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사순절 6(요한복음 17:1-25)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화를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도중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이 기도를 일컬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짧고 단순하지만 예수님의 소원과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루터는 이 기도는 한량없는 따뜻함과 온전한 마음을 기울인 기도이다. 너무나 정직하고 순전하고 깊고 부유하고 넓어서 아무라도 그 밑을 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 멜랑톤은 이 기도만큼 차원이 높고 거룩하며 고상한 기도는 없다.”고 했습니다. 고난 주간을 앞둔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배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17:1-3)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입니다. 이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깊은 인격과 사랑으로 연합된 관계입니다.

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를 말합니다. 이 때는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예수님의 생애에 가장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형편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절박한 상황에서는 자기 연민과 자기감정에 빠져 기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멸시와 천대와 죽음을 앞두고도 하나님의 영화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고, 이를 위해 사셨고, 이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1:2). 인간의 근본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1:20)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성가를 작곡한 죠셉 하이든은 심혈을 기울여 유명한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몸이 아파서 그 곡을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지휘하게 하고 자신은 2층 발코니에 앉아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에 청중들은 일어나서 지휘자에게 환호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지휘자는 이 모든 영광을 2층의 하이든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박수를 중단시키고 이 모든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돌리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은 이 아름다운 곡을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는가를 물었을 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작곡을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감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곡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 앞에 드립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2)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한 많은 세상에서 못다 한 삶을 저 세상에 가서라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생이란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그 영생의 길을 가고자 하는데서 근심과 걱정과 불안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영생을 부와 권세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와 권세는 미혹을 받아 근심에 싸인 삶을 살게 하며, 심지어는 자기 목숨을 잃게 한다고 했습니다(1:19).

마태복음에 부자요 관원인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최연소의 나이로 고시에 합격하여 사회적인 지위와 권세를 얻었습니다. 또 종교적인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물질과 명예와 권세와 율법을 지킴을 통해 영생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기를 구했습니다(19:16-22). 그러나 그는 돈 욕심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영생은 종교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한때 마니교를 따라 방황했던 어거스틴은 후일 하나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직 당신 안에서만이 영혼의 안식을 얻었나이다.”

이사야는 하나님 외에는 참된 영생이 없다고 했습니다(43:11).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2)

영생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살리셔서 죄와 죽음을 해결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28:18).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그 사랑을 알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알 때 영생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뜻은 단순히 듣고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통한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로 남편과 아내가 연합하여 한 생명을 낳는 신비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순간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 생명은 아담 생명과 전혀 다른 예수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안다는 뜻은 현재 가정법으로 점점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알아가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아갈 때에 영생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독일에 돈 불이란 뮤지컬이 있습니다. 한 부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남매를 낳고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행복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습니다.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두 자녀를 키울 수 없었기 때문에 재혼하였습니다. 재혼한 아내는 착했습니다. 남편을 잘 섬기고 두 자녀를 자기 자식처럼 길렀습니다. 잃었던 행복이 다시 찾아 왔습니다. 두 자녀가 각각 결혼하고 분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과 딸이 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아버지 수십억 재산은 내 것입니다. 어머니는 계모입니다. 몇 억을 드릴 터이니 받으시지요.” 이 말을 들은 계모는 화가 나 너희 아버지 재산은 법적으로 내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니요. 내가 장남이요. 이 돈은 내 것이요.” 하였습니다.

