니다(딛3:4,5).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빈부귀천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서는 안 됩니다. 돈 있고, 권력이 있고, 멋있는 사람, 그리고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 동일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를 뛰어넘어 동일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긍휼함을 받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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