아버지 시신 앞에서 재산을 가지고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던 딸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돈, 증권, 땅문서 모두를 화로에 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모두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딸이 외쳤습니다. “어머니! 오빠! 이리 오세요. 돈이 불타고 있어요. 당신들이 싸우는 돈이 타고 있어요. 돈 불 쬐세요.” 둘이 싸우다 보니 돈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제 서로 싸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계모와 오빠는 화로 앞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벌리고 돈 불을 쬐면서 셋이 외쳤습니다. “돈 불! ! 따뜻하다.” 그리고 셋은 다시 손을 맞잡는 것으로 뮤지컬은 끝납니다. 이 뮤지컬이 암시하는 것은 행복했던 가정이 돈으로 인해 서로 싸우는 지옥이 되었다가, 싸움의 근원인 돈을 태워버림으로서 다시 손을 맞잡고 행복을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매우 필요하고 유용합니다. 그러나 돈이 삶의 수단이 되어야지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삶의 목적이 될 때 마음에 상처를 입고 얼굴에 웃음을 잃어버리고, 의리가 상하고, 우정에 금이 가고, 뜨거웠던 사랑이 식어버리고, 가족 간에 반목하게 되고, 대인관계가 얼어붙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돈은 현악기와 같아서 적절이 사용하지 않으면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냅니다.

돈은 결코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지 못합니다. 돈이 영생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돈 불을 피우고 돈 불을 쬐십시오. 돈 불은 따뜻합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십일조뿐만 아니라 물질을 적극적으로 주님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 다른 것으로 다 새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 나라에 저금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돈도 아니고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십자가의 비밀을 알아나갈 때 영생 또한 더 깊어집니다.

2. 사명의 완수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신 예수님(17:4-10)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뜬 구름을 잡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충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충심으로 섬겨 다 이루셨습니다( 19:30).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제자를 양성하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17:6).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운명까지도 좌우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 속에는 열국의 아버지 됨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구원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나 소중하여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라고 써 놓고도 읽지 못하고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속죄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는데, 이 때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신비롭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비로운 하나님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다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과 인격과 행하심과 위대하심을 다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다 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신 것이 모두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말씀을 비판하고 거부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말씀을 다 받아들였습니다(17:8). 그때 그들은 말씀의 뜻을 깨닫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 지켰습니다. 성경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들은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명은 삶을 아름답게 하고 가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사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일터와 캠퍼스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땅입니다. 우리가 일터를 사명의 땅, 즉 성직으로 여길 때에 충심을 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귀히 여기셨습니다. 내가 그들은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7:9) 그들은 대부분이 당시 천한 어부 출신들이요, 또한 악명 높은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이고 은혜도 모르는 배반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로 여기고 사랑과 겸손과 온유로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바울은 그의 제자들을 소망이요 기쁨이요 면류관이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살전 2:19-20, 4:1).

우리는 우리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특히 우리는 오래 동안 함께하다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빛난 보배와 같은 분들입니다. 사귐의 시간이 많아져 관계성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사도들과 성도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17:11-26)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 악에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7:11-16).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7:11-12)

지킨다는 것은 부단히 살피고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의 악영향에 물들지 않도록 부단히 살피고 그들의 내면을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음란하고 쾌락적인 헤롯당과 형식과 위선과 물질적인 바리새인들의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물들기 쉬운 그들을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로 보호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오직 멸망의 자식인 가룟 유다만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기 때문에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잘 아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제자들이 세상의 죄악에 도전하여 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운 맥아더 장군은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문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쉬움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대하여 분투항거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 용감히 싸울 수 있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7:17-19).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거룩이란 구별하다란 뜻입니다. 거룩함은 제자들의 존재 의미요 목적이요 가치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면 그 존재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이는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원동력은 거룩한 삶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자신을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각종 향락문화와 쾌락주의가 판을 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세속적이 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거룩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17:20-26).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여 믿게 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대만 보지 않고 먼 미래를 보셨습니다. 2,000년 후의 우리를 보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제자들이 세상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비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계적이고 역사적입니다.

이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의 첫째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조직으로서의 획일적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연합으로서의 하나를 뜻합니다. 이는 마치 오케스트라가 각기 다른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지만 한 음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각기 개성이 다르고 사역이 다르지만 몸된 교회를 세울 때에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사단은 분열을 심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오직 하나가 되게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10).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가 됩니다(17:23).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둘째는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예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장차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됩니다(딤후 2:10-12). 또 주님께서 누리는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세상에서 제자들이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소원대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